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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 (intellectuals)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서의 지식인의 역할 및 사회주의적 지식인들과 운동 간의 관계에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해왔다. 이들 지식인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보수적 지식인과 진보적 지식인으로 선명하게 구분지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전의 많은 지식인들을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면서 어떤 사회에 의해서든 간에 성립될 수밖에 없는 보호막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연관시켰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상들은 노동분업이 확대되고 정신활동과 육체활동이 분리되면서 비실제적인 사고를 추상화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의 관심대상인 것이다.(《독일 이데올로기》1부 1a, 1b절 ; 1893년 7월 14일, 엥겔스가 메링에게 보낸 편지) 그 사람들은 미세한 전문화가 육체노동자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속박을 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Venable 1946, pp. 54, 129)
이와 대조적으로, 엥겔스는 르네상스 시대의 사상가들을 주목했다. 르네상스 시대 사상가들의 정신은 적극적인 생활 속에서 신선하고 힘차게 움직였다.(《자연변증법》서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러한 사람들이 새로이 부상하는 계급들과 사회적 조류의 동인(動因)들을 표현하고 명료하게 했다고 보았다. 프랑스 유물론을 격찬했던 초기의 글(《신성가족》6장 3절)에서 마르크스가 모든 형이상학들을 전복시킨 사람으로 꼽은 베일과 같은 사람들은 프랑스 부르조아지의 대변인 내지 동맹자로 이해될 수 있는데 그들은 군주제와 귀족정치에 대해 오랫동안 도전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새로운 산업노동자계급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 새롭게 출현한 문맹대중과의 관계는 지식인들이 이전의 어떠한 운동과 가졌던 관계와는 같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식인에 대한 결론이 될 만한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다. 한가지 의아스런 점은 이들 두 사람이 잘난 체하고 다니는 섣부른 학자들처럼, 처음부터 당시 독일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산계급에게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당시 ‘독일의’ 사회주의니 혹은 ‘진정한’ 사회주의니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공산당 선언》(3부)에서 두 사람은 이러한 말장난이 프랑스인들의 관념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추상화나 환상의 허구로 바꾸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비난했다. 듀링을 반박하는 글에서 엥겔스는 자신과 마르크스가 그러한 거짓 지성주의에 대해 갖는 혐오감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에 의해 노동운동이 오도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1879년 9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베벨과 그 밖의 사람들에겐 보낸 편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이 사회주의로 가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기를 간헐적으로 바랐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전망은 거의 보이지 않았으며, 요셉디츠겐과 같은 프롤레타리아 사상가들의 출현도 없었다. 레닌에게는 노동조합주의적 사고를 벗어나는 것은 오직 외부로부터 노동계급에게 무엇인가가 주어질 때라야만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플레하노프가 말하고 있듯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적 노동자들에게 지식인으로 봉사할 수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1908, p. 28) 레닌은 인텔리겐차에 대해 매우 복잡한 견해를 갖고 있었지만, 특히 러시아에서, 그의 인텔리겐차에 대한 통렬한 비난은 마르크스가 독일의 지식인들에게 퍼부었던 비난을 연상시킨다. 인텔리겐차는 무기력하고 오만하며 우유부단했다. 레닌의 이러한 비난은 1905년 혁명이 실패한 후 더욱 가열되었다. 1905년 혁명시 레닌은 심지어 볼세비키파의 지식인들조차 패배주의에 굴복하고 그들의 일부는 공허한 환상에 탐닉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언젠가 고리키에게 자신은 그들이 차리리 배신하기를 바라며 노동자들로 그들을 대체하는 편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레닌은 그의 친구에게 ‘어리석은 생디칼리스트들처럼’ 자신은 지식인들을 멀리하지는 않을 것이며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얼마나 절실한 존재인가를 똑똑히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1908년 2월 7일과 13일의 편지) 실제로 1917년 이전의 169명의 볼세비키 지도자들 가운데 79명이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일반당원의 15%가 대학출신이었다.(Liebman 1973, p. 100)
지식인들이 대부분인 청중들에게 사회주의에 대해 강연하면서 카우츠키는 그러한 사람들이 동맹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카우츠키는 그들에게 사회주의는 지적 및 예술적 활동에 보다 많은 공개적 후원과 자유를 주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한 분야에 대한 정부의 어떠한 규제 노력도 어리석은 짓이며 ‘물질 생산에 있어서의 공산주의, 지적 활동에 있어서의 무정부주의’가 슬로건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902, pp. 178~9, 183) 볼세비키 혁명과 더불어 러시아의 후진성에서 오는 불리한 조건 하에서 그 실제적인 적용의 시기가 도래하였다. 1920년 레닌은 모든 분야에서 기존의 인텔리겐차를 고용할 필요가 있지만 일단 그들은-노동계급도 마찬가지이지만- 개조되고 재교육 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좌익 소아병’ CW 31, p. 113) 기술을 가진 인텔리겐차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녔다. 스탈린이 주도한 여러 가지 정책들에 의한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정권과 기술 인텔리겐차 간에 충돌이 일어났다. 반면에 여타 부문의 지식인들은 엄격한 통제에 복종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어떤 경우이든 너무나 소수였기 때문에, 새로운 집단의 사람들이 끌어올려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가능한 한 노동계급으로부터 충원되었으며, 독자적인 사고보다는 충성도와 효울성의 여부에 따라 훈련을 받았다. 비슷한 어려움이 후에 중국에서도 나타났는데 거기에서는 그 나라의 극심한 후진성으로 인하여 어려움은 더 했으며, 아예 지식인들이 전무한 상태에서 원시공산주의로 돌아가려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는데 이러한 흐름은 문화혁명에 의해서도 약해지지 않았다.
서유럽에서는 그람시가 지식인 문제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였다. 그는 독자적 계급 혹은, 집단으로서 자신들을 위치지우는 ‘전통적’ 인텔리겐차-모든 관념주의 철학에서 나타나는 비실제적인 구분-와 각 계급(농민계급을 제외한)이 지체 내에서 ‘유기적으로’ 만들어낸, 생각하는 집단들로 구분지었다.(1957, pp. 118~20) 그는 노동계급에서 지식인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비록 그의 지식인에 대한 정의는 지도하고 조직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할 정도로 광범위한 것이었지만, 그는 오늘날 필요한 지식인들은 단순히 이야기꾼이 아니라 사회를 실제적으로 건설해가야 할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중간 지식계층’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실업상태에 있는 것이 현대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보았다.(1957, pp. 122~3)
서구에서 노동계급을 사회주의의 견인차로서 보는 신념의 쇠퇴는 상대적으로 더욱더 인텔리겐차에 비중을 두게 되는 방향으로 흘렀다.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어떠한 사람도 미국의 라이트 밀즈처럼 인텔리겐차를 (노동계급의 패배에 의해 공허하게 된) 진보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위치로까지 끌어올린 적은 없었다. 그러나 서구의 마르크스주의는 의식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 더욱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주목해 왔다. 이러한 양상과 더불어 사회주의가 비젼을 가지려면 경제적 이해뿐만 아니라, 지식과 예술도 자기편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고도화된 인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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