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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혁(柳赫, 1892~1966) (本)柳龍羲 (號)友石] ()

(조공 당원) 전남 영암 출신으로, 1909년부터 1913년까지 일본에 체류했다. 1925년 2월 광주에서 사상단체 전남해방운동자동맹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4월 전조선노농대회에 영암 대표로 참가했다. 1926년 영암 신북청년회 간부를 지냈다. 2월 전남청년회연합회를 전남청년연맹으로 개조하고 조사부위원이 되었다. 그 시기 전남노농연맹 발기준비회에 영암노동회 대표로 참석했다. 광주형평청년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4월 전남노동 ․ 농민연맹 창립준비회에 각각 참여하고 서무부위원이 되었다. 9월 광주지역 사회운동의 통합을 목표로 조직된 광주협회에 참여하여 노동부위원이 되었다. 1927년 6월 신간회 목포지회 설립에 참여했고 7월 목포지회 주최 연설회에서 ‘사회운동과 신간회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목포야체이까에 배속되었다. 12월 신간회 목포지회 제1차 정기대회에서 상무간사로 선출되었다. 1928년 7월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이 되었다. 8월 전남소년연맹 창립총회에 참가했다가 집회금지 명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금고 4월을 선고받고 12월 만기출옥했다. 그 직후 조공검거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수감되었으며, 1929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 간부, 조공전남도당 위원장) 1931년 만기출소했다. 9월영암농민조합을 결성하고자 했으나창립을 금지당했다. 1932년 4월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외부조직 연락부를 맡았다. 6월 이 협의회가주도한 메이데이 기념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검거되어 1933년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 해방 때까지 영암에서 금광채굴업에 종사했다.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결성식에 참석하여 사회를 보았다. 9월 조공 전남도책이 되었다. 12월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 전남 대의원으로 참석하여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조공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 전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같은 달 ‘조공 대회소집준비위원회 구성건의서’를 연명으로 당 중앙위원회에 제출했다. 3월 민전 전남지부 부위원장이 되었다. 6월 조공 전남도당 대회에서 박헌영(朴憲永)계의 요구에 의해 농민부장으로 물러났다. 1949년 6월 남북 노동당 합당 이후 월북했다. 1966년 3월 16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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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혁(柳赫, 1892~1966) (本)柳龍羲 (號)友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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