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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공산주의] (war communism)

I. 전시 공산주의란 191710월 러시아혁명과 19213월의 신경제정책의 채택 사이의 내전 및 제국주의의 간섭 전쟁 시기에 있었던 일련의 정책 및 경제운영 체계를 말한다. 10월혁명 직후 소비에트 정권은 레닌의4월 테제에 기초하여 주요 생산수단과 유통수단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국민경제의 관제 고지를 장악하였다. 이는 구체적으로 첫째 지주로부터의 토지 몰수 및 전국토의 국유화, 둘째 은행 국유화, 셋째 대규모산업의 국유화, 넷째 생산과 분배에서 노동자통제의 확립 등이었다. 그러나 1918년 봄부터 백군과의 내전과 제국주의 국들의 군사간섭이 전개되었고 국토의 많은 부분들이 전장으로 화하여 생산은 열악한 상태로 치달았다. 공업의 생산력은 1913년을 100으로 본다면 1918년에 35, 1919년에 17, 1920년에 15로 하강하였고 농업생산도 1913년의 약70%로 저하하였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 정권은 1918628일반국유화법령의 포고와 함께 급격한 정책 전환을 실시하게 되었다. 구체적 내용은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업의 통제 내지 국유화 곡물매매의 국가독점과 농민에 대한 잉여식량의 할당징발제 모든 계급에 대한 일반근로 의무제도 둥이었다. 전시 공산주의의 정책은 노동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을 노동하게 하여 농업과 공업의 생산물을 모두 국가가 장악하여 배급한다는 효과가 있었다. 도시에서는 식량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의 배급제가 이루어졌고 인플레이션의 진행으로 인한 화폐의 감가는 현물경제를 촉진시켰고 공공서비스는 점차 무료로 되었다. 이런 상황은 경제의 현물화, 자본주의적 요소의 일소 및 공산주의로의 접근으로 환영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소비에트 국가의 관리능력을 넘는 공업까지 무리한 국유화를 단행한 결과 공업생산을 혼란시켰으며, 잉여식량의 징발에 의해 농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특히 종전에 따른 평화의 도래와 함께 이 불만은 심화되었고 각지에서 소규모의 농민폭동이 일어나고 19213월에는 크론슈타트 요새의 수병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전시정책으로부터 평화시 정책으로의 전환이 요구되었고 이는 신경제정책 NEP으로 이어지게 된다.

II. 전시 공산주의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19215월 레닌이 식량세에 관하여에서 전시 공산주의의 불가피성과 함께 그 일시적 방책임을 강조한 이래, 전시 공산주의는 전쟁시의 일시적 비상수단이고 따라서 전쟁 이후 당연히 폐지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시 공산주의와 공통의 이념을 내세운 1919년의 러시아공산당 강령은 이후 1961년까지 소련공산당의 정식강령으로 존속되었으며 1928년에 시작된 소련의 집단화계획화에서도 경제의 현물적 계획화, 상품화폐 관계의 소멸을 목표로 하는 방향이 관철되었다. 전시 공산주의는 한편으로 확실히 전시상황 시 비상수단의 성격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이념은 소련형 계획경제의 원형으로서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레닌 : 전시공산주의는 전쟁과 황폐로 부득이했다.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임무에 따른 정책은 아니었으며 또한 그럴 수도 없었다. 그것은 일시적인 방책이었다. 소농민적인 국가에서 자기의 독재를 실현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올바른 정책은 곡물과 농민이 필요로 하는 공업제품과의 교환이다. 이와 같은 식량정책만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에 상응한 것이며 사회주의의 기초를 견고하게 할 수가 있고,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식량세에 대하여, 1921, 레닌전집 제32, pp.369370)

 

스탈린 : 신경제정책은 모든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불가피한 단계이다. ……똑같은 것을 전시공산주의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전시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불가피한 단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전시공산주의는 전쟁상태와 간섭에 의하여 강요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책으로서 그것은 시장을 거치지 않고 시장에서 떨어져서 주로 경제 외적인, 부분적으로는 군사적 방식으로 도시와 농촌과의 사이에 직접 생산물 교환을 확립하려는 것이며 또한 전선의 혁명군과 후방의 노동자에 대한 보급을 확보할만한 생산물의 분배를 조직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었다. 전쟁상태와 간섭이 없다면 전시공산주의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전시공산주의가 경제적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불가피한 발전단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소비에트 동맹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그 경제적 활동을 전시공산주의로부터 개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약간의 동지들은 이 문제에 대해 갈피를 잡시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옳지 않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우리나라에서는 전시공산주의로부터가 아니고 소위 신경제정책의 제 원리의 선언으로부터 그 건설 활동을 개시한 것이다. (소련공산당볼셰비키중앙위원회 총회1928, 스탈린전집 제11, pp.181188)

 

트로츠키 : 나는 모스크바의 당 조직으로부터 모스크바동지들에 대한 보고를 지정받고 제3회 대회를 새로운 단계그리고즉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운동의 발전 속에서 새로운 단계를 여는 것으로 평가했다. 이리하여 이 단계는 극히 중대한 퇴각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두개의 퇴각, 즉 하나는 경제영역에서 또 하나는 유럽 정치영역에서의 퇴각은 각각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시공산주의는 하나의 조건——1920년과 21년에 유럽의 노동계급이 권력을 탈취한다는 조건하에서만 비로소 후퇴 없이 완전히 사회주의=공산주의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일이 있었다면 적의에 찬 외부압박도 없이 우리는 기술상조직상문화상 원조를 받음으로써 무진장한 자원을 획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시공산주의가 본질적으로 내전의 절대적인 필요에 의하여, 객관적으로는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서구의 혁명이 급속하게 전개되어 오히려 비애를 자초하는 듯한 문화적 기반 위에서 획득할 수 있는 행로보다 훨씬 빠른 페이스로 우리를 향상시키고 전진시킬 것이라는 기대와 결합되어 있는 한에서는 주관적으로도 정당했다. 그런데 서구의 혁명은 저지되었다. (10월 혁명의 제5주년기념 및 코민테른 제4회 세계대회에 관한보고, 1922, 트로츠키 선집 제2, p.249)

혁명후의 최초 3년간은 공공연한, 참혹한 내란의 시대였다. 경제생활은 모두가 전선의 필요에 속했다. 문화생활은 구석에 박혀버리고 물적 수단의 극단적인 결핍과 더불어 대담하고 웅대한 창조적 사상은 특히 레닌의 개인적 사상에 의하여 특징지어졌다. 이것은 이른바 전시공산주의의 시대(1918922)로서 자본주의 제국의 전시사회주의와 용감하게 대항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소비에트 정부의 경제문제는 주로 군수사업을 원조하고, 과거부터 남겨진 미약한 자원을 군사목적과 도시주민을 살리는 것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전시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는 포위된 요새 내의 소비를 조직적으로 편성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전시공산주의의 본래의 관념은 더 광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비에트 정부는 분배에 있어서도 이 조직적 편성방법을 직접 계획경제 속에서 발전시킬 것을 희망하고 또 그를 위해 노력했다. 바꾸어 말한다면 전시공산주의에서 점차로, 그러나 조직을 파괴함이 없이 진정한 공산주의에 도달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19193월 채택된 볼셰비키당의 강령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분배의 영역에 있어서의 소비에트정부의 현재의 임무는 계획적인 사적 상업 대신 전국적 규모로 통일되게 조직된 계획적인 생산물의 분배를 일관해서 실행하는데 있다’. 그런데 현실은 전시공산주의의 강령과 더욱 충돌하게 되었다. 생산은 끊임없이 감퇴했다. 생산자간의 개인적 관심에 대한 자극이 냉각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도시는 농촌에 대해 곡물과 원료를 요구했지만, 그러나 그 대가로는 오래전의 기억에 있을 뿐인 통화라고 부르는 갖가지 종이 조각 이외에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농민은 자기들의 축적물을 지하에 은닉했고 정부는 곡물을 획득하기 위해 무장한 노동자 부대를 파견했다. 농민은 파종면적을 줄였다. 내란이 종식된 직후의 해인 1921년의 공업생산은 겨우 戰前수준의 5분의1에 불과했다. 강철생산은 420만 톤에서 183천 톤——즉 이전의 23분의 1로 떨어졌다. 1922년의 곡물의 전 수확량의 801억 파운드에서 503억 파운드로 감소됐다. 그것은 무서운 기근의 해였다. 동시에 외국무역은 29억 루블리에서 3천만 루블리까지 떨어졌다. 생산력의 붕괴는 사상공전의 것이었다. 국가도 정부도 다 같이 심연의 밑바닥에 있었던 것이다. 전시공산주의시대의 유토피아적 희망은 엄하면서도 많은 점에서 올바른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모든 예상이 서구에 있어서 혁명이 곧 승리한다는 희망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지배적 정당의 이론적 오류는 언제까지나 이해할 수없는 것이 될 것이다. 승리한 독일 프롤레타리아트가 장차 식량 및 원료에 대해 크레딧으로써 기계류나 제품뿐만 아니라 몇 십만의 매우 숙련된 노동자기사 및 조직자를 소비에트 러시아에 공급해줄 것이 자명한 일로 생각되었다. 만약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승리했다면그것은 오로지 사회민주당에 의하여 저지되었지만—— 소비에트동맹과 독일의 경제적발전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추진되어 그 때문에 유럽과 세계의 운명은 오늘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운에 이르렀다고 해도 생산물의 국가직영분배를 폐지하고 상업적 수단을 채용하는 것은 역시 필요했을 것이다. (배반당한혁명 1936, 논쟁사, pp.2830)

 

코민테른 강령 :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자본가들의 무력간섭 혹은 영속적인 반혁명적 전쟁의 경우에는 경제 지도를 우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그때 전시 공산주의적 경제정책(‘전시공산주의’)이 필요해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군사적 방위에 도움이 되는 자본주의적 그룹에 대한 압박(몰수, 징발 등)강화의 체계와 결합된 합리적 소비의 조직화일 따름이다. 이때에는 국가의 생산력 저하와 결합되어 자유로운 상업과 시장이 다소라도 소멸하고 그리고 소생산자의 개인주의적인 경제동기가 현저하게 저지당한다. ‘전시공산주의의 이 정책은 그것이 국내의 노동자계급에 적의를 갖는 층의 물질적 기초를 매장하여 현재의 물질의 합리적 분배를 보장하고,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독재의 무력투쟁을 용이하게 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정당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책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정상적인경제정책체계여서는 안 된다. (국제 공산당 강령1928, 코민테른 제6회 대회 제46차 회의 채택. 현대사자료 제14, p.234)

 

소련과학아카데미 경제학연구소 : 소비에트권력은 사회주의혁명 직후의 수개월 동안에 재빠르게도 농촌과의 상품교환을 조직하여 루블리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통화개혁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외국의 간섭과 내전이 소비에트 러시아를 포위된 요새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으며 그러한 계획은 좌절당하고 말았다. 광대한 국토와 생산용 자원의 산지 및 식량이, 간섭군 및 그와 결탁한 국내의 반혁명군 손에 들어갔다. 국내는 이미 제1차 세계전쟁으로 극심하게 황폐되어 있는 위에 장기간의 간섭에 의하여 국내의 황폐와 파괴는 더욱 심해졌으며 기아는 심각한 것이 되었다. 도시에서는 연료. 원료. 소비물자의 축적이 완전히 고갈되었고 공장이나 수송기관은 가동되지 못했다. 소비에트국가는 식량 및 원료를 농촌과 교환하기 위한 공업제품도 갖지 못한고 있었다. 그 때문에 소비에트 국가는 농촌과의 상품교환 대신에 농민으로부터 잉여 농산물을 어쩔 수 없이 무상 몰수하는 경제 정책을 한때 취하게 되었다. 농민은 소비에트 권력과 거기에서 받은 토지를 남겼으며 지주와 자본가가 권력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길을 택했다. 자원이 빈약했으므로 소비에트 국가는 부득이 본질적으로는 상업을 금지하고 소비물자의 배급제를 실시했는데 1인당 배급량이 극히 적었다. 소비에트국가는 또한 기업에 대하여 일체의 생산수단을 현물로, 화폐지불을 동반하지 않고 중앙집권적으로 공급하는 제도를 실시하여 생산수단의 지출을 극히 엄하게 규제했다. ‘전시 공산주의라고 불린 이 정책은 그와 같이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비상사태 하에서 필요했다. 이 정책에 의하여 국가경제 전체가 전선에 봉사할 수 있었고, 혁명이 파멸되어 제국주의가 국가를 강탈할 우려를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러한 정책은 경제를 더욱 쇠퇴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책은 도시와 농촌의 경제적 결합이라는 것과 양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농민이 생산증대에 대한 물질적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되며, 공업 일꾼에게는 물질적 자극이 손상되고, 기업은 경영상의 자주성을 모두 빼앗기고, 기업의 독립채산성수익성경제계산제의 지반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경제학교과서 제3분책, 개정증보 제4, 합동출판사, 동경, 1974, pp.535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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