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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식(印貞植, 1907 ~?) 金永浩 金水參 若火 葉楓 불꽃 桐生一雄] ()

(조공 일본총국 위원) 평남 용강에서 지주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조부가 개설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후 광량만보통학교를 다녔다. 1921년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5년 초 일본 호오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중 타이쇼오(大正) 데모크라시의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출판된 맑스주의 문헌을 통해 사회주의 시장을 수용했다. 재동경(在東京)무산청년동맹에 가입했고 1927년 9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에 가입했다. 이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위원, 고려공청 일본총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8년 8월 ‘조공 일본총국 검거사건’을 피해 잠시 국내로 귀국했다. 1929년 2월 조공 일본총국(ML파) 재건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직 재건을 위해 토오꾜오(東京)와 쿄오또(京都)에서 지하운동에 종사했다. 5월 일본경찰의 추적을 피해 국내로 들어와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청년 및 학생야체이까 결성을 시도했다. 6월 말 경기도에서 체포되어 1931년 3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34년 11월 가출옥했다.
(맑스주의 농업경제학자, 전향) 1935년 2월 고향에서 야학을 개설하여 지역 청년들에게 반일의식과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했다. 그해 여름 서울에서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 겸 논설위원이 되었다. 이즈음 맑스주의 경제학에 입각하여 조선 농업문제를 연구했다. 일제하 조선사회를 제국주의와 봉건적 생산양식이 결합된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민족해방운동의 핵심은 반봉건적 생산관계의 온상인 농업부문에 있다고 주장하여, 맑스주의 경제이론가인 박문병(朴文秉)과 ‘농업문제논쟁’을 벌였다. 1938년 4월 ‘공화계(共和契)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으나 10월 사상전향을 약속하고 출옥했다. 출옥 후 동양지광사, 대륙경제연구소, 조선국토문제위원회, 임전사상보국단, 조선언론보국회에 관계하면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지지하는 문필활동에 가담했다. 조선금융조합연합회, 농림국 촉탁으로서 조선 ․ 일본 ․ 만주의 농촌실태 조사활동에 참여했다. 시국강연회 ․ 좌담회에 참석하여 친일연설을 했다.
(『농림신문』 주필) 해방 후 조선사회과학연구소, 과학자동맹,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입하여 맑스주의 학술운동에 종사하면서, 토지개혁은 자주적 통일국가 건설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1947년 동국대학교에서 경제사, 조선경제사를 강의했다. 농업경제연구소연구원, 『농림신문』 주필이 되었다. 1949년 1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으나 전향을 약속하고 석방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 보도연맹 중앙조직에서 활동했다. 1950년 7~9월 서울시인민위원회 후보위원이 되었다. 그후 월북했다. 저서로는 『조선의 농업기구 분석』(백양사 1937), 『조선의 토지문제』(청수사 1946), 『조선농업경제론』(박문서관 194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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