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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李周淵, 1903~69)] ()

(단천 농민운동 지도자) 함남 단천 출신으로, 단천공립보통학교, 서울 중동학교를 졸업했다. 1922년 6월 단천청년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9월 신간회 단천지회 설립대회를 주도하고 간사로 선출되었다. 12월 단천농민연합회 산하 농민교육협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같은 달 파도면 서원(西原) 농장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천농민연합회 실행위원이 되었고, 단천청년동맹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3월 단천농민연합회가 주최한 조선농민사 이성환(李晟煥) 초청강연회에서 이성환과 농민운동 노선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여, 이후 단천농민연합회가 조선농민사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리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4월 단천에서 빈발하고 있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린 사회단체연합위원회에서 잠종(蠶種)대금 반환 교섭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1월 단천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단천농민연합회를 단천농민동맹으로 개편하고, 집행위원 겸 농민생활 상황 및 소작제 조사위원(파도면 담당)으로 선출되었으며, 신간회 단천구(단천 ․ 이원 ․ 북청) 복대표로 선임되었다.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1929년 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에 참가해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8월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1월 신간회 전체대회 대행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모임을 주도했고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2월 김재규(金在奎) 등과 함께 단천의 농민운동을 적색농민조합운동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협의한 결과, 같은 달 단천농민동맹 서면대회(書面大會)를 통해 단천농민조합으로 개편했다. 1931년 초 『동광』(제20호)과 『삼천리』(1931년 4월호)에 신간회 해소를 주장하는 글과 농민운동을 반일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킬 것을 제안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후 남대(南大)수리조합의 조합비 징수, 사방공사 토지매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직접 개입했다. 7월 ‘단천농조 탄압사건’으로 체포되어 1933년 10월 함흥지법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해방 직후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총무부장이 되었다. 1946년 3월 평양에서 열린 3 ․ 1절 기념행사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총무부장 자격으로 인민위원회 업무를 보고했다.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중국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1949)를 지냈고, 상업상(1952), 재정상(1954),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검사위원장(1956), 부수상(1958, 1962, 1967),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 후보위원(1961)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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