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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3·1 運動)] ()

I. 3·1 운동은 조선 민중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여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위해 일으킨 전민족적인 반일투쟁이었다. 34운동은 무엇보다도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민중 사이의 민족적, 사회적 모순을 기본동인으로 하여 일어났다. 일제 강점 이전부터 계속되던 식민지 수탈과 파쇼적 억압으로 인해 조선 민중의 처지는 더할 나위 없이 열악하게 되었으며 일제와 민중 사이의 대립 또한 첨예하게 되었다. 일제와 그에 기생하는 친일 주구배들의 착취는 날로 더해갔고 조선 민중의 생활은 식민지 노예상태로 떨어졌다. 전대미문의 테러통치 체제인 무단통치에 의해 조선 민중은 완전한 정치적 무권리상 태에 빠졌다. 매관지주와 매관자본가를 제외한 각계각층의 민중은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자주독립에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식민지사회의 최하층에 위치한 노동자와 농민은 가장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민중 대 일본제국주의 사이의 민족적·사회적 모순의 격화 속에서 1910년대 후반에 일어난 국내외 정세의 변화는 조선 민족의 반일기운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혁명과 제1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재편 및 제국주의의 상대적 지위 약화로 인해 서구의 자본주의국가에서는 혁명적 노동운동 이 급속히 성장하였으며 식민지와 약소국에서는 민족 운동이 대중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혁명적 분위기의 고양은 피압박민족들의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였고 이 무렵 조선에서도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조선 민중은 일제의 식던지 침략이 본격화되던 첫 시기부터 이에 항거하여 용감히 싸나갔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조선 민중의 투쟁은 1910년대에는 의병전쟁을 계승한 반일 무장활동과 반일 정처활동, 애국적인 문화·계몽운동 등 다양하게 펼쳐겼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들은 몇몇 지사들의 자기희생적인 투쟁으로 시종되거나 대중조직 사업을 결여한 단순한 계몽활동, 무장대오의 유지에 급급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운동을 주도하였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계급적 사상적 조직적 한계성으로 인해 이 시기의 반일운동이 대중에 뿌리박지 못하였다는 기본적인 약점을 가지고 전개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당시 민족해방운동의 미숙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 이 무렵 노동자·농민들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초보적인 권리와 생존권 확보를 위해 투쟁을 벌여나갔고 1910년대 말기로 접어들면서 그러한 경향은 강화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거의 자연발생적 이었고 계급적 결속력이나 조직적 결집의 정도는 아직 매우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

 

. 3· 1 운동은 191931일 서울에서의 반일시위 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또 해외로 급속히 번져나갔으며 일제의 식민통치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제의 고의적인 축소발표에 의하더라도 31일부터 운동이 퇴조한 4월말까지 618개 장소에서 332회의 폭동과 757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3·1운동은 독립만세'일본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일어난 거족적 운동이었지만 민중의 내부구성상의 차별성을 일정하게 반영하면서 전개되었다. ‘민족대표'를 위시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운동의 사전계획 단계와 운동이 퇴조하면서 그 여진이 계속되던 2~3여 년의 기간 동안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정치적 입장을 민족자결론과 국민주권론에서 구하고 운동을 그들이 의도하는 대로 이끌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 사상적 유약성, 정치적 입장의 불철저함, 투항주의적 태도 및 투쟁성 의 부족으로 인해 초기단계에서부터 급속히 몰락하고 이로 인해 운동의 지도력을 상실하였다. 청년학생과 진보적 인텔리는 초기단계에서부터 일제와 비타협적으로 싸워나갔다. 이들은 다양한 선전·선동활동과 시위 주도로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파하였다. 또 중소상인, 수공업자를 비롯한 도시 쁘띠부르주아계급은 대중시위, 철시투쟁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다. 3·1 운동은 일제로부터의 분리와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정치적 대중시위로 시작되었다.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운동의 주도권은 조선 민중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은 완전한 독립과 일제를 몰아낼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투쟁대열에 노동자·농민·도시번민 등 기층민중이 대중적으로 망라되기 시작하면서 운동은 보다 격렬해졌고 폭동과 같은 적극적 투쟁의 형태를 띠었고 조직성도 한층 강화되었다. 3월 하순에 들어서 이들은 각지의 시위와 폭동을 주도하였다. 민중의 격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일제의 야만적 탄압과 주체적 한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또 광범위하게 민중돌이 대중적으로 운동에 참가하였으나 그들의 슬로건은 반일에 머물렀고 사회적 변혁의 실질적 내용을 이루는 반봉건의 과제를 전면적으로 내걸지는 못하였으며 조직적으로도 이들의 운동을 지도할 중심조직이 없어 투쟁은 자연발생적이고 산만하게 전개되었다. 3·1 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민족해방운동사상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일대 사건이었다. 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민족해방운동은 새로운 분화와 재편을 거치면서 노동자계급의 주도하에 전개되어나갔다. 일제하 민족해방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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