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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religion)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에서 사회에 관한 사유를 시작했다. 말하자면 독일에서는 (후에 엥겔스가 말했듯이) 정치적 활동이 거의 불가능했던 까닭에 진보적인 열망은 사회, 정치적 질서를 지지하는 정통 종교에 대한 비판에서 출구를 찾아야만 했다.(《포이에르바하》1절) 역사에 관한 헤겔의 진화론적 접근 방식은 18세기 철학자들의 단순한 유물론이 심히 부적합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즉 기독교나 다른 종교가 협잡꾼들(엥겔스, 브루노 바우어와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도모되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하여 쓰고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는 인간적 조건과 그것을 인류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드는 관계에 대해 분석했다. 종교는 인간의 불완전한 자기 인식의 표현이다. 이 때의 인간은 추상적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이다. 종교란 인간 존재의 왜곡이다. 왜냐하면 사회가 이미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유명한 표현을 빌자면, 종교는 심장 없는 세계의 심장이고 고통받는 대중의 아편이며, 혹은 해독제이다. 자신들이 대용물로 전락하는 생활에서 해방될 때 인간은 진정한 행복에 이른다. 마르크스는 자기 해방이 단순히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인간을 불완전하게 하고 타락시키는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보다 높은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 인간의 임무이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제4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종교의 뿌리라는 것을 인식한 반면, 종교가 사회의 재조직화에 의해서 뿌리뽑힐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공박했다. 엥겔스는 그의 후기 저작(《포이에르바하》3절)에서 포이에르바하는 사실상 종교 철폐를 원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개혁을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포이에르바하는 종교를 동반한 물질적 사회변화를 역사로 보지 않고 종교적 변화의 연속으로 파악했다. 적어도 청년시절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러한 변화가 계몽적 역할을 하게 될 속도, 또는 완전성에 대하여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자본주의 내에 있어서의 산업화는 종교에 의해서 결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적 환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식되었다. 특히 사회주의가 발전하면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독일 이데올로기》(1부 1절)에서는 모든 관계를 상업화함으로써 산업은 종교와 도덕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들이 명백한 거짓임을 보여줄 수 있다고 쓰고 있다.(대략 1세기 반이 지난 후에 이러한 방향으로 훌륭한 진보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종교적 신념이 노동계급에게는 아무런 설득력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의 의식을 실제 상황보다도 훨씬 백지상태인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종교와 같은 비현실성은 논쟁보다는 경험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들은 그러한 경험을 겪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유대교의 문제에 관하여’라는 그의 초기 논문에서, 만약 유대인들이 그들이 현재 걸머지고 있는 행상이라는 생활의 짐을 덜 수 있었다면, 유대주의는 훨씬 이전에 사라졌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자본론》Ⅰ권(1장 마지막 절)에서는 종교적 기만이 오로지 생산체계의 비합리성을 은폐시키고 있으며, 결국 인간이 서로 합리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모든 사회적 불안을 제거하게 되면 종교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그의 확신을 되풀이하여 강조했다.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하여 가장 체계적으로 생각한 것은 그의 청년 시절이었다. 엥겔스는 되풀이해서 그 주제로 환원하였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가 약간의 갈등이 없지는 않았으나 종교 교육의 여파로부터 벗어난 데 기인한 듯하다.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1524~25년, 독일에서의 농민전쟁을 다룬 그는 혁명의 위기에 있어서의 정치와 종교의 상호작용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그는 중세의 교회와 이교도가 충돌한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이른바 종교전쟁에서 탐구되어야 할 실체는 경쟁하는 물질적 이익에 관한 계급투쟁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학구적인 독일 정신은 신학적인 논쟁을 분별해냄으로써 지난 시대에 관하여 액면 그대로의 환상을 갖게 되었다.(2장) 이것은 종교에 대한 순수한 부정적 접근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 의식에 저항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이탈 경향이 새롭고 진보적인 사회적 흐름에 의해 고무되는 가능성을 허용한다. 이것은 특히 종교개혁의 경우에 더욱 그렇다.
《반듀링론》 마지막 장에서 엥겔스는 종교적 주제로 돌아가서 종교는 인간 존재를 지배하는 모든 힘의 일시적인 투영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처음에는 각종의 신화를 낳게 된 자연력이었으나, 그 후에는 그것과 마찬가지로 소외되고 최근까지만 해도 신비로운 것으로 여겨져 온 사회 질서에 해당된다. 그는 초기 신성(神聖)이 모두 결집된 일신교의 유일 신위를 인간성이라는 추상적 관념의 인격화로 생각했다. 이러한 일신교의 출현에 관한 이론은 《포이에르바하》(2절)에서 처음 나타났다. 여기서 엥겔스는 종교적인 개념들이 물질적인 삶에서 생겨나는 여타의 것들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어떤 측면에서 보면 완전히 유리된 것이라고 간주했다. 또한 종교적 개념들은 그 당시의 생활에서 직접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주 먼 과거의 생활에서 차용해 온 것이다. 결국 그가 내린 해답은 그 목적을 충족시키는-실재가 배제된 상태에서 관념으로 우리를 만족시키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필수적으로 전승되고 항상 중시되어 온 물질로부터 발전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념들이 겪어 온 변화는 사회적 조건이나 계급관계의 변화와 일치한다.
동부 유럽의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짜르에 봉사해 온 종교에 깊이 빠져있는 거대한 농민 대중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짜르 제국에서의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기독교적 예배의식과 비기독교적 종교의 다양성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모든 종교에 대한 결정적 투쟁은 진보를 위한 본질적 과제인 듯이 보였다. 이런 이유로 해서 플레하노프는 비타협적 입장에서 가장 엄밀한 의미의 유물론을 고집했으며, 또한 그가 18세기의 《철학자들》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가장 훌륭한 유물론적 사유의 전통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플레하노프는 이제 종교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탕진해 버렸다고 한 엥겔스의 초기 입장(《유물론 투쟁》pp. 13, 20)에 완전히 동의했다. 그러나 플레하노프는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으로 인하여 아직도 충분히 계급의식이 성장하지 못한 노동자에게는 종교가 매우 퇴보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1905년 혁명의 실패 이후, 몇몇의 저명한 진보주의자들이 권태와 환멸에 젖어서, 특히 루나차르스키와 관련된 ‘신의 건설’ 형태를 띤 일종의 신비주의로 변신한 데 대해 격분했다.
그런데 이것은 레닌에게는 보다 심각한 문제였으며, 또한 엥겔스는 파리 코뮨 몇몇 블랑키스트 성원들이 원했던 것과 같이 (‘블랑키주의적 코뮨 망명자들의 계획’) 강요에 의해 종교를 제거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레닌은 이것에 동의하긴 했지만, 그러나 그는 종교적 감염이 겁많은 지식인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재앙으로 자신들을 위협하는 자본주의라는 맹목적인 힘 앞에 무감각해진 노동자들에게서도 흔히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국가와 관계되는 한 종교는 사적인 문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909. 5. 26) 물론 사회주의 정당에 있어서는 결코 그럴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진실로 사회주의자라면 당원으로부터 추방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즉 당 계획에 무신론이 강령으로 들어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종교의 보루는 경제적인 힘의 역할에 달려 있었으므로 노동계급은 보루 선언을 통하여 종교로부터 보호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현세에서의 단결은 천국의 치다꺼리에 만장일치를 표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계기였다(‘종교에 대한 노동당의 입장’ CW 15) 당은 모든 단체들의 자유로운 신앙활동을 옹호해야 하지만 그러나 역시 당은 종교를 모든 진보의 장애물로서 규탄해야 한다는 1913년 스탈린의 역설에서는 강조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눈에 띤다.(《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6절)
당이 러시아에서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러한 장애요인은 보다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사적 유물론》에서 부하린은 이에 대하여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개인으로서의 인간 조건, 죽음과 삶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초기에는 영혼에 대한 두려움을 대체하고 보완하는 점에 종교의 기원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p. 172) 부하린은 낡은 지배계급은 종교적인 무감각 상태에 빠져 있지만 젊고 혁명적인 노동계급은 유물론적 세계관을 택하는 것이 논리적이라고 주장했다.(p. 58) 그는 정통 교회의 사제등급이 짜르 정부의 관료등급과 유사하다고 비웃으면서 성 미카엘을 천사들의 사령관이라고 했다.(p. 176) 그러나 종교는 능동적으로 대처되어야만 한다. 어떤 것이 저절로 사라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p. 180) 이런 상태에서 새로운 질서에 대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충성심은 불가피하게 회의적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따라서 당내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있기에는 부적합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행한 종교적인 과거에 대한 잠정적인 탐색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특히 카우츠키에 의해서 초기 교회사의 영역에서 계승되었다. 그 중에서도 판네쾨크(1938, pp. 26~7)는 앞으로 도래할 시대의 유물론 및 유물론 철학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집착에 관하여 그 요점을 밝혀 놓았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의 대중적 불만의 폭발로 인하여 부르조아적 집착은 무산되었으며, 따라서 대중들은 그들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 수단으로서 종교로 후퇴하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러한 전환은 과거의 단순한 유물론적 세계관으로서는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독교와 같은 특정 종교의 경우는 물론, 그 밖의 모든 종교의 기원을 추적하려고 했다. 카우츠키는 윤리학의 발전에 대한 그의 저서(1906) 전반부에서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낡은 비도덕적 신위에 대한 숭배에서 발생한 유일신교와 설교 신경(神經)에 관심을 쏟았다. 이러한 선사 시대와 인류학 분야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그 후 결정적인 징표를 만들었다. 뒤르껭 학파가 이것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데 대해서 흔히 언급되긴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구조를 주어진 사실로 간주하는 대신에 인간과 그들의 환경 사이에서 나타나는 발전적인 상호작용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했다. 실제로 이들 두 학파는 그들의 엄격한 형식이 허용하는 듯이 보이는 것보다도 더 종교적 진화에서의 보다 많은 자율성을 시인했다는 것이 앞에서와 동일한 주석자의 말이다.(로버트슨 1972, pp. 19, 21)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럽 이외 지역에서의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 관한 고찰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때때로 동양의 역사는 마치 종교사와도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고 주장했다.(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1853. 6. 2.) 인도에 관한 한 논문(1853. 6. 10.)에서 마르크스는 화려한 부유층과 처참한 빈곤층이 존재하는 인도에서는 성적 충만과 자학적인 회의주의의 결합이 힌두교에 반영되어 있다고 하는 매우 시사적인 말을 하고 있다. 그는 또한 자연에 대한 맹목적 의존이 자연신(神)이나 동물에 대한 숭배로 표현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후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특히 이슬람교와 같은 다른 종교의 특징에서 이러한 논지를 계속 지켜나갔다.
유럽 이외의 몇몇 지역에서는 그 지역 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몇 년 동안 훌륭히 자신들의 기록을 검토하였다. 인도에서는 이것이 고대의 브라만제도와 불교에 대한 연구로 집중되었다. 철저한 우상파괴로 인해 코잠비(1962, p. 17)는 가장 귀중히 여겨지면서 또한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즉 ‘화해될 수 없는 것을 조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기민함’과 ‘교활한 기회주의 성향’이 뒤섞인 지타(Gita)경전에 세금을 부가했다. 차토파드히야야(1966)는 가장 황금기의 인도사상을 장식했던 강력한 유물론적 전통을 강조하면서, 자이나교와 불교가 본래 그 기원에 있어서는 무신론적 철학이었으나 인도에서 항상 유행했던 미신으로 도색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 후 더 많은 마르크스주의적 연구가 기대될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지방자치권 사이의 긴장이 여기에 미묘한 씨를 뿌렸다. 결국 1947년 분할 이전의 인도 공산주의자들은 비종교적 도덕론자인 네루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증오심에서 오는 거대한 파괴력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선구적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곽말약(郭沫若)은 고대의 조상숭배를 사유재산의 출현과 관련지었으며, 또한 절대신성에 대한 예식을 하늘같은 전능을 요구하는 중앙집권적 정치권력과 연결시키고 있다.(Dirlik 1978, pp. 150, 156) 실로 마르크스가 그의 지적 편력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가장 고무적인 작업의 하나를 종교에 대한 역사적 검증에서 찾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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