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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근(林元根, 1899~1963) (本)林容豊] ()

(고려공산당 당원)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1912년 서울 미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했다. 4월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한 후 서울에서 공익사(共益社)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꾸(正則)영어학교를 거쳐 케이오오의숙(慶應義勢)에 입학해서 2년간 수료한 뒤 중퇴했다. 유학중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했는데, 1920년 봄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했다. 그해 10월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혜령(惠靈)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3월 고려공산청년단 상해회 결성에 참가하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 무렵 재상해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1922년 1월 모스끄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재상해 독립신문사 대표로서 참가했다. 이어서 열린 극동청년대회에 고려공산청년단 대표로서 참가했다. 3월 고려공산청년회 제2차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4월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국내로 이동하기 위해 박헌영(朴憲永) ․ 김단야(金丹治)와 함께 귀국하다가 압록강변의 안동(安東)에서 검거되어 5월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고려공청 중앙위원, 민주주의독립전선 준비위원) 1924년 1월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서울에서 신흥청년동맹, 화요회 등에 가입했다. 5월 동아일보사 기자가 되었다가 7월 동맹파업을 주동한 혐의로 사직당했다. 8월 신흥청년동맹의 기관지를 발간할 목적으로 신흥청년사(新興靑年社)를 창립하고 상무위원이 되었다. 그해 여름 허정숙(許貞淑)과 결혼했다.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활약했다. 4월 고려공청 창립대회에 참석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선전교양부를 담당했다. 8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가 10월에 16명의 기자와 함께 해직되었다.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지법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30년 1월 출옥했다. 1931년 2월 잡지 『신천지』에 신간회 해소를 반대하는 논문 「해소 운운은 인식착오」를 발표했다. 1932년 8월 허정숙과 이혼하고 이 무렵 공산주의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 기자, 1936년 『조선중앙일보』 지방부장이 되었다. 그후 홍중(弘中)주식회사, 조선기계주식회사 등에 관련했다. 1947년 민주주의독립전선 준비위원회 결성에 참가했다. 1963년 5월 18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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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근(林元根, 1899~1963) (本)林容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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