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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 1905 ] (the Russian Revolution - 1905)

레닌 : 제네바, 10월 19일. 월요일 밤늦게 10월17일의 츠아의 조서(詔書)에 관한 보도를 전보가 유럽에 전했다. ‘인민은 승리했다. 츠아는 항복했다. 이제 전제(專制)는 존재치 않게 되었다’라고 타임즈의 특파원이 알려왔다. 먼 곳에 있는 러시아혁명의 친구들은 이와는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 그들은 볼티모어로부터 프롤레타리에 이렇게 타전했다. ‘러시아혁명의 최초의 대승리를 축하한다’라고, 사건에 관한 그 후의 평가가 의심할 바도 없이 훨씬 정확하다. 우리는 개가를 올릴 충분한 권리를 갖고 있다. 츠아의 양보는 참으로 혁명의 최대승리였지만 그러나 이 승리가 자유사업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기에는 아직도 멀고멀다. 츠아는 아직 결코 항복한 것이 아니다. 전제가 결코 존재치 않게 된 것이 아직 아니다. 그것은 전장을 적에게 내주고 퇴각한 것에 불과하고 극히 중대한 전투에서 퇴각한 것이지만 아직 결코 분쇄 당하지 는 않았다. 그들은 지금 자기세력을 규합 중에 있다. 혁명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혁명적 인민은 아직 많은 극히 중대한 투쟁임무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월 17일이라는 날은 러시아 혁명의 위대한 날들 중 하루로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세계에서 지금까지 본적도 없는 전 인민적 스트라이크 그 정점에 달했다. 러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영웅적 연대정신에 의해 일어선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찬 손은 공업・상업・국가의 전 생활을 정지시켰다. 전국은 폭풍우를 앞에 두고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연달아 더욱 불안한 소식이 어떤 때는 여기에서 어떤 때는 그곳 대도시로부터 날아왔다. 군대는 동요하였다. 정부는 탄압을 삼가하고 있었고 혁명가는 공공연하고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지만 봉기는 자연적인 기세로 곳곳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츠아 정부는 폭발이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자기로서는 완전승리를 획득할 힘이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없고 완전 패배할 두려움만 매우 크다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순간에 양보에 응한 것이다. ‘처음에는 피를 홀리겠지만 그 후에 헌법이 생길 것이다’라고 트레포프가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봉기가 진압된다고 해도 헌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정부는 중대한, 전국적인 유혈의 위험을 일으키지 않는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민이 승리 할 경우에 츠아의 권력은 뿌리채 일소되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최초의 승리, 1905, 레닌전집 제9권, pp. 454〜455).
1905년 1월 22일 (러시아역(磿)의 9일) 이전, 러시아의 혁명적 제 정당은 극소수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당시의 개량주의자는(오늘날의 개량주의자와 완전히 똑같이!) 우리를 매도하여 ‘종파(宗派)’라고 불렀다. 수백의 혁명적 조직자, 수천의 지방조직 멤버, 한달에 한번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 반타스의 혁명적 신문一一그것은 주로 외국에서 발행되어 극심한 곤란과 희생을 치르면서 러시아로 밀반입되고 있었다-------이것이 1905년 1월 22일 이전의 러시아의 혁명적 제정당과 그 선두에 섰던 혁명적 사회민주당의 실정이었다. 이러한 사정이 소견이 좁고 동시에 오만한 개량주의자들에게 러시아에는 아직 혁명적 인민이 없다고 주장하는 형식적인 권리를 부여했던 것이다. 몇 달 만에 사태는 완전히 일변했다! 수백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는 ‘돌연’ 수천으로 늘어나고 수천의 멤버는 2〜300만의 프롤레타리아트 지도자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5천만에서 1억에 달하는 농민대중에게 커다란 동요를, 부분적으로는 혁명운동을 낳았고 농민운동은 군대 내에 공감을 불러일으켜 군대의 반란, 군대 내부에서의 무력투쟁을 가져오게 했다. 이리하여 1억 3천만의 주민을 갖고 있는 방대한 나라가 혁명에 돌입했다. 이리하여 잠자던 러시아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혁명적 인민의 러시아가 된 것이다. 이 추이를 연구하고 그 가능성, 말하자면 그 방법 또는 경로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추이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대중적 스트라이크 이었다. 러시아혁명의 특이성은 바로 이 혁명이 그 사회적 내용으로 보면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이었지만 그 투쟁수단으로 보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던 점에 있다. 이는 그가 직접 지향했던 목표, 그리고 자력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목표가 민주적 공화제, 하루 8시간 노동, 귀족이 소유했던 광대한 토지의 몰수였기 때문이다. —— 이러한 것은 모두 1792〜93년의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이 대부분 실현했던 방책이었다. 이와함께 러시아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도세력으로 운동의 전위였다는 의미에서 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특유의 투쟁 수단, 즉 스트라이크가 대중을 봉기시키는 주요한 수단이며 결정적인 제사건의 파상적 경과 속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이었다는 의미에서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세계사상(世界史上) 대혁명 중 정치적 대중 스트라익이 커다란 역할을 연 출한 최초의——그것은 분명히 최후의 것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혁명이었다. (1905년의 혁명에 대한 강연, 1917, 레닌전집 제23권, PP. 261〜262).

트로츠키 : 1905년의 사건은 1917년의 두개의 혁명, 즉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서막이었다. 이 서막에는 연극(演劇)전체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완수되지는 못 했다. 노일전쟁은 츠아리즘을 흔들어 놓았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는 대중운동을 배경으로 하면서 반대로 제정을 협박했다. 노동자는 부르주아지로부터 독립하고 또한 그것에 반대하여 소비에트로 조직되었다. 소비에트는 이때 처음으로 생긴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다. 토지몰수를 위해 생긴 농민봉기가 광범한 농촌지방 전체에서 발발했다. 농민만이 아니라 혁명화한 군대도 소비에트로 향했다. 그리고 소비에트는 정세가 가장 급박했던 순간에 공공연히 제정과 정권을 다투었다. 그러나 온갖 혁명적 노력이 이때 겨우 활동하기 시작한 것으로서 경험도 없었고 자신도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제정을 흔드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이를 전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해진 순간에 혁명으로부터 시위적으로 몸을 뺐다. 이와같이 부르주아지가 인민과 결정적인 결별을 하면서 민주적 인텔리겐차의 대부분을 데리고 떠났기 때문에 제정은 쉽게 군대 내에서 분열작용을 일으켜 충성스런 부대를 떼어 버림으로써 노동자・농민과 피비린내 나는 결말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제정은 늑골을 두 세개 부러뜨렸을 뿐이고 1905년의 위기를 무사히 건전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 러시아 혁명사 제1권, pp.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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