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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 (strike)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고용주에 대한 노동자의 일상적 종속을 공공연하게 분쇄하는 노동자들의 집단행위이다. 19세기 전반을 통해 (그리고 후에도 자주) 대부분의 나라에서 파업은 비합법적 행위였고, 따라서 그것은 적어도 암암리에 국가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노동계급은 파업을 통해 자신의 불만을 보다 일반적으로 폭발시키곤 하였다.
파업은 일찍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로 하여금 노동조합을 열성적으로 평가하도록 고무하였다. 《노동계급의 상황》에서 엥겔스는 영국의 파업이 보통 패배하긴 하였지만, '사회적 전쟁'의 선구였으며, '피할 수 없는 대투쟁을 스스로 준비하는 노동자들의 군사학교'였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고립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를 '하나의 독자적 계급'으로 확립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진정한 내란'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하였다. 똑같은 취지가 《공산당 선언》에도 나타나 있다. 이후 제1 인터내셔날(→인터내셔날)의 많은 실제적 활동은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포함하였다.(파업 노동자들의 수는 1860년대의 경제공황기에 증가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파업이 제한된 목적을 위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조합들의 상투적인 행사일 수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가 인터내셔날에서 노동조합은 '결과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촉구하였을 때, 그 함축하는 바는 조합주의자들은 기꺼이 '이 피할 수 없는 유격투쟁에 완전히 흡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가치, 가격 그리고 이윤》)
파업에 대한 다른 하나의 관점은 총파업(그 기원은 1832년 벤보우의 '대국경일' 제안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의 이념을 받아들이는 바쿠닌과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1868년 인터내셔날은 선전포고에 저항하기 위한 파업 전략을 승인하였는데, 이것은 마르크스를 크게 실망시켰다. 이후 바쿠닌주의자들은 생디칼리즘의 중심적 슬로건이 된 혁명적 총파업 원칙을 정립하였다. 총파업은 제한된 전술일지라도, 특히 선거권의 확대를 쟁취 또는 옹호하기 위해 제2 인터내셔날의 사회 민주주의에도 역시 중요한 문제였다. 비록 정치적 파업의 신뢰도가 독일 노동조합의 가중된 반대 입장에 의해, 그리고 1909년 스웨덴 노동자들이 당한 패배에 의해 손상되었다 하더라도,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1893년 벨기에의 예를 따랐다. 1914년 8월 총파업으로 인하여, 전쟁에 반대한다는 나머지 모든 환상들은 무너져 버렸다.
개량주의적 총파업의 쇠퇴(영국에서 1926년은 그런 경향을 확실히 보여준다.)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중요한 진전과 일치한다.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적 파고는 룩셈부르크의 팜플렛 《대중 파업, 정당과 노동조합》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운동의 자발성, 즉 '혁명의 살아 움직이는 약동과 동시에 가장 강력한 추진력'을 강조하였다. 그녀는 그러한 자발적인 행위는 노동조합의 만성적인 일상성을 뒤집고, 정치와 경제 사이의 개량주의적 경계를 부수고, 계급투쟁의 본질적 통일성을 밝혀준다고 주장했다.
레닌도 역시 1905년의 사건에 깊이 영향 받았다. 1890년대에 그는 계급의식을 확대시키는 데 있어서 파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치적 조직 및 투쟁을 수반하지 않는 파업은 자본주의적 지배와 국가권력을 타도할 수 없었다. 이것은 총파업으로도 불가능하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런 조건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하고 있다. '계급적 정치의식은 단지 외부로부터, 즉 단지 경제투쟁의 외곽으로부터만 노동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05년에 '이 나라의 어떤 부분의 운동은 며칠 사이에 단순한 파업에서 놀랄만한 혁명적 폭동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레닌은 이후 룩셈부르크와 마찬가지로 대중 파업은 혁명적 의식의 성장과 변증법적으로 결합된다고 주장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 이후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즉 노동자 국가에서 파업자는 '자신에 대해 파업하는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1921년 레닌은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에서의 파업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관료주의적 왜곡과 구자본주의 체제의 모든 종류의 잔존물에 의해서만 설명되고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파업은 공식적으로는 결코 금지되지 않았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무질서, 계획적 결근, 심지어 '반혁명적 사보타지'의 행위로 억압당했다.
서구에서 초기 공산당은 특히 '제3의 시기'(공산주의 인터내셔날은 1925년 이래의 이 시기를 유럽의 새로운 혁명 고양기로 규정한다.)동안 계급투쟁에서 파업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1934년 '인민전선'전술로 전환됨에 따라 이것에 대한 강조는 약화되었고, 1941년 이후 러시아의 공동 참전국에서는 공산당이 파업을 맹렬하게 반대하였다. 전쟁 이래로 많은 나라의 공산주의적 노동조합은 하나의 정치적 시위로서 (금세기 전환기의 제2 인터내셔날과 유사성을 보여주는) 전국적 파업에 빈번히 의존해 왔다. 이런 경과를 통해 트로츠키주의자 그룹들과 '공식적' 공산주의의 좌파 그룹들이 계급투쟁을 진전시키기 위한 파업을 옹호하는 주요한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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