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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단정(單政) 수립] ()

(1) 일제식민통치의 안티테제가 민족통일국가수립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38도선 이남에 반공의 보루를 구축하려 했던 미군정, 미군정 정책 자체를 선도하였던 이승만의 독립촉성회 그룹이나 한민당 세력 역시 이 역사적 명제에 적어도 레토릭에 있어서만은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의 사태는 이 민족이 열망하였던 방향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시를 몸으로 살았던 사람에게나, 또 오늘날 그 역사적 중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동 시대 사람에게 있어서나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단국가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분단국가의 수립은 우리 역사발전의 자연스런 귀결이거나 민족적 열망에 부응하는 것일 수 없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전후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소간 권력투쟁의 소산으로서 지극히 비역사적이고, 생경하고, 외생적이고 인위적인 정치적 구조물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작위적이고 외부로부터 씌워진 구조물이 아무런 대가를 민족에게 부과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 뿌리내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의 직접적인 결과가 6 · 25 동족상잔의 참극이고, 오늘날 우리는 그 역사적 중압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47년 8월 8, 9일 2차 미·소공위가 공위의 협의대상 단체의 조건문제를 둘러싸고 결렬된 시점에서부터 그로부터 1년 뒤 38도선 이남에서는 8월 15일 서울에서, 이북에서는 9월 9일 평양에서 각각 서로가 적대하는 두 개의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될 때까지의 역사적 의미는 자명하다.
물론 여기에서 공위의 결렬이 곧 분단국가의 제도화로 연결되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분단국가의 형성조건은 논자에 따라 그 시점이나 계기가 다를 수 있다. 2차 공위의 결렬 훨씬 이전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분단의 결정적 계기가 미군정이 남한에 반공적인 정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구체적인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한 1945년 말 어느 시점이거나, 찬·반탁투쟁의 격화와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1946년 5월의 어느 시점이거나, 우파단정세력이 미군정의 지원 하에 중앙과 지방수준에서 초기의 좌파 헤게모니를 뒤집을 만큼 세력을 확장해 나갔던 1차 공위의 결렬과 1947년 5월 2차 공위의 재개 사이의 어느 시점이기보다는, 1945년 후반부터 1947년 2차 공위가 결렬될 때까지 제요인들의 인과관계가 누적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 · 국지적 수준에서의 미소관계, 현지의 미군정과 남한 내 정치세력 간의 상호관계, 좌우익 정치세력간의 관계의 동태적인 상호작용의 앙상블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어쨌든 2차 미소공위의 결렬은 협상 · 타협 · 합의를 통하여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려 한 시도의 종결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반도에 하나의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기로 한 1945년 12월 26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문제는 그 내용이 신탁통치의 방법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남북에 각각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가 수립되느냐 하는 방법의 문제였다. 그것은 미소의 직접적인 협상과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미국 헤게모니 아래 있는 유엔이라는 새로운 국제기구를 매개로 하여 미군정 통치권이 작용하는 남한에서만이라도 반공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9월 23일 미국에 의해 한국문제가 유엔총회에 상정되었을 때, 소련이 이에 반대하고 나섰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엔총회는 11월 한국에서의 총선거를 감시할 임시위원단설치안을 가결하였다. 여기에서 어떠한 힘이 미국의 이러한 정책전환을 가져오게 했고, 그 결과로서 국내의 정치세력에는 어떠한 대립양상의 변화가 나타났는가를 보도록 한다.
당시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적 수준에서 소련과 대결하고 있었던 미국의 정책은 소련에 대항하여 그들의 영향력과 이익을 최대한 유지하고 확대해야 한다는 정책목표와 이를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제한된 수단 사이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상의 정책대안들을 선택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와 터키가 공산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의 지배하에 놓이지 않도록 하는 정책의 천명이며, 동시에 냉전의 구체적 표명으로 이해되는 1947년 3월 「트루먼독트린」만 하더라도 한반도가 소련의 직접적인 영향권 하에 놓이지 않는 범위에서 미국이 한반도문제를 조속히 ‘체면을 손상하지 않고’ 해결해야 할 압력요인으로 작용한 바 있었다. 공화당 다수파가 지배하는 80차 美의회는 경제안정과 균형예산에 강조점을 두면서 보다 적극적인 대(對)소 우위 확보를 추구하는, 국무성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행정부에 맞서게 되었다. 국방성과 군사전략가들 역시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하면서 대한(對韓) 원조삭감안을 가결시킨 의회와 보조를 맞추어 4만 명의 미군을 유지해야 하는 미군정의 조기철수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키기 시작했다. 미국정부가 2차 공위의 재개를 서둘렀던 것도 이러한 정황 하에서였다.
(2) 2차공위가 결렬되었을 때 미국무성 관리들은 그들의 헤게모니 하에 있는 유엔이라는 기구를 통하여 한반도 전체가 아니라면 38도선 이남에 친미적인 반공국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특정 의제가 강대국 간의 합의에 이르지 못할 때 총회의 의결사항으로 할 수도 있다는 헌장 107조는 한국문제가 총회의 의결사항이 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총회에서 압도적인 다수표를 획득할 수 있었던 반면 소련은 동구의 위성국가들 표만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은 인구비례에 의해 선출될 국회를 구성(남한에 한국인구의 3분의 2가 거주하고 있었다)할 목적으로 한국 전역을 감시여행할 수 있는 한국유엔임시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다. 미국은 이 임시위원단이 보다 객관적이며 정당성을 갖는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서방세계 및 동구권 중립국가가 골고루 대표될 수 있도록 인도를 의장국으로 하여 프랑스 · 캐나다 · 오스트리아 · 엘살바도르 · 시리아 · 중국 · 필리핀 · 우크라이나(참여 거부) 대표로 구성되도록 하였다.
공위가 결렬되었을 때 중국의 공산군은 장개석 군(軍)에 대하여 군사적 우위를 확립하게 되었고, 중국에서 조성되고 있는 힘의 불균형은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대륙이 곧 공산치하에 놓일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케 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미국에게 있어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이 증대되었음은 물론이다. 남한의 수호가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의 목표가 될 수 있었다. 결과는 남한에서 미군의 철수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철수정책의 추진은 미군정으로 하여금 빠른 시간 내에 군정철수 이후 남한을 독자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통치세력과 통치체제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이것은 곧 통치 체제를 주도한 이승만一한민당세력을 보다 강화하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을 제거하거나 치명적으로 약화시켜 정치질서를 확립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정치질서의 구축은 두 방향에서의 저항을 극복해야만 하였다. 하나는 당시 일반국민의 최대의 여망이 민족통일정부의 수립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단정수립과 이를 추진하는 세력의 정당성의 기반이 매우 약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정책의 추진은 일반국민과, 단정세력을 제외한 민족주의세력의 저항에 부딪치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합법적 지하운동으로 전환한 민주주의민족전선一남로당세력의 보다 적극적인 도전을 극복해야 하는 문제였다. 미군정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실제로 취하였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 세력, 특히 후자에 대한 〈강경정책〉이었던 것이다. 당시 군정의 강경정책에 따른 치안유지 기능을 중추적으로 수행하였던 경찰병력은 1946년 7월, 2만 5천명이었던 것이 정부수립시에는 3만 4천명으로 증가하였다. 1947년 7월 중반 2만 2천명의 투옥자 수는 일제말의 두 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2차 공위의 결렬은 좌파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총공세를 억제시켜 왔던 마지막 저해요인이 제거되었음을 뜻한다. 동시에 그것은 공위협상과정에서 우익세력의 증대의 필요성 때문에 나타났던 무수한 유사 · 유령단체의 출현을 포함한 정치 및 사회단체의 극심한 팽창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들었다. 8월 11일 수도권에서 민전(民戰) 산하 각 정당 · 사회단체 및 언론인에 대한 전면적 검거로부터 시작된 좌익에 대한 총공세는 단정수립을 위한 기반 조성이 그 마지막 국면에 이르렀음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3) 이제 기본적 정치문제는 찬·반탁 투쟁으로부터 어떻게 남한에 분단국가를 수립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옮겨졌다. 찬탁이냐 반탁이냐의 이슈로 대립하였던 정치 및 사회단체들은 단정수립이냐, 단정수립에 반대하느냐의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한 번 세력의 재편성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단정수립의 반대세력은 군정당국과 경찰력에 의한 탄압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에게는 좌익 및 좌익용의자를 체포 · 구금할 수 있는 백지 위임장이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무제한의 권한이 주어졌다. 이와 병행하여 그 기능은 서북청년단 · 조선민족청년단 · 전국학생총연맹 · 독촉청년연맹 · 대한청년단, 그리고 이들의 통합단체로서 대동청년단과 같은 사병적(私兵的) 청년단체들에 의해 보조적으로 수행되었다.
또한 1948년 4월 미군정은 좌익에 의해 주도되던 총선 방해공작에 대항할 목적으로 성년남자로 구성된 향보단(鄉保團)을 조직하여 경찰기능을 보조하도록 하였다. 1947년 말 경찰이 공식적으로 집계한 치안통계에 따르면 서울권 내 경찰에서 공식적으로 취급한 치안사건만도 1만 6천 건에 이르러 전년의 두 배 이상으로 격증하였다. 체포 · 고문 · 암살 · 테러 · 폭동 · 봉기 · 방화 · 스트라이크 등 내전에 가까운 상태가 전개되었다. 반체제세력으로서의 남로당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활동과 남한만의 선거 실시를 방해할 목적으로 안정과 질서를 교란하고 파괴하는 데 그 활동을 집중하였던 것이다. 제주도민을 해방 후 한국에서 최대의 집단적 희생자로 만들었던 1948년의 이른바 제주도 4 · 3 사건은 여전히 그 진상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이러한 소요사태 가운데서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엄청난 인명피해를 낸 이 사건은 남로당으로 하여금 대중봉기로부터 유격전으로 전술이행을 촉진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남한만의 단정수립에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미군정―UN 한국임시위원단一이승만一한민당의 연합이 강화된 가운데서 좌우합작에 참여하였던 중간파 세력과 임시정부계열 민족주의 세력의 위치와 역할은 과연 어떤 것일 수 있었는가? 좌우합작을 주도하였던 김규식과 같은 인사들은 유엔으로 이관된 한국문제가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의한 분단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중간파 통일전선으로서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고 이에 대응하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김구의 태도는 그때까지도 매우 모호하였다. 김구가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의사를 최초로 분명히 밝혔던 것은 그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에 출두하여 미·소 양 주둔군을 한반도에서 동시에 철수하고 남북협상과 남북한 자유선거의 실시를 주장하였던 1월말이었다. 그것은 1947년 11월 중순 남한만의 선거를 주장하였던 이승만의 담화발표와 그에 따라 단정지도 그룹들이 남한만의 총선거를 모색하였던 이후에 1월 22일 유엔소련대표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38선 월경을 거부함으로써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이 최종적으로 확인된 이후에 표명되었다.
김구의 태도 표명은 귀국 이후 이승만과의 불편한 제휴관계를 청산하고 김규식과의 협조를 뜻하는 것이었다. 유엔감시 하의 남한만의 선거냐, 아니면 남북협상과 남북한총선거냐 하는 새로운 대립축이 형성되게 되었다. 단정을 지지하는 이승만과 한민당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좌우합작에 참여하였던 중도파와 김구의 세력을 다른 한편으로 한 연합이 그것이다. 그러나 반단정(反單政) 연합이 취할 수 있던 것은 극히 소극적 방법 밖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상징직인 의미밖에는 가질 수 없었던 김구 · 김규식 일행의 북행을 포함하는 남북협상노력과 유엔감시 하의 제헌국회를 구성하는 5 · 10 총선거에 대한 소극적 참여 또는 반대가 그것이다. 이는 군정당국과 단정세력의 강력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남북정당선거단체협의회 명의의 이른바 4 · 30 공동성명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反단정세력의 적극적인 저지에도 불구하고 유엔감시 하의 5 · 10 총선거는 마침내 실현을 보게 되었다.
5월 10일 역사적인 총선거는 김구 · 김규식을 포함한 남북협상파와 좌익세력이 불참하고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던 제주도가 제외된 가운데 선거를 방해, 반대하는 소요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분위기에서 실시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조차 선거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하에서 실시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하기를 유보할 정도로 선거는 준내란적 상황 속에서 시행되었다.
30여명의 위원단이 전국의 선거를 감시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승만은 정부가 “스트라이크 · 폭동 · 공격 등의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을 허용하였으니 사실상 자유가 너무 많았다”고 위원단에게 말했다. 이제 5 · 10 선거는 합법적이고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었고, 이를 근거로 한반도에서의 유일 합법정부라는 논리가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5 · 10 선거는 948명의 후보자가 출마, 198명이 선출되어 약 4.7대 1의 경쟁율을 보였다. 통계상으로는 무소속이 가장 많았으나 그들의 대부분이 한민당 출신이고 보면 압도적인 다수가 한민당계와 이승만의 독촉계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구성된 국회에서 7월 20일 이승만후보는 압도적 다수로 제1공화국의 초대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8월 15일 역사적인 제1공화국 선포식을 갖게 되었다.
5 · 10 선거를 저지하려던 총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남한에서 월북한 남로당과 북한의 북로당이 공동주관한 이른바 〈지하선거〉를 실시하고, 8월 22일에서 24일에 걸쳐 38도선 바로 북쪽에 있는 해주에서 남북한 인민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최고인민회의에 참여할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남로당측 주장에 따르면 이 지하선거에서 남한 전체 유권자의 77.52%가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명목상으로 남북한 대의원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되었다.
당시를 몸으로 살았던 그들은 분단국가의 수립을 받아들이기에는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과 그 정부 하에서의 사회개혁의 열망이 너무나 강렬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2차 공위의 결렬은 단정수립 세력과 이를 반대하는 세력간의 사실상의 내전의 시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내전은 남한과 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끝내는 남북이 정면으로 대결, 국제전으로 확대된 6 · 25로 발전하기에 이른 것이다. / 崔章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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