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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학파] (Frankfurt School)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독일에서 출현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기원은 마르크스주의의 구성요소,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형식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전복시키려는, 실천적 의도를 지닌 한 이론의 영역에 관한 논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의 사상을 발전시킨 중심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상적 내용을 제공했던 격변의 사건들을 이해해야만 한다. 즉 1차 대전 후 서유럽에서의 좌익 노동계급 운동의 패배, 독일의 좌익 대중정당의 개량주의와 모스크바 지배 하의 운동으로의 분열, 러시아 혁명의 스탈린주의로의 퇴보, 파시즘과 나치즘의 발흥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마르크스주의에 고무 받았던 이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게 하였으며, 사회주의는 '역사의 계획'의 불가피한 부분이라거나 혹은 '정확한' 사회적 행위는 '정확한' 당 노선의 확산을 통해서만 나온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견해가 얼마나 잘못됐고 위험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반볼세비키 급진주의 및 개방적이거나 비판적인 마르크스주의와 직접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 자본주의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모두에 적대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저서는 사회 발전을 위한 선택의 가능성을 살리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신좌파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저서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과 또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보다 정통적인 접근방법 하에서는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문제들(예를 들면 관료주의와 권위주의)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비판이론'이라는 표제 하에 언급되고 있다.(Jay 1973 ; Jacoby 1974) 그러나 비판이론은 통일성을 이루지 못했음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모든 지지자들에게 동일한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Dubiel 1978 ; Held 1980) 이 표제 하에 막연히 언급될 수 있는 사상적 전통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192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창립, 1933년 독일에서 추방당한 후 잠시동안 미국으로 옮겼다가 1950년대 초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시 설립된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 연구소의 핵심 인물로서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철학자, 사회학자, 사회심리학자), 프리드리히 폴록크(경제학자, 국가계획문제 전문가), 데오도르 아도르노(철학자, 사회학자, 음악학자), 에리히 프롬(정신분석학자, 사회심리학자), 허버트 마르쿠제(철학자), 프란쯔 노이만(법률에 특별한 식견을 가진 정치학자), 오토 키르크하이머(법률지식을 갖춘 정치학자), 레오 뢰벤탈(대중문화와 문학연구가), 헨릭크 그로스만(정치경제학자), 아르카디 굴란트(경제학자, 사회학자) 등이며, 이 연구소의 '외부 서클'의 한 성원으로는 발터 벤야민(수필가, 문학비평가)이 있다. 이 연구소의 회원들은 흔히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불려진다. 그러나 그러한 명칭은 오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연구소 성원들의 연구가 일련의 체계적인 상호 보완적 연구를 형성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뢰벤탈, 폴록크 그리고 (연구소 초창기의) 프롬을 언급하는 정도에서만 이 '학파'에 관련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개개인 사이에도 중요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비판 이론의 두 번째 분파는 철학과 사회학에서 비판 이론의 개념을 개조한 위르겐 하버마스의 최근의 연구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연구에 공헌한 사람들로서는 알브레히트 벨머(철학자), 클라우스 옵페(정치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클라우스 에더(인류학자) 등을 들 수 있다.(Wellmer 1974)
다음의 설명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탁월한 구성원들, 즉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와 같이 사회 비판 이론의 확립에 핵심적인 인물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 이론이 담고 있는 사상은 그들 연구의 많은 공통요소를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이성과 인식의 가능한 조건(칸트)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정신현상(헤겔)에 대한 고찰과 특수한 역사적 형식-자본주의, 교환과정(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의 비판개념의 확대 및 발전은 그들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모든 사회적 실천에 관한 논의에서 하나의 비판적 전망, 즉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은폐하고 정당화시키려는 현실에 대한 조직적으로 왜곡된 설명으로서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겨냥하는 전망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사회적 이해관계, 갈등, 모순이 사고에 표현되는 방식과, 그것들이 지배체제 하에서 생산 및 재생산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체제의 고찰을 통해 그들은 지배의 근원에 대한 자각을 고양시키고, 이데올로기를 약화시켜 의식과 행위에 변화를 야기시키는 데 도움을 주려고 했다.
모든 비판이론가들은 일차적으로 철학자로서의 자질을 키워왔으므로 독일의 철학적 유산에 대한 중요한 연구서들을 집필했다. 이 저작들은 분석과 조정에 집중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표는 모든 폐쇄적 사상 체계의 족쇄를 파괴하고, 비판적 연구의 발전을 방해해 왔던 전통을 약화시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전술(前述)한 네 사람 모두가 독일 관념론의 많은 관심사-예를 들면 이성과 진리와 미의 본질-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칸트나 헤겔이 이해했던 방식을 재구성하였다. 그들은 마르크스를 추종하여 자신들이 철학과 사회에 접근하는 방법의 중심에 역사적 위치를 두었다.(예를 들면 Marcuse 1941) 그러나 그들 각자가 모든 인식은 역사적으로 규정된다는 점을 주장했지만, 진리의 주장이 특수한 사회적 이익(예를 들면 계급 이익)과 무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가 달랐다. 그들은 비판의 자율적 계기의 가능성을 옹호했다.(Horkheimer 1968 ; Adorno 1966)
비판이론가의 많은 연구는 과거와 동시대의 중요한 철학자와 사회사상가들과의 일련의 비판적 대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중요한 인물들은 다른 사람들, 특히 칸트, 헤겔, 마르크스, 베버, 루카치, 프로이드의 연구를 부분적으로 연결하여 이들을 종합하려고 노력했다. 하버마스에게는 영·미의 사상 전통, 특히 언어철학과 최근의 과학철학이 중요하였다. 이러한 연구계획의 동기는 다른 이론가들에게도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여러 학문 상호간의 연구 내용에서 사회의 재생산과 변형, 문화의 의미, 개인과 사회와 자연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관련된 문제의 탐구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스탈린주의 하에서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되었다는 것,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원리가 반드시 진리에의 열쇠를 제공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비판 이론의 중요한 한 전제를 구성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개념이 일련의 현상(특히 그 가운데서도 스탈린체제, 파시즘)을 설명하는 데 부적절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베버나 프로이드의 사상과 이론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당면한 문제, 즉 왜 서구에서는 혁명이 기대되었으며, 또 왜 이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비마르크스주의적 사상을 분석하고 또 적용될 만한 곳에서의 비판이론가의 관심은 마르크스주의를 저해하려는 시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고 재강화하려는 시도이다. 결과적으로 그드른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공헌의 중추적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이것이 당대 사회를 해석하는 데는 불충분한 토대로 여겨졌던 것이다. 보다 많은 지역을 확보하려는 국가의 팽창, '토대'와 '상부구조'와의 점진적 결합, 소위 '문화산업'의 확산, 권위주의의 발전 등, 이 모든 것들은 정치경제학이 다른 관심사와 통합되어야 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치사회학, 문화비평, 정신분석 등 그 밖의 다른 학문 원리가 비판 원리의 체계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통제라는 중심적 문제뿐만 아니라, 분업, 관료주의, 문화양식, 가족구조에 관련된 논점에 부각시킴으로써 비판에 관련된 용어를 결정적으로 확대시켰으며,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들의 연구는 생산양식-이것은 아마도 마르크스 이론 전체에서 가장 중심적인 용어이다.-이 객관적인 구조, 즉 인간의 동인(動因)을 '앞질러' 발전하는 것으로만 단순히 특징지워지는 것을 예방해주는 복잡한 관계와 매개를 밝히기 시작했다. 특히 역사적 발전(외견상 자율적인 경제적 '토대'에 의해 유추되는)의 불변의 단계와 이러한 단계를 이해하기 위한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양식의 적합성을 강조하는, 사적 유물론의 '결정론적' 및 '실증론적'인 해석을 문제삼았다. 그들은 마르크스에 대한 실증론적 해석이 마르크스 자신이 배척했던 사상 형식인 '관조적 유물론', 즉 인간의 주체성이 갖는 핵심적인 중요성을 무시한 유물론에 상응한다고 주장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 관점(예를 들면, 독일 공산당의 강령)은 행위의 객관적 조건과 이러한 조건들이 이해되고 해석되는 방식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문화 내지는 동질성 형성의 요소에 관한 분석은, '부분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주체의 상황적 행위'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은 고정된 위기 경로를 밝혀주지는 않는다. 위기과정과 그 해결의 본질은 사회적 행위자의 실천과 그들이 일부분이 되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에 좌우되는 것이다. 비판이론은 구조와 사회적 실천과의 상호작용, 즉 특수한 사회적 현상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주체와 객체의 조정에 대한 문제를 고찰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비판이론가들이 문제를 정식화하는 방식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당대의 사회 정치적 논점의 고찰을 통해, 깨달을 수만 있다면 사회의 합리성을 고양시킬 미래의 가능성을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잠재해 있는 것을 해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표현했던 것처럼, 잊혀질 위기에 처해 있는 과거-인간해방을 위한 투쟁, 이 투쟁의 원인, 비판적 사유 자체의 본질-를 '거억하거나 상기시키는' 일에도 관심을 집중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의 이론과 실천개념의 새로운 강조점과 이념도 도출하였다. 예를 들면 개인적 만족(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전망을 견지하는 혁명가들에 대하여)과 개인적인 자기해방(해방은 단순히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하여)과 인간본성과 자연 사이의 기존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기존 기술형태의 발전을 가속화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하여) 등 이 모든 것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원리로부터 일탈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Marcuse 1955) 그러나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은 결코 일련의 경직된 정치적 요구를 내세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버마스의 경우처럼 해방의 과정은 자기해방과 자기창조를 수반한다는 것이 그들의 사고의 중추적 원리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레닌주의적인 전위조직은 체질화된 분업과 관료주의 및 권위주의적인 지도 체제를 재생산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평가되었다. 비판이론가들이 지속적인 정치이론을 창출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와 자유의 통일을 주장하고, 합리적인 사회의 목적은 미리 전제되어야 하며 그 사회를 획득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과 양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전통을 받아들였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호르크하이머의 지배 하에 있었던 사회문제연구소는 개인의 주체성 형성, 가족관계, 관료주의, 국가, 경제와 문화를 포함하는 여타 분야의 연구와 분석을 추구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이론으로 알려진 것이 종종 마르크스주의 원리로부터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도달한 많은 결론들은, 예측 가능한 미래에서의 사회변혁에 대한 많은 장벽을 강조하는 바대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과는 역행하고 있다. 다음의 몇 가지 요소는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에 대한 그들의 평가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그들은 정치와 경제의 점진적인 통합으로의 경향을 확인했다. 독점이 출현해서 국가에 개입하는 반면, 국가는 경제과정을 보호·유지하는 데 개입한다.
둘째, 정치와 경제의 점진적인 결합은 관료적인 사고에의 특색 있는 창의성의 종속, 중앙집중적 계획에의 자원의 시장분배의 종속관계를 확인해 준다. 사회는 자급자족적이지만 생산으로만 집중된 강력한 (사적이며 공적인) 행정력에 의해 점진적으로 통합된다.
셋째, 관료주의 및 조직의 확산과 함께 도구적 이성-이미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효율성에 관한 관심-의 확산을 통하여 사회생활의 합리화가 확대된다.
넷째, 분업의 지속적인 확대는 작업을 단편화시킨다. 작업이 점차 기계화됨에 따라, 노동자들이자신의 노동을 생각하고 조직화할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 총체적 노동과정의 지식을 얻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대부분의 직업이 원자화되고 고립된 단위가 된다.
다섯째, 작업과 지식의 단편화와 함께 계급적 경험이 감소된다. 지배는 더욱 비인격적이 된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목적 달성의 수단이 된다. 이러한 과정-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을 규정하는 특수한 사회관계의 양식은 물화된다. 사회생활의 영역이 단지 상품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띠게 됨에 따라 물화는 강화되고, 사회관계는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된다.(→상품의 물신숭배 ; 교환) 갈등은 사회의 토대를 고찰해 보지 않은 주변적인 논점으로 더욱 집중된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분석은 외견상 자율적인 지배의 특수한 사회적 토대를 조명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주체로서 의식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점을 폭로하였다. 이 주제를 연구하는 데는 '대중문화'에 의해 이념과 신념이 전달되는 방식-개인적, 사적 영역이 자아의 외부적(가족 밖의) 사회화에 의해 침식되는 방식-의 평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부르조아 시대의 위대한 예술작품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것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실용적인 이해관계의 세계로부터 일정한 자율성을 지켜왔다고 생각했다.(Horkheimer and Adorno 1947) 이 예술작품은 그 형식이나 양식을 통해서 의미를 밝히는 방식으로 개인적 경험을 표현했다. 아도르노가 가장 자주 표현했듯이, '자율적인' 예술은 미와 질서 혹은 모순과 부조화의 이미지-실재를 곧장 떠나서 조명하는 미적 영역-를 창출한다.(→미학 ; 예술) 그것의 대상 세계는 확립된 질서에서 도출되지만 참신한 양식으로 이 질서를 묘사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인식적이고 파괴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것의 '진리 내용'은 상투적인 의미 형태를 재구성하는 능력에 좌우된다.
프랑크푸르트 이론가들은 그들 시대에는 많은 문화적 실체가 상품이 되었지만, 반면에 문화 자체는 '산업'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산업'이라는 용어는 문화적 가공물(예를 들면 TV, 영화 음악)의 '획일화', 그리고 '의사(擬似) 개인화' 혹은 한계적 차별성을 의미하며 또한 선전과 분배 기술의 합리화를 의미한다. 예술적 형태의 통합에 관계없이, 문화산업은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다양성과오락의 창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일상생활의 책임과 단조로움으로부터 일시적 도피처를 제공한다. 그러나 문화산업은 진정한 도피처를 제공하지 못한다. 기분 전환을 위해 사람들의 생활에서 기본적인 피로를 해소하고 일할 의지를 재생산하는 봉사-요구나 노력이 없는-만을 제공한다. 아도르노는 TV, 예술, 대중음악, 점성술을 분석하면서, '산업'의 생산물이 세상 사람들이 도피하려는 세계의 구조를 단순히 묘사하고, 강화하는 방식을 보여주려고 특히 노력했다. 그것은 생활에서의 부정적 요인이 자연적인 원인이나 운에 기인한다는 믿음을 강화하고, 그로 인해 운명, 의존, 의무의 의미를 증대시킨다. 문화산업은 기존의 질서를 위한 '사회적 접합제'를 생산한다.(아도르노는 모든 미술과 음악의 운명이 이렇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현대 미술과 음악의 연구를 통해 다양한 문화 현상의 본질을 평가하려고 노력했다. 이 연구에서 많은 여가활동이 관리되고 통제되는 방식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생산과 소비의 양 측면이 개인의 사회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비인격적인 힘이 개인들의 신념뿐만 아니라 그들의 충동까지도 동요시킨다.(→문화)
많은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이 학파는 사회가 개인을 규정하고 사회적 성격 유형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설명했다. 그들은 사회화 과정에서 부모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외부 세계의 과도한 입력에 대항하여 가족의 보호 한계성 때문에 아버지의 권위의 합법성이 감소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자아이가 그의 아버지처럼 되기를 더 이상 고무받지 못하고, 보다 좋아하는 이미지가 문화산업 일반(또는 나치 독일의 파시즘)에 의해 주입되는 결과를 낳는다. 아버지는 일정한 힘을 유지하지만 그의 자식에 대한 요구나 금지는 기껏해야 조금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힘은 변덕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에서 아이들은 강제력과 강함에 대한 추상적 관념을 얻고, 이 이미지에 적합한 보다 강한 '아버지'를 찾는다. 외부의 강제력-예를 들면 파시즘의 선동 정치가-을 수용하려는 일반적 상태가 조성된다.
《권위주의적 인격(人格)》(Adorno et al 1950)이라는 고전적 연구는 이러한 압력 하에서 결정되는 인성 증후군을 통해 감수성의 분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연구는 일정한 성격 특성과 잠재적인 파시스트로 간주되는 정치적 견해-호전적 국가주의와 인종차별(→인종)과 같은- 사이의 상호 연관을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이 연구는 사고가 경직되고 상동증(常同症)에 걸리기 쉬우며, 상투적인 가치와 권위 그리고 미신적인 것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획일화된' 개인들을 규명하였다. 이 연구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뿌리깊은 지를, 그리고 사람들이 '합리적 이해관계에 반(反)하는' 신념체계를 왜 수용하는지를 밝혔다. 권위주의적 성격 유형은 비판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자율적인 개인과 공존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당대의 문화와 권위주의의 형태에 관한 평가는 이러한 연구 계획의 정확한 의미가 학파 구성원 간의 논쟁에 그쳤지만 해방투쟁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의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구는 그들이 인간과 사회의 잠재적인 변화 가능성이 역사적으로 밑받침되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매우 당혹스러운 역설을 보여주고 있음은 명백하다. 즉 그들은 사회적인 투쟁에 거의 근거하지 않은 근본적인 사회변혁 가능성의 이론을 제시한다. 비판 관련 용어와 정치적 개념의 확장은 그들이 처한 입장의 긴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일보를 이루고 있다. 그들이 이데올로기의 비판과 기존의 지배구조의 붕괴 가능성을 인지하는 데 도움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주로 자본주의의 변혁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된 긴장은 문제가 될 수 있는 주제-그들을 일정한 형태의 정치적 투쟁의 중요성과 이 투쟁을 위한 작업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게 하는 주제-에서 야기된다.
그들의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는 왜 마르크스가 예견한 대로 서구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혁명의 부재를 설명하려는 노력에서 정치적인 사건의 복잡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기존질서의 결정적 파괴를 통하여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가정으로 인해 사회를 안정시키도록 작용하는 강제력에 부당한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기대했던 것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면서, 그들은 반대편을 흡수해 버리는 '체제'의 수용능력을 과대평가했다. 결과적으로 비판이론은 서구권과 그 밖의 모든 지역에서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투쟁-정치운동의 면모를 일신해 왔고 계속 변화되고 있는 투쟁-의 영역을 조망하지 못하였다.(→자본주의 사회의 위기) 그러나, 비록 그들이 변화하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이론과 비판에 대한 관심은 급진적인 정치운동을 저지하는 다양한 지배 형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상당한 실천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분야에서 그들의 연구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제외될 수 없는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는 언급되지 않겠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위치에 대해 여러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Anderson 1976 ; Held 1980 ; Thompson 1981 ; Geuss 1982) 의미심장하게도 비판이론의 가장 중요한 몇몇의 결함이 제2 세대에 속하는 비판이론가들의 저작에서 밝혀지고 있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의 틀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틀에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킨 하버마스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특히 그는 비판이론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보다 엄밀하게 고찰해왔고, 합리성과 '좋은 사회'에 대한 전제조건을 규명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했다.(Habermas 1968, 1973) 지금의 시점에서 그의 이론의 원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연구는 아직도 진행중이며, 사회 비판이론의 정밀화가 여전히 진행중인 연구대상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서구 마르크스주의 ; 인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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