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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軍部) ] (Military)

Ⅰ. 개관. 한국의 군부는 지배 권력의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 권력 기구의 중심에 청와대, 정보기관, 군부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 기구들의 책임자 및 핵심요직의 하위 권력분파들이 국가권력의 핵심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 핵심적 하위 권력분파들은 상호협조관계 및 상호갈등관계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심각한 대립관계를 표출하면서 권력대립 양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유신체제 등을 통하여 권력의 중앙  집중화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억압적 국가기구의 비중이 커졌으며, 이에 따라 정보기관, 청와대, 군부의 국가 권력기구로서의 위치는 더욱 중요시되었다. 이 중에서도 군부가 국가권력의 원으로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군대가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물리적 폭력기구이며 그 존재근거 자체가 폭력의 조직적 사용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서 군대는 신식민지 파쇼 체제의 국가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최종적 폭력이며 최후의 수단이다. 따라서 한국의 군부는 5.16과 1980년 ‘광주’에서 보여주었듯이 파쇼 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폭력적 탄압을 주요한 임무 중의 하나로 하고 있다. 동시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최전선에서 방파제 역할을 하는 한국의 군부는 작전 지휘권을 미국에 넘겨주어 자주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국주의의 신식민지 지배전략에 복무하면서 민주화 운동, 자주화 운동 그리고 통일 운동을 물리적으로 억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군부의 특징은 한국군부의 형성과정, 정치 개입과정, 지배구조 등과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다.
Ⅱ. 군부의 형성과정. 한국 군부의 형성과정은 해방 이후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해방 직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일제의 조선총독부 대신 미 군정청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국방사령부>를 두었다. 국방사령부의 첫 사업은 군사 영어 학교를 설립하여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고 통역을 할 수 있는 장교후보생들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미군정은 1946년 1월에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발족시켰으며, 1946년 5월에는 군사 영어 학교를 대체하는 <남조선국방경비학교>를 신설하였다. 곧이어 1946년 6월에 남조선국방경비대는 다시 <조선경비대>로, 남조선국방경비학교는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되었고, 이들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 각각 국군과 육군사관학교로 정식 출범하였다. 당시의 국군은 광복군 출신 일부와 일본사관학교 출신, 만주사관학교 출신, 학병 출신으로 이루어졌다 미군정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워온 임시정부의 광복군 및 만주의 독립군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는 국군을 창설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해체, 개인 자격으로 흡수하였으며 창군 과정에서도 이들을 계속 소외시켰다. 이에 따라 한국의 군부는 일본군계와 만주군계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그들의 비호 아래 그 지위에 오른 자들이자 광복군 및 독립군과는 적대적 입장에 있는 반민족적 성격을 띤 집단들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군부는 형성 초기부터 반민족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창설된 한국의 군부는 당시 7천 명 이하의 규모로 출발하였지만 한국전쟁의 종결시점에는 약 70만 명에 육박하는 규모로 100배 이상의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 이러한 급속한 성장 자체가 한국 군부의 성격을 밝히는 근거가 된다. 이 시기는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을 둘러싼 외세 및 매판·우익 세력들과 민중들 간의 전면적인 투쟁이 역동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였으며, 한국전쟁은 이러한 투쟁의 폭력적 해결의 장으로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군대는 당시 외세와 매판·우익 세력들의 이해 관철의 도구로 활용되었던 식민지 경찰에 더하여 근대적 군을 그들의 정치적 이해 관철을 위해 절실히 요구하고 있던 지배세력의 필요에 의해 조직되고 성장하였던 것이다. 한편 한국전쟁은 한국군부의 이러한 국내정치적 역할에 더하여 미국의 세계전략이라는 세계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대소 전진기지의 국제적 역할을 부여받는 직접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대사회주의 및 대소전략은 봉쇄 정책과 반격정책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냉전체제의 세계적 구축으로 확고하게 정립되었는데, 한국은 이를 위한 동복아시아에서의 대소 전진기지로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즉 한국 군부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미국의 세계전략에 복무하는 지역군이라는 국제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주한미군의 주둔, 한국군의 작전권 이양, 한·미 상호방위조약, 핵무기와 핵기지 설치 등 제반 한·미 군사문제에는 대북한 대응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이러한 국제적 성격의 제도화라는 정치적 의미가 더욱 핵심적인 것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층적 역할과 위상을 부여받은 한국의 군부 는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정치에 개입하였다.
Ⅲ. 군부의 정치개입. 군을 정치에 개입시키려는 최초의 시도는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1952년 부산 정치파동 시 위수령을 선포하여 군을 동원하려 하였으며, 그 외에 민중 운동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의 정치적 반대세력인 야당을 탄압하기 위하여 군 수사기관을 동원하였다. 또한 선거 및 정치테러에 군을 동원하여 군을 고도로 정치화시켰다. 그러나 민간 정치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부 자신이 직접 정치개입을 시도하고 이를 성공시킨 것은 1961년 5.16 쿠데타였다. 그 이후의 한국 정치는 사실상 군의 정치개입을 제도화하는 과정으로 점철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기간에도 군부독재정권은 다섯 번의 계엄령과 두 번의 위수령, 한 번의 비상사태를 동원하여 군대를 정치에 직접적으로 동원, 이용하였다. 그러나 군부의 정치개입을 제도화하고 정당화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이데올로기적 동원과 직접적인 물리력의 결합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행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72년 10월 유신이 1971년 대통령선거로 표출된 정치적 위기에 대한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으로서 예방적으로 취해진 군부독재정권의 재정비였다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의 상대적인 순탄함은 당시 정치위기의 수준이 정치권력의 수준에 의해 미봉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9년 정치적 위기와 1980년의 폭력적 군부정권의 재편은 1972년의 그것과는 전혀 양상을 달리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위기의 수준과 발현방식의 차이 및 기존 정치권력의 대응력의 한계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광주항쟁은 군의 정치개입의 주객관적 조건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이었다.
Ⅳ. 군부의 정치적 성격. 이와 같이 한국의 군부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복무하는 대소 전진기지로서의 국제적 성격을 가지며, 그 창설과정에서부터 체화된 국내정치적 성격의 일방적 편향성에 더하여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이 이해의 직접적 대변자이자 정권의 직접적인 물리적 토대로서의 현재적 정치성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 군부의 이러한 성격 외에 지적되어야 할 점은 그동안 군부 독재정권하에서 정치화된 군부의 상당 부분이 사회 내로 조직적으로 이행함으로써 그 자신이 사회적으로 견고한 이해관계를 갖는 집단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군부가 군부 자체의 이해관계에 더하여 사회화된 군부 또는 민간화된 군부의 사회적 기득권을 확보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군사문화의 확산문제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군사문화는 물론 군부독재정권의 지배방식의 결과이자 지배의 효율성 제공을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군사문화의 본질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냉전적 흑백논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한 성과 위주의 행정만능적 관료주의로 외화되기도 한다. 그것은 정치의 다양성을 부정하며 민주적 절차의 성실한 수행을 논의의 난삽·혼란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지적되어야 할 점은 군수산업의 문제이다. 군수산업은 독점자본의 운동에 긍정적인 매개가 될 수 있는 좋은 투자영역으로 상정된다. 또한 이는 국방관련 예산의 증대를 수반하는 과정에서 군부의 다양한 이해와 일치한다. 이와 같이 한국 군부의 보다 구조화된 정치적 이해영역으로, 사회화된 군부의 기득권과 군수산업 영역의 확장을 지적할 수 있지만, 한국 군부의 성격을 밝히는 본래의 중심영역은 군의 정치개입 문제이며, 군부 정권의 문제이다. 이는 한국의 정치체제를 신식민지 파시즘, 나아가 신식민지 군부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즉 한국의 군부는 일회적인 정치개입과 과도적인 정권찬탈로 정치개입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반대로 개입을 항상화하고 개입을 구조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결국 한국의 군부는 패권적 부르주아 지배구조가 취약한 상태에서 정치개입을 통해 지배세력의 이해를 전일적이고 폭력적으로 담보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군 자체의 정치적, 사회적 이해를 확대하고 이를 구조화, 제도화시키기 위한 자기운동에 충실했던 정치집단인 것이다. → 박정희,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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