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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섭(吳其燮, 1903~?) 吳琪燮 吳逸 李龍俊] ()

(조공 당원) 함남 홍원에서 태어나 1916년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했다. 3 ․ 1운동 당시 평양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다. 1920년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으나 재학중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했다. 1923년 10월 홍원에서 농민운동에 참가했다. 1924년 12월 사회주의 시장단체 이럿타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같은 달 홍원에서 화물운반 노동자들의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한때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5년 4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에 참여하고, 일본경찰의 대회금지 결정에 항의하는 적기(赤鎭)시위에 참여했다. 7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고, 홍원야체이까에 배속되어 연구반과 독서회를 조직했다. 같은 달 『동아일보』 홍원지국 주최 웅변대회에서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악정책과 중국 동맹파업에 대하여’란 제목의 웅변을 하여 함흥지법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8월 홍원청년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10월 홍원청년연맹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고려공청 함남도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5월 이럿타회의 후신인 좌진회(左進會)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해 정우회(正友會) 회원, 함남사회운동자동맹 집행위원을 역임했다. 8월 ‘제2차 조공 검거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했다.
(노동당 중앙위원) 출옥 후 홍원에서 노동조합운동에 참여했다. 1929년 초 원산총파업이 일어나자 총파업 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4월 일본경찰의 수배를 피하여 소련으로 망명, 9월에 블라지보스또끄, 하바로프스끄를 거쳐 모스끄바에 도착했다. 코민테른 동양부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을 청원하여 10월경 공산대학 예과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1932년 3월 입국하여 정태옥(鄭泰玉), 강목구(姜穆求)와 함께 고려공청을 조직했다. 9월 부산에서 환대(丸大)고무공장 직공을 중심으로 공청 재건활동을 하다가 경남도 경찰부에 체포되어 1935년 10월 함흥지법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수감중 옥중투쟁에 다섯 차례 참가했다. 해방 직후 함남에서 조공, 인민위원
회 조직활동을 지도했고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그해 『토지개혁법령의 정당성』(북조선농민연맹)을 발간했다.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노동국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조선 현단계의 계급분석」, 「북조선의 의료휴업사업」 등을 집필하여 『인민』에 게재했다. 1948년 3월 북조선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56년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57년 9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황해북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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