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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praxis)

실천 praxis

일반적으로 실천은 행위나 활동을 나타낸다.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실천은 인간이 스스로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세계와 자기 자신을 창조(제작, 생산)하고 또 변화(형성)시키도록 하는 자유롭고, 보편적이며 또한 창조적이고 자기 창조적이기도 한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으로 다른 모든 존재와 스스로를 구별되게 하는 인간 특유의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인간은 실천적 존재로, ꡐ실천ꡑ은 마르크스주의의 중심개념으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는 ꡐ실천ꡑ의 ꡐ철학ꡑ(이라기보다는 사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실천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서, 로브코비츠에 따르면, ꡐ자유로운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행위, 특히 모든 정치적 및 경제적 행위들ꡑ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를 거쳐 오늘날과 같은 현대 유럽어로 변천돼 왔다. 철학에 도입되기 이전에 이 용어는 그리스 신화에서, 알 수 없는 어떤 여신의 이름이나 또는 다른 여러 가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현대 작가 페이 헬던은 실천을 소설(1978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사용했는데, 여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ꡐ실천은 전환점, 절정, 행위를 말하기도 하고 성적 흥분이나, 어떤 경우에는 여신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ꡑ 초기 그리스 철학에서 특히 플라톤이 이 용어를 사용했으나, 이 개념의 참다운 철학적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개념에 보다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가 때때로 이 개념을 동물의 생존 활동이나 심지어는 별들의 운행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 개념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쓰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비록 그가 이 개념을 종종 모든 인간 활동을 명명하는 데에 사용하기도 했지만, 역시 그는 실천을 인간의 세 가지 기본 활동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나머지 둘은 theoria(이론)와 poiesis(시)이다). 이러한 주장은 그들의 목표나 목적에 따라-이론적, 실천적, 그리고 시적으로-분류되는 인식의 세 가지 기초에 따른, 과학 및 인식 분과에 대한 맥락으로 이어진다. 이론적 인식에 있어서 그 목적은 진리이며, 시적인 인식의 목적은 어떤 것의 창조이고 실천적인 인식에 있어서의 목적은 활동 그 자체이다. 실천적 인식은 다시 경제적, 윤리적 정치적인 것으로 나뉜다. 실천을 이론이나 시와 대비시키고 그것을 다시 경제, 도덕, 정치적인 것으로 3등분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개념을 어느 정도 확정시킨 듯이 보이지만, 그는 결코 그러한 개념에 그대로 집착하지는 않았다. 때때로 그는 실천과 이론의 관계를 인간에게 있어 근본적인 대립으로서 논의한 반면, 시는 실천에 포함시키거나 또는 주변적인 것으로 무시하기도 한다. 한편 종종 그는 실천을 윤리학과 정치학(경제학은 제외하고)의 영역에, 또는 정치학에만(이 경우에 윤리학은 정치학에 포함된다) 국한시키기도 한다. 더욱이 그는 어떤 경우에는 dyspraxia(bad praxis, misfortune-그릇된 실천, 불운)과 대비하여 eupraxia(good praxis)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복합성을 혼란의 상징으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것은 문제의 복잡성에 심오한 이해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서 인간의 행위를 두 가지로 분리하는가, 아니면 세 가지로 분리하는가 라는 문제는 결국 이론과 실천의 두 부분으로 분류되는 쪽으로 결정되었고, 이러한 이분법은 중세 스콜라 철학에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응용과학과 의학이나 항해술 같은 기술들(이것들은 이론과학이나 실천과학 어느 쪽에도 부합되지 않는 것 같다)을 분류하는 데 있어서의 난점은 Hugh of St Victor로 하여금 세 번째 요소로서 (이론과 실천에 부가하여) mecanica를 제안했으나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한편 《실천기하학》이라는 작은 논문에서 그는 ꡐ이론ꡑ기하학과 ꡐ실천ꡑ기하학을 구분하여 ꡐ실천ꡑ을 응용이라는 뜻을 h사용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러한 제안은 곧 널리 받아들여졌으며, ꡐ이론의 응용ꡑ으로서의 ꡐ실천ꡑ이라는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사용돼오고 있다. 베이컨은 이러한 관점에서 실천이라는 개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으며, 동시에 참된 지식은 실천에서 결실을 맺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이컨의 견해에 동의했건 안했건 간에, 베이컨에서 칸트에 이르는 시기의 많은 철학자들은 삶에 유용한 지식으로서 유사한 실천적 지식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백과전서》 서문에서 달랑베르는 모든 인식을 세 종류로 나누었다. 즉 ꡐ순수하게 실천적인 것ꡑ, ꡐ순수하게 이론적인 것', 그리고 '대상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로부터 실천에 유용한 것을 얻기 위해' 시도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실천적인 지식이 인간 행위의 원칙에 대한 지식(특히 윤리적인 지식과 정치적인 지식)과 무관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다른 많은 사상가들에게서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로크는 모든 지식과 과학을 fysike, praktike, semeiotike로 3등분했는데, 그는 praktike를 우리들 자신의 힘과 활동을 ꡑ선하고 유용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올바르게 사용하는 기술ꡐ이라고 정의했고,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학이다'라고 덧붙였다(1690, 2권 p461)
칸트는 이러한 두 개의 전통적인 개념을 변형시켰다. 첫째는 이론의 적용으로서의 실천인데, 여기서 적용은 경험에서 부딪히게 되는 사례에 대한 적용을 의미한다. 둘째는 윤리적으로 타당한 인간 행위로서의 실천이다. 첫 번째 관점은 ꡐ말하자면 ꡒ이것은 이론적으로는 옳을 수 있으나, 실천에 있어서는 선하지 않을 수 있다ꡓꡑ라는 그의 논문에서 명확해진다. 칸트에게 있어 더욱 중요한 두 번째의 개념은 이성을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으로 나누고, 그것에 따라 철학을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나누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순수이성비판》에서 ꡐ내가 존재하는 것ꡑ을 알 수 있게 되는 ꡐ이론적 인식ꡑ과 ꡐ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ꡑ을 구상할 수 있게 하는 ꡐ실천적 인식ꡑ을 구분한다. 칸트 자신이 지식은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것이기 보다는 그것에 대비되는 실천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실천이라는 이 개념을 더욱 정교하게 하였다. ꡐ(1)실천적인 인식은 명령적이므로 이론적 인식과는 상반되고, (2)그들은 가능한 명령을 위한 이성을 지니므로 사변적인 지식에 상대적이다ꡑ(1800, p96), 반면 칸트는 인식을 이론적(또는 사변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분리함에도 불구하고, ꡐ마지막 분석과정에 있어 이론은 단 하나이거나 동일한 것ꡑ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의 통일은 실천적 이성(혹은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이론적 이성(혹은 사변적 이성)의 우위에 놓음으로써 획득된다. ꡐ모든 것은 실천적인 것이 되며ꡑ, ꡐ도덕성ꡑ은 ꡐ절대적으로 실천적인 것ꡑ이다. 철학을 이론적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나눈 칸트의 견해는 약간 변형되고 보완되어 피히테에게서 재현된다. 피히테는 칸트보다도 더 강력하게 실천 철학의 우위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셸링은 ꡐ이론적인 것도, 실천적인 아니면서, 또한 이 들 모두에 해당되는 보다 고차원적인ꡑ 제 3의 요소를 찾으려 했다.
헤겔은 셸링과 같이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의 분리를 받아들였고 실천적인 것을 이론적인 것의 우위에 두었으며, 그것들의 통일은 제 3의 보다 높은 오소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 철학의 근본적인 결점 중의 하나는 ꡐ절대적인 형식의 요소들ꡑ이 체계와 동떨어진 부분으로서 외화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헤겔은 철학을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을 거부하였고, 이와 상이한 원칙에 따라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세 분야로 나누어진 그의 체계에서는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의 구분이 각기 세 부분마다에서 (그리고 되풀이해서 더 높은 합(合)으로 초월되면서) 재현되었다. 따라서 이론적 인식과 실천적 인식 사이의 구분은 순수 사유(논리학)와 자연(특히 유기체적 생명), 인간현실(ꡐ유한 정신ꡑ)의 세 영역에 동일하게 자리 잡는다. 논리학에 있어서의 정교화 된 분류는 자연에 있어서는 불완전하게 이루지지만 인간에게는 적합하다. 인간에게 적용시켜보면 인간은 주관적이고 개별적 존재인 한, 이론과 실천은 유한한 정신의 두 요소이다. 개별자의 실천은 이론보다 더 고차원적인 것이지만 어느 것도 ꡐ진실ꡑ은 아니다. 이론과 실천의 진리는 자유로서, 이 자유는 개별적인 차원에서 얻어질 수 없고, 오로지 사회적 삶이나 사회적 제도의 차원, 즉 ꡐ객관적 정신ꡑ의 영역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 종교, 철학을 통한 ꡐ절대 정신ꡑ의 영역에서만 올바르게 인식되고 완성될 수 있다.
헤겔의 체계에서 실천은 절대 진리의 한 요소가 되지만, 이와 동시에 실천은 독립성을 상실한다. 절대적 진리의 이러한 요소가 체계 밖으로부터 주어졌고, 그 요소는 체계에 대항한다고 주장했던 최초의 헤겔주의자는 씨에스코브스키[Cieskowski](1838)였다. 그러한 헤겔의 체계를 절대적 진리의 체계라고 규정지었지만, 그는 이러한 진리는 ꡐ실천ꡑ과 ꡐ행위ꡑ를 통하여 실현돼야만 한도고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이 책을 읽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의 친구인 모제스 헤쓰[Moses Hess]는 이 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유럽의 삼두(三頭)체제》(1842)와 《행동의 철학》(1842)에서 헤쓰는 실천의 철학을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ꡐ정신철학의 목적은 이제 행동철학으로 되는 데 있다.ꡑ 마르크스에게 있어 실천의 개념은 철학으로 남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반(反)철학적 사유와 세계의 혁명적 변화에서와 같이 철학 그 자체를 지양하고자 하는 새로운 철학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생각을 《경제학 및 철학 수고》에서 아주 정교하게 다듬고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그의 초기 저작에서 예견되었던 바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ꡐ데모크리토스의 자연철학과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ꡑ 4장 1절)에서 그는 철학이 실천적이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ꡐ본래 자유로워질 수 있는 이론적 정신이 실천적인 힘으로 전환되면서, 또한 의지가 그 외부에 존재하는 현존하는 실제에 대항하여 Amenthes의 어두운 세계로부터 나타나는 것은 심리학적 법칙이다ꡑ.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독불 연보》1844)에서도 그는 실천은 진정한 철학의(즉 사변철학의 비판의) 목표이고 혁명은 진정한 실천(원칙에 비해 탁월한 실천)이라고 강조한다. 《경제학 및 철학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인간을 ꡐ긍정적ꡑ이며 ꡐ부정적ꡑ인 형태를 띠고 자유로이 창조하는 실천적 존재라고 보는 그의 관점을 더욱 정교히 하였는데, 이때 소극적 형식의 실천은 인간의 자기 소외에 대한 비판으로 성립된다. 적극적 형태의 실천에 관하여 마르크스는 ꡐ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은 긴아ㅢ 종(種)적 특성이며ꡑ, ꡐ객관적 세계에 대한 실천적 구성은 의식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확인이다ꡑ라고 말한다(《소외된 노동》1장). 이 맥락에서 인간의 실천적 산물로 지적된 것은 인간의 생산물을 동물의 생산물과 비교함으로써 설명되었다. 동물들은 오로지 한 가지 방향으로만 생산하지만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한다. 동물은 직접적인 육체적 필요의 강박 하에 생산하지만 인간은 육체적 필요로부터 자유로울 때, 즉 그러한 필요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 진정으로 생산한다. 동물은 오직 그 자신을 생산할 뿐이지만, 인간은 자연의 전체를 재생산한다. 동물의 생산에서 얻어진 결과는 그들의 육체에 직접적으로 속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서도 자유롭다. 돌물들은 그들 자신이 속한 종의 기준과 이것의 필요에 따라 구성하지만, 인간은 모든 종의 기준에 따라 어떻게 생산해야 하며 또한 대상에 대해 적절한 기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다. 인간은 또한 미(美)의 법칙과 융화를 이루면서 구성한다(앞의 책). 《경제학 및 철학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이론도 마땅히 실천의 한 양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실천과 이론 사이의 대립을 재차 확인하면서 이 관계 속에서의 실천의 우위성을 강조한다. ꡐ이론적인 모순의 해결은 오로지 실천적 방법으로만, 즉 인간의 실천적 에네르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ꡑ(앞의 책, 셋째 논문, ꡐ사적 소유와 공산주의ꡑ).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는 실천의 개념, 또는 ꡐ혁명적 실천ꡑ의 개념이 종심을 이룬다. 마르크스는 ꡐ환경의 변화와 인간 행위의 변화 및 자기 변화의 일치는 오로지 혁명적 실천으로써만 인지되고 이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ꡑ(세번째 테제)고 말하면서 동시에 ꡐ모든 사회적 생활은 근본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인도하는 모든 수수깨끼들은 긴의 실천과 그리고 이러한 실천에 대한 이해에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ꡑ(8번째 테제)고 덧붙인다. ≪경제학 및 철학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노동’을 ‘실천’에 대비시키고 ‘노동’을 ‘실천적 인간활동의 소외적 행위’라고 명백히 기술하지만, 그는 종종 ‘노동’과 ‘실천’을 동일하게 사용하는 모순을 보이기도 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노동’과 그가 예전에 실천이라고 불렀던 것 사이의 대립을 강력히 주장하고, 모든 노동은 인간의 생산활동의 자기 소외된 형식이므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인간활동의 소외되지 않은 형식은 전에는 실천이라고 불리었으나 이제는 ’자기행위‘라고 불리게 되지만, 그러나 개념상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기본사상은 동일하다. 즉 ’노동을 자기행위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요강≫과 ≪자본론≫에서도 역시 동일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마르크스의 실천적 개념은 오랫동안 잊혀지거나 잘못 해석되어 왔다. 이 잘못된 해석은 엥겔스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즉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장례식에서 행한 그의 연설에서 마르크스가 두 개의 중요한 개념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사적 유물론이고 하나는 잉여가치론이다. 이 말은 마르크스가 철학자가 아니라 과학적 역사이론가이며 정치경제학자라는 보편적 견해의 시발점이 되었다. 다만 실천에 관한 하나의 테제, 즉 실천만이 믿을 수 있는 지식의 근거이며, 궁극적 진리의 기준이라는 주장은 널리 퍼져서 일반화되었다(이것도 또한 엥겔스 덕분에). 엥겔스는 이 테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ꡐ논쟁이 있기 전에 행위가 있었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Im Anfang war die Tat)…푸딩의 증거는 먹는 데에 있다ꡑ(《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영국판 서문). ꡐ모든 철학적 단편들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회의주의와 불가지론에 대한비판은 실천, 즉 실험과 산업이다.ꡑ(《포이에르바하론》3절) 원전의 문맥은 매우 중요하다. 왜하면 그것은 널리 퍼진, 실험과 산업으로서의 실천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불가지론에 대항하는 궁극적 논점으로서, 그리고 또 진리의 궁극적 기준으로서의 실천론을 플레하노프와 레닌에 의해 고수되고 정교화되었다. ꡐ삶, 또는 실천이라는 관점은 인식론의 가장 우선적이고 근본적인 관점이다ꡑ(1909)라고 하면서도 레닌은, ꡐ실천의 기준이 실제로는 한 인간의 관점을 완전히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ꡑ(앞의 책)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를 보다 융통성 있는 방식을 고수하려 했다. 플레하노프와 레닌은 또한 마르크스의 역사적, 경제적 이론은 하나의 토대로서 낡은 철학 유물론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필요로 한다는 엥겔스의 주장에 동의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최종적으로 스탈린에 의해 신성화된(1938) 변증법적 유물론을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이 유명한 원에서 스탈린은 실천과 푸딩에 관한 엥겔스의 유명한 견해를 인용하고, 인식론의 기준과 근거로서의 실천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실천에 대한 이론의 중요성을 보여주려 하였고 더욱이 ꡐ프롤레타리아당의 실천적 활동ꡑ에 대한 변증법적 및 사적 유물론의 기본 교의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모택동 또한 실천에 관해 여러 번의 언급하고 있으며, 그의 논문 ꡐ실천론ꡑ(1937)에서 레닌의 말(한번은 스탈린의 말)인용하여 ꡐ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통일성ꡑ과 진리의 기준으로서의 실천을 정리하려했다(《모택동 선집》Ⅰ권 pp. 259~309).
라브리올라는 마르크스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 고무되어 마르크스주의를 ꡐ실천 철학ꡑ으로 해석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그 이름을 붙인 최초의 인물이었다. 라브리올라를 본보기로 하여(젠틱과 그리고 특히 크로체의 마르크스 비판에 의해 도전을 받았던)그람시 또한 마르크스주의를 ꡐ실천 철학ꡑ으로 불렀으며 그것을 마르크스의 정신에 따라서, 그리고 때로는 심지어 마르크스에 상반되는 방향으로 (예를 들어서, 그가 10월 혁명을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거스르는, 즉 마르크스 철학의 결정론적 요소들과 반대되는 혁명이라고 한 것과 같이) 정교화 시켰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조건 하에서 쓰여져 실천 철학의 정교화 작업은 쉽지 않았고 종종 일관성을 상실하기도 했다(실험과 산업이라는 엥겔스의 실천관으로 돌아가는 등). 초기에 등장한 실천 철학은 엥겔스의 실천 개념을 통렬히 비판한 루카치의 연구로부터 강한 자극을 받았다. 여기서 엥겔스가 저지른 가장 큰 오류는 산업 행위와 과학적 실험이 변증법 내지 철학적 실천을 구성한다는 그의 신념에 있다. 그러나 사실은 ꡐ과학적 실험은 가장 순수한 명상이다ꡑ(Lukacs 1923). 루카치 자신에 의하면 실천 개념은 그의 저서의 중심 문제와 관련된다. 그러나 실천 개념에 대한 그의 산재하는 논평들은 엥겔스의 해석에 대한 그의 비판적 논쟁보다 명쾌하지 못하다. 모든 경우에 있어 실천에 대한 루카치의 설명은, 비록 그가 이후의 자기비판에서 혁명적 실천에 대한 자신의 개념이 ꡐ정통 마르크스 이론보다는 구세주적?유토피아적 공산주의 이론에서 준수되고 있다ꡑ고 말했을지라도 더욱 전향(前向)적인 논의를 위한 큰 자극제가 되었다(앞의 책,1971년 판 서문).
1920년대 저작에서 코르쉬 역시 마르크스주의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원칙을, 보다 엄밀하게는, 불가분으로 관련된 행위로서 인식되는 ꡐ이론적 비판주의ꡑ와 ꡐ실천적인 혁명적 변화ꡑ와의 통일을 근거로 하는 ꡐ사회 혁명의 이론ꡑ(1923)이제 ꡐ혁명적 철학ꡑ이라고 논하였다. 그러나 루카치와는 달리 그는 당시 유행하는 ꡐ실천ꡑ에 대한 해석에 만족했으며 ꡐ푸딩을 먹는 것ꡑ으로서의 엥겔스의 실천 개념에 동의하여 인용하였다.
실천 개념은 또한, 1920년대 후기(당시에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의해 콘 영향을 받았다)와 1930년대 초반(이 때에는 마르크스의 《경제학 및 철학 수고》의 출판에 자극을 받았다)의 시기에 마르쿠제에 의해 독자적으로 다듬어졌다.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주의는 자기 충족적인 과학 이론이 아니라, ꡐ사회적 활동과 역사적 행위ꡑ에 대한, 좀 더 구체적으로 ꡐ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혁명적 비판ꡑ에 대한 이론이라고 주장하였다. ꡐ급진적 행위ꡑ와 ꡐ혁명적 실천ꡑ을 동일시하면서 마르쿠제는 실천-혁명적 실천- 및 역사적 필연의 관계에 대하여 논하였다. 실천 개념과 그것의 ꡐ노동ꡑ과의 관계에 대한 더 다듬어진 논의는 실천에 대한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중의 하나로 남아 있는 그의 후기 논문(1933)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마르쿠제는 ꡐ실천ꡑ과 행위를 동일시하고 ꡐ노동ꡑ을 실천의 특수한 양식으로 취급한다. 노동은 단순한 실천만이 아니라 (놀이 역시 실천이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절박한 생존을 영위할 수 있는 행위로서, 결국 필연적인 ꡐ인간의 생존을 위한 실천이 요구하는ꡑ 선택된 양식이다. ꡐ모든 인간의 행위가 노동은 아니다ꡑ라는 관점을 가다듬으면서 마르쿠제는 ꡐ필연의 영역ꡑ (물적 생산과 재생산)과 ꡐ자유의 영역ꡑ으로 나눈 마르크스의 구분을 상기시켰다. 여기서 마르쿠제는 ꡐ필연의 영역을 초원하여ꡑ 인간은 실천적 존재이지만, 실천은 필연의 영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유의 영역ꡐ에 있다고 주장한다. 실천은 존재의 형식과 그 풍부함의 실현이고, 또한 실천은 그 궁극적인 목적을 갖고 있거나 혹은 그 목적 속에서 끝난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유고슬라비아의 많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이 스탈린적인 오류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해방시켜 마르크스의 전통 사상을 부활시키고 발전시키려 했다. 또한 그들은 실천 개념을 마르크스 사상의 중심 개념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해석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인간을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자기 창조적인, 그러한 실천을 하는 존재로서 보았다. 특히 그들 중 몇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ꡐ실천ꡑ, ꡐ시ꡑ 및 ꡐ이론ꡑ의 의미로서 ꡐ실천ꡑ의 개념을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든 ꡐ실천ꡑ, ꡐ시ꡑ, ꡐ이론ꡑ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세 영역 중 ꡐ선한ꡑ 실천만이 해당된다. 선한 실천과 악한 실천 간의 구분은 윤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이며 인간학적인, 더욱이 형이상학적인 혁명사상에 있어서의 구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한 실천과 악한 실천에 대하여 말하는 대신에 근거 있는 자기 소외적 실천에 대하여, 떠는 단순히 실천과 자기소외에 대하여 말하고자 했다. 그들이 1964년에 간행한 《실천》이라는 잡지의 첫 번째 문제는 실천 개념에 대한 논의였다.
최근 몇 년 간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의 저서에서 실천의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예를 들면 Lefebvre 1965 : Kosik 9163 ).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몇몇 학자들은 비록 ꡐ실천ꡑ에 관계되는 개념보다도 ꡐ이론ꡑ(더욱이 비판적 이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후기 대표자인 하버마스는 ꡐ노동ꡑ 또는 ꡐ목적에 따르는 합법적 행위ꡑ와 ꡐ상호작용ꡑ 또는 ꡐ의사소통 행위ꡑ 사이의 구분을 통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실천 개념을 정리하려 했다. 전자는 ꡐ경험적 인식에 근거하는 기술적 규칙에 의해, 또는 분석적 인식에 근거하는 전략에 의해 지배되는…제도적 행위나 합리적 선택, 또는 그들의 결합에 해당되고ꡑ, 후자는 ꡐ합의된 규준의 결합에 의해 지배되는…상징적 상호작용ꡑ에 해당된다.(1970, pp.91~2). 하버마스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이해한 바의 사회적 실천은 ꡐ노동ꡑ이나 ꡐ상호작용ꡑ 양자를 다 포함하지만, ꡐ사회적 실천을 하나의 계기, 즉 노동ꡑ으로 경감시키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앞의 책).
마지막으로 근년에 전개되고 있는 몇 가지 논쟁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겠다. 실천의 개념이 인간의 존재에 한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하지만, 이 개념의 적용 문제에 대해서는 상이한 의견이 있다. 어떤 사상가의 경우에는 실천을 인간의 본능이나 행위의 한 측면으로 간주하며, 따라서 실천은 몇몇 특수한 철학 분야(윤리학, 사회?정치철학, 인식론 등)에서 연구돼야 한다고 보지만, 또 다른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실천이 모든 양식의 인간 행위를 특징짓는 것이라고 논한다. 후자의 관점은(약간의 비판의식이 깔려있는) ꡐ인간학적 마르크스주의ꡑ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인정하는 사람 중의 몇몇은 독립된 행위로서 철학을 뛰어넘어 보다 일반적인 ꡐ혁명사상ꡑ을 지향하면서, 실천의 개념을 인간학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것으로서 간주한다.
두 번째 문제는 실천의 개념이 정의되거나 명확하게 될 수 있는 정도에 관한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모든 다른 개념들을 정의하는데 사용되는 것과 같은 가장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실천 그 자체를 정의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실천 개념이 매우 복합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분석되고 정의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정의는 단순히 인간이 세계와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위로 취급되는 견해로부터 자유, 창조, 보편성, 역사, 미래, 혁명… 등에 대한 개념을 도입하는, 보다 정교한 것으로 변화했다. 실천을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 행위로 본 사람들은 때때로 매우 ꡐ규범적ꡑ이고 ꡐ비실재론적ꡑ인 개념을 제안했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만약 ꡐ인간ꡑ을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만, 그리고 ꡐ실천ꡑ을 실제로 행위하는 것으로만 정의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덜 창조적이고 덜 자유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에 대응하여 자유로운 창조 행위에 대한 정의는 ꡐ기술적ꡑ이거나 ꡐ규범적ꡑ이지 않고 좀 더 본질적인 인간의 잠재력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즉, 그것은 단순히 있는 것이나 단지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천을 자유로운 창조 행위로 간주하는 사람들 중의 일부는 그것을 혁명으로까지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반하여 실천이 정치적인 행위의 양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주장한 사람들에게는 혁명은 정치적 행위의 일종으로 이해된 것도 아니며, 또한 급진적인 사회변동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 사상에 있어서 혁명은 인간과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로 이해된다. 혁명의 목적은 참된 인간 개개인과 인간사회를 창조함으로써 지가소외를 제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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