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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론] ()

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 실증주의와 헤겔주의, 사회과학과 역사철학,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와 비판적 (또는 인간주의적 또는 역사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유물론과 변증법 등등 사이의 긴장은 마르크스 자신의 저작들이 가진 모호성과 모순적 경향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은 진부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저작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에서 나타나는 이분법들을 넘어서고 부분적으로 그 이분법들을 설명하는 (a) 지식 이론 속의 그리고 (b) 지식 이론에 관한 관점들을 재구성하는 것은 가능하다.
(a) 마르크스에게서는 두 가지의 인식론적 주제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α) 객관성, 즉 자연적 형태들 및 사회적 형태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한 자연적 형태들의 독립적인 실재성 및 사회적 형태들의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실재성에 대한 강조(존재론적 또는 ‘자동적’ 차원에서의 실재론)와 (β) 인식 과정에서의 일이나 노동의 역할에 대한 강조와, 그러므로 그것의 생산물 즉 지식의 사회적이며 환원 불가능하게 역사적인 특성에 대한 강조(협소한 인식론적 또는 ‘타동적’ 차원에서의 ‘실천주의’)가 그것이다. (α)는 자연의 실천적 변경 및 사회적 삶의 실천적 구성과 부합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β)에 대해 의도적인 인간 행위나 실천의 매개에 의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주체의 생산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사회적 과정의 재생산이나 변형이라는 의미에서 객관화는 (α)에서와 같은 외부성으로서의 객관성과도 구별되어야 하고, 개별 사회들에서 나타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태의, 또는 소외된 형태의 노동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게서 ‘객관적인 것’과 그것의 동족同族들은 사중의 의미가 있다. 객관성과 노동이라는 이 두 가지 상호 관련된 주제는 경험주의와 관념론, 회의주의와 독단론, 초자연주의와 반자연주의에 대한 인식론적 폐기를 수반한다.
마르크스는 그의 초기 저작들에서 관념론에 대한 강력하고 때때로 날카로운 비판을 시도했는데, 이 비판은 철학에서 실질적인 사회󰠏역사적 과학으로 나아가는 그의 연구 경력에서 새로운 길을 여는 수단이었으며, 그의 새로운 과학의 주제에 대한 열쇠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경험주의에 대해서는 이것에 필적하는 비판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의 반反경험주의는 󰡔자본󰡕과 그 밖의 얼마 안 되는 산발적인 철학적 개요들에 함축되어 있는 실천적인, 즉 이론화되지 않은 상태의 과학적 실재론이라는 방법론적 입장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이 그것의 실천주의적 극極에 비하여 실재론적 극의 지적 발전이 상대적으로 지체되고 정교한 관념론―대체로 (α) 없는 (β)―과 조악한 유물론―대체로 (β) 없는 (α)―사이에서 동요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관념론과 경험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이 가진 이러한 불균형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관념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선험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포함하여―은 이중의 운동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의 포이에르바하적 계기에서는, 관념들을 체화된embodied 유한한 정신의 산물로 취급한다. 그리고 두 번째의 특정적인 마르크스적인 계기에서는 다시 체화된 유한한 정신을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들의 산물로 파악한다. 첫 번째 계기는 헤겔의 주어󰠏술어 전도, 존재의 앎으로의 환원(‘인식적 오류’) 그리고 사회적 삶으로부터 철학의 분리(‘사변적 환상’)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다. 두 번째의 반反개인주의적 계기에서는 고정된 인간 본성이라는 포이에르바하적인 인간주의적 또는 본질주의적 문제틀을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사회성 그리고/또는 그 사회성 속에서만 표현되는 인간 본성이라는 문제틀로 대체한다. “인간의 본질은 결코 각각의 개인들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실재에 있어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 Marx, “Theses on Feuerbach”, 제6명제.
“생산력, 자본 그리고 사회적 교제의 총합―각 개인이 주어진 어떤 것으로 대면하는―이 ‘인간 본질’의 실재적 기초이다.” Marx and Engels, German Ideology, vol. I, 1부, 7절.
동시에 마르크스는 “역사란 그들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활동에 불과한 것이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Marx and Engels, Holy Family, VI장, 2부.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인간의 실천 속에서의 그리고 인간의 실천을 통한 사회적 과정의 재생산과 변형이라는 개념으로, 그리고 차례로 이러한 과정에 의해 조건 지어지고 가능하게 되는 것으로서의 실천이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 “인간들은 그들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선택한 조건 아래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의해 주어지고 이전되고 부딪히게 되는 조건 아래서 만든다.” Marx, 18th Brumaire, 1절.
과연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에서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역사를 만들 것이라고, 즉 사회적 과정이 실천으로 해체될 것이라고 상정했을 것인가? 증거는 모호하다. 어떻든, 󰡔자본󰡕은 인간의 실천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구조들, 관계들, 모순들, 경향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 개인들은 오직 그들이 경제적 범주들의 인격화들인 한에서, 즉 특정의 계급관계와 이해관심들의 담지자인 한에서만 다루어진다.” Marx, Capital, vol. I, 서문.

마르크스는 (1) 단순한 물질적 객체 실재론, 즉 물질적 객체들은 그것들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결코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2) 과학적 실재론, 즉 과학적 사유의 대상들은 실재하는 구조들, 기제들 또는 관계들―존재론적으로, 그것들이 발생시키는 사건들이나 현상 형태들이나 외양들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이런 것들과 다르고 아마도 반대되는―이라는 견해에 대한 믿음에는 단지 점진적으로 불균등하게 그리고 비교적 뒤늦게 도달했다. 그렇지만, 1860년대 중반에는 과학적 실재론적 주제들이 변함없이 되풀이된다. “외부의 외양들이 사물들의 본질들과 직접 일치한다면 과학은 모두 불필요할 것이다.” 같은 책, vol. III, 48장.
“사물들의 미혹적인 외양만을 포착하는 일상의 경험에 비추어 판단한다면 과학적 진리는 늘 역설적이다.” Marx, Value, Price and Profit, VI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적 삶의 실재하는 기저적 관계들, 인과구조들 및 발생 기제들에 대한, (속류 경제학에 반대하여) 과학적 해명을 제공하고 (고전 정치경제학에 반대하여) 범주적으로 적합한 (물신화되지 않은, 역사화된) 설명을 제공할 것을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방법은 사실상 세 측면을 통합하고 있다. (a) 총칭적인 과학적 실재론과 (b) 영역에 따라 특수하게 제한된 (또는 비판적인) 자연주의와 (c) 주제에 따라 독특한 변증법적 유물론이 그것이다. (a)에서 마르크스의 관심은, 다른 모든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현상에 대한 조리 있고 일관되며 타당하고 경험적으로 근거 지어진 설명을 찾는 데 있다. (b)에서의, 마르크스는 자연주의가 자연과학적 탐구와 구별되는 사회과학적 탐구가 가진 일련의 차이점들에 의해 제한된다. 그 차이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형태들의 실천 의존성, 개념 의존성, 시간‧공간 의존성과 역사적 성찰성―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 자체가 정치경제학이 서술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생각과, 실험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폐쇄 체계를 이론에 대한 경험적 통제를 위해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것 때문에 이론에 대한 확증 및 반증을 위해서는 설명적이고 비예측적인 기준에 의존해야 한다)에 의해 요청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불러내는 ‘추상화의 힘’은 ‘현미경’이나 ‘화학 시약’을 대신하는 것도 아니고 마르크스의 실제의 경험적 실천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Marx, Capital, vol. I. 서문.
) (c)에서 마르크스의 설명이 가진 특성은 그것이 탐구의 대상―이러한 설명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모순적인 것으로 드러난―에 대한 설명적 비판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비판은 (i) 개념적인 그리고 개념화된 실체들(경제 이론들과 범주들, 현상 형태들)과 (ii) 그것들을 필요로 하거나 또는 설명해 주는 객체들 (구조화된 관계들의 체계들) 두 가지 모두를 대상으로 삼는다. 첫 번째 수준에서는, 그 실체들이 허위적 단순화(예컨대 임금 형태)이거나 물신화(예컨대 가치 형태)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결함을 가진 것으로 드러난다. 두 번째 수준에서 마르크스의 설명은 그러한 실체들을 발생시키는 객체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다른 사정이 같다면―와 그 실체들을 실천적으로 변혁하는 것에 대한 헌신을 논리적으로 동반한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구성 요소이며 그것의 신비화된 외양 형태라고 마르크스가 판별해 낸 독특한 체계적인 변증법적 모순들―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모순 등과 같은―은,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조직 원리를 경향적으로 파괴하며 자본주의를 다른 사회―“사회화된 인간들, 즉 연합 생산자들이 그들의 자연과의 교환을 어떤 맹목적인 권력이 지배하도록 놓아두지 않고 그들의 의식적인 통제 아래 놓음으로써 합리적으로 규제하는” 같은 책, vol. 3, 48장.
―로 대체할 수단과 동기를 제공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관념론이 철학의 전형적인 과오라면, 경험주의는 상식의 고유한 결함이다. 마르크스는 개념적 (또는 종교적) 총체성을 갖춘 관념이나 형식이나 개념이라는 관념론적 존재론과 주어진 원자론적 사실들과 그것들의 일정한 결합이라는 경험주의적 존재론 두 가지 모두에 반대하면서, 구조 지어져 있고 분화되어 있으며 발전하는, 그리고 인간이 존재한다면, 인간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실재 세계를 부각시켰다. 그러므로 낡은 ‘관조적 유물론’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명제들’에서 마르크스의 비판의 핵심은 그것이 과학을 탈사회화하고 실재를 탈층화脫層化하며, 따라서 그것은 기껏해야 ‘과학성’을 촉발할 수는 있더라도 유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헤겔 철학에서 절정에 도달한 독일 고전관념론에 대한 󰡔경제학‧철학 수고󰡕의 마지막 원고 등에서의 마르크스의 비판의 핵심은 그것이 과학을 탈층화하며 그러므로 실재를 탈역사화한다는 것, 따라서 그것이 ‘역사성’을 단지 촉발할 수는 있어도 유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르크스의 새로운 역사과학의 쌍둥이 인식론적 계기, 즉 그것의 (과학으로서의) 유적 형태를 나타내는 유물론과 그것의 (역사에 대한 과학으로서의) 독특한 내용을 나타내는 변증법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처럼 융합되거나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처럼 분리되거나 간에 철학적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이 여전히 본질적으로 관념론적인 형상을 보이고 그것의 유물론이 근본적으로 경험주의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마르크스 자신보다 뒤처져 있는 철학적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적 지체의 표지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대체로 독단주의를 관념론 및 합리주의와 결부시키고 회의주의를 경험주의와 결부시킨다. 그리고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단호히 기각한다. 그들 자신의 전제들은 ‘자의적인 독단’이 아니라 ‘순전히 경험적인 방식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선언한다. Marx and Engels, German Ideology, vol. I, I부 A.
동시에 그들은 “인간이 중력이라는 관념을 가졌기 때문에 인간은 물에 가라앉는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혁명적 철학자” 부류를 비웃는다. 같은 책, 서문.
그러므로 한편으로 (타동적 차원에서) 그들은 경험적으로 개방된 연구 기획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라는 개념을 제기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동적 차원에서) 초사실적으로 작동하는 구조들이라는 객관적 존재론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b) 인식론에 관한 마르크스의 입장도 두 가지 상호 관련된 주제들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인식 과정의 (α) 과학성과 (β) 역사성에 대한 강조가 그것이다(물론 이것들은 지식 이론과 연관된 새로운 역사과학의 주제들이다).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자신이 과학의 건설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제시하는데, 그러므로 특정의 인식론적 명제들―과학을 이데올로기나 예술과 구별하는 기준 등과 같은―을 신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과학을 포함해 모든 과학들이 역사적 상황(그리고, 그 상황 속의 잠재적인 인과적 행위주체)의 산물이라고 파악하며, 따라서 과학들에 대해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고 있다. (α)와 (β)는 인식 과정의 두 측면(‘내부적’ 측면과 ‘외부적’ 측면)을 형성한다. (β) 없는 (α)는 과학주의, 즉 과학을 사회역사적 영역으로부터 탈구시키고 그 결과 역사적 성찰을 결여하게 만드는 입장으로 빠지게 된다. (α) 없는 (β)는 역사주의, 즉 과학을 역사적 과정의 표현으로 환원하며 결과적으로 판단적 상대주의가 된다. 이 두 측면은 역사 특수적인 인식론들에 대한 설명적 비판의 기획 속에서 통합된다.
그렇지만 철학에서 벗어나 과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특징적으로, 과학적 실재론의 사례에서 그러했듯, 과학의 본질적 측면에 대한 그의 믿음이 어떤 것인가에 관해 여전히 이론화하지 않았다. 참으로 마르크스가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다듬어 제시하는 일은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의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한 철학의 실현을 그려 내는 초기 단계에 이어, 철학이 과학에 의해 어느 정도는 완전하게 대체되는 듯 보이는 두 번째의 실증주의적 단계에 갑작스럽게 멈추어 있다. “실재가 묘사될 때, 독립된 지식 분과로서의 철학은 그것의 존재의 매체를 상실한다. 철학의 자리는 기껏해야 가장 일반적인 결과들, 즉 인간의 역사적 발전에 대한 관찰로부터 생겨나는 추상화들의 요약이 차지할 수 있을 뿐이다.” Marx and Engels, German Ideology, vol. I, I부 A(강조는 인용자)
철학을 이렇게 추상적󰠏요약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는 후기 엥겔스로부터 인증을 받았으며,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이 되었다. 그렇지만 엥겔스의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다. 그의 실천은 역사적 유물론을 위해 일하는 조수underlabourer의 실천, 즉 로크식의 기능이며 이것에 대해서는 마르크스도 분명히 찬성했다. 더구나, 사회적 조건이 (철학적인) ‘지식의 문제’를 발생시킬 뿐 아니라 (실천적‧역사적) 문제로서 지식을 발생시키는 한, 마르크스주의가 인식론적인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므로 인식론적 입장을 갖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어떻든, 마르크스의 실천에 내재한 제3의 입장이 있다면, 그것은 철학이 과학 및 다른 사회적 실천들에, 실천적󰠏인지적 총체의 한 계기로서 이절적으로heteronomously 의존하고 있다고 파악하는 입장이다. 그 자체로 이런 입장은 헤겔의 낡은 ‘독일 학자풍의 개념연결적 방법’이나, 고유의 총체화하는 관점을 특징으로 하는 철학―(자연주의적) 과학이 아니라―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라는 루카치󰠏그람시적 견해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갖지 않을 것이다.
후기 엥겔스의 매우 영향력 있는 철학적 개입의 주요한 특징은 (1) 철학에 대한 실증주의적 견해와 과학에 대한 전前비판적 형이상학의 결합, (2) 일원론적 (과정론적) 존재론의 변증법과 비非환원주의적 (발현주의적) 우주론의 불안한 종합, (3) 반영론적 인식론―사유를 실재의 반영이나 복사로 파악하는―과 결합되어 사용되는 그러한 보편적 변증법적 존재론의 옹호, (4) 주관주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 및 (회의주의에 대한 실천적 논박의 강조와 결합한) 자연적 필연성에 대한 강조 등이다. 󰡔반듀링󰡕은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반면, 자연변증법과 반영 이론의 결합물은 정통 철학적 마르크스주의―(디츠겐Joseph Dietzgen을 따라) 플레하노프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이름을 붙인―의 인증서가 되었다. 불행하게도, 인과 연관의 우연성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은 인과 연관의 현실성(흄이 헤겔과 공유한 관념)에 대한 비판에 의해, 또는 사회적 삶에서 자연적 필연성들이 인간의 실천들에 의해 매개된다는 점에 대한 동등한 주목에 의해 보완되지 않았다. 더욱이, 과학의 역사에서 개별 사례들에 대한 그의 탁월한 통찰―예컨대, 󰡔자본󰡕 2권에 부친 그의 주목할 만한 (후기 쿤적인!) 서문―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영론의 결과는 타동적 차원을 잘라버리고 관조적 유물론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카우츠키, 메링Franz Mehring, 플레하노프, 라브리올라Antonio Labriola 등의 저작들에서 볼 수 있는 제2인터내셔널의 중심 흐름은 실증주의적이며 매우 결정론적인 진화론(카우츠키의 경우, 아마도 마르크스적이라기보다는 다윈적인)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대체로 마르크스의 작업을 발전시키거나 확장하기보다는 체계화하는 데 관심을 쏟는 것이었다. 역설적으로(왜냐하면, 엥겔스의 개입의 주요 주제가 유물론이라면 그것의 명시적 의도는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특수한 자율성을 등록하고 옹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의 결과물은, 엥겔스가 공격하기 시작한 핵켈이나 듀링 등의 초자연주의적 일원론―‘기계적’ 및 ‘환원적’ 유물론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세계관이었다.
레닌의 두드러진 공헌은, 철학적 개입의 실천적이고 이해관심적인 특성에 대한 강조와, 그러한 개입이 일상의 과학에 대해 갖는 상대적 자율성에 대한 명확한 견해에 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엥겔스의 견해가 가진 객관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경향을 부분적으로 개선한 것이다. 레닌의 철학적 사유는 두 국면을 거쳐 변화되었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볼셰비키 진영에서의 마하주의(예컨대 보그다노프가 제시하는)의 확산에 대해 반격하려는 의도의 반영론적 논박이었던 반면, 󰡔철학노트󰡕에서는 엥겔스가 중심으로 삼았던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의 대비를 점차 이차적인 것으로 돌리고 변증법적 사유와 비변증법적 사유의 대비를 전면에 내세웠다. 1920년대의 소련에서는 일시적이었지만 떠들썩했던 논쟁, 즉 데보린A. M. Deborin 등과 같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변증법적 측면을 강조하는 논자들과 부하린B. I. Bukharin 등과 같이 유물론적 요소들을 강조하는 논자들 사이의 논쟁이 있었다. 그렇게 하여 엥겔스가 남긴 인식론적 유산의 두 용어―‘변증법’과 ‘유물론’―는 베른슈타인에 의해 모두 기각되었다. 레닌은 여러 기회에 걸쳐 이 용어들을 강조했고, 그 후 소비에트 철학에서 데보린과 기계론자들 사이의 내적 대립으로 외부화되었으며, 스탈린 치하에서 ‘변유’Diamat로 법전화되었다. 이후 이것들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대립적인 흐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아들러와 오스트리아󰠏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이 두 가지 점에서, 자의식적으로 비판적(칸트적 의미에서)이다. 즉 유추적으로는 뉴턴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도 ‘사회화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칸트적 질문을 정식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직접적으로는 칸트에게서 공간과 시간과 범주들이 그러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성이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들러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경험적으로 통제된 비판으로 이해해야 하며, 그것의 대상―사회화된 인간―은 유사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데 이 법칙은 의도적이고 가치 지향적인 인간 활동에 의지하여 작동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상가들 가운데, 마르크스주의가 일차적으로 과학이라는 것을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예컨대, 부하린의 󰡔역사적 유물론󰡕을 참고할 것). 동시에 마르크스가 가진 진정으로 변증법적인 요소 또는 헤겔적 요소들을 강조한 사람은 전혀 또는 거의 없었다. 틀림없이, 가치 이론에 대한 󰡔자본󰡕에서의 마르크스 해설의 난해함과 마르크스의 핵심적인 초기 저작들이 뒤늦게 공개된 점이 이러한 사정의 주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바뀌었다. 참으로, 루카치가 해석한 헤겔적 마르크스주의는 G. Lukács,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London, 1971
엥겔스적 전통이 주로 강조한 것들을 극적으로 뒤엎었다. 그리고 이 해석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작업과 골드만Lucien Goldmann의 발생구조주의를 촉발했으며, 엥겔스의 그것만큼이나 영향력 있는 마르크스 해석의 규범을 코르쉬Karl Korsch와 K. Korsch, Marxism and Philosophy, London, 1970.
그람시 A.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London, 1971.
등에게 제공했다.
그들의 지식 이론의 주요한 유적 특징은 (1) 역사주의, 즉 마르크스주의를 노동계급의 이론적 표현으로 판별하고, 자연과학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판별하는 입장(이것은 인식 노동 과정의 내재적 측면의 붕괴를 수반하고, 사회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각과 자기 충족적인 또는 자율적인 철학이나 사회 이론―그 자체의 종합적인 총체화 관점을 갖는―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옹호를 수반한다)과 (2) 세계가 실천적으로 구성된다는 관념에 기초한 반反객관주의와 반反반영론(이것은 과학의 자동적 차원의 붕괴 또는 실질적인 무효화와, 이것에 조응하는 인식론적 관념론 및 판단적 상대주의로 이어진다) 그리고 (3) 제2인터내셔널의 실증주의적 과학주의에 의해 질식된 마르크스주의의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측면의 회복 (루카치의 경우, 마르크스 이론의 본질적 성분, 즉 물신주의 교의의 재발견) 등이다.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기본적으로 객체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 주체의 표현이 되었다. 즉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운동의 이론적 표현이다.” K. Korsch, Marxism and Philosophy, London, 1970, p. 42.
더욱이 그것은 자기 충족적인 것―그람시가 표현하듯, “세계에 대한 총체적이고 통합적인 견해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A.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London, 1971, p. 462.
―일 뿐 아니라, 바로 그리고 오직 이러한 자기 충족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루카치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가 부르주아 사상과 다른 결정적인 차이는 경제적 동기의 우선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총체성이라는 관점에 있다(이 입장은 루카치의 후기 저작인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Ontology of Social Being에서 반복된다). 전체가 그것의 부분들에 대해 전면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관점은 마르크스가 헤겔로부터 전수받은 방법의 핵심이다.” G. Lukács,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London, 1971, p. 27.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연과학은 그 자체로 부르주아지의 파편적인 물상화된 시각―여러 부분적인 영역들로 분리되고 그 어떤 의미 있는 총체성과도 관계되지 않는 순수한 사실들의 세계를 창출하는―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루카치는 과학 자체를 과학에 대한 실증주의의 잘못된 해석과 혼동하고 변증법적 사유와 분석적 사유를 경직되게 대치하는 마르크스주의 내의 오래된 전통을 출범시키고 있는 것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역사의 동일한 주체󰠏객체이며, (루카치 진영에서) 역사는 이러한 사실의 실현이다. 역사적 유물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 지식, 또는 (그 진영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토대인 상품으로서의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자의식적으로 깨달아가면서 이미 그것을 변형하기 시작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귀속적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 1권 제1장 4절의 ‘상품 물신주의’에 관한 논의는 “그 속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지식으로 간주하는 역사적 유물론 전체를,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지식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같은 책, p. 170.
루카치의 인식론은 합리주의적이며 그의 존재론은 관념론적이다. 더욱 특수하게, 그의 총체성은 (알튀세르가 지적했듯) 각각의 계기나 부분이 암묵적으로 전체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표출적인 것’이며, 또한 현재는 오직 그것이 예기하는 미래―성취된 동일성의―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목적론적이다. 마르크스의 존재론에는 있지만, (과정을 강조하는) 엥겔스의 존재론과 (총체성을 강조하는) 루카치의 존재론에는 없는 것은 구조이다.
그람시에 따르면, 실재 자체라는 바로 그 개념은 종교적인 잔재이며 사물들의 객관성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호 주관성에 입각하여, 즉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점근적으로 접근해 가는 그렇지만 오직 공산주의 아래에서만, 실천적 합의가 성취된 뒤에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인식적 합의라고 재정의된다. 그람시는 “실천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는 원자론적 이론에 의해 설명되지 않으며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즉 원자론적 이론은 다른 모든 과학적 가설들 및 의견들과 마찬가지로 상부구조의 일부이다”라고 언급한다. A.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London, 1971. p. 465.
이것은 이중의 붕괴, 즉 과학의 자동적 차원의 타동적 차원으로의 붕괴와 과학의 내재적 측면의 외재적 측면으로의 붕괴를 요약하고 있다. 첫 번째 측면에서 그람시의 언급은 푸르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한 가지 조롱, 즉 “그는 진정한 관념론자답게 혈액의 순환은 하비의 혈액순환 이론의 결과라고 의심 없이 믿는다”는 조롱을 상기시킨다. Marx, Poverty of Philosophy, 2장 3절을 볼 것.
인간 지식의 역사성(과 그 대상들의 독특한 역사성)―그람시가 매우 적절하게 강조하고자 하는―은 그 대상들의 타자성(과 그것들의 역사성)이라는 개념을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에 실질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루카치, 그람시, 코르쉬 모두 엥겔스식의 온갖 자연변증법을 기각한다. 그러나 루카치는 이원론적이고 낭만주의적인 반자연주의를 선호하면서 그렇게 하는 반면, 그람시와 코르쉬는 역사화된 인격적 일원론을 선호하면서 그렇게 한다. 루카치는 원래의 주체와 소외된 객체의 재통합 과정으로 파악되는 변증법이 오직 사회 세계에만 적용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그람시와 코르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은 인간 역사의 일부이며 따라서 변증법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람시의 성취된 (있음󰠏앎) 동일성 이론에서는 자동성이 완전히 사라진 반면, 루카치의 이론에 따르면 동일성은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역사의 산물이며 자동성은 두 가지 모습으로, 즉 (i) 인간 해방의 변증법에 필수적이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는, 인식적으로 비활동적인 자연으로 그리고 (ii) 인간 역사에서 소외의 영역, 즉 프롤레타리아의 자기의식의 성취에 선행하는 영역으로 남아 있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아도르노, 마르쿠제와 (제2세대인) 하버마스 및 그의 동료의 ‘비판 이론’의 주요한 인식론적 주제는, (1) 루카치적 마르크스주의의 절대적 역사주의에 대한 수정과 이론의 상대적 자율성에 대한 갱신된 강조, (2)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의 노동 개념에 대한 비판, 그리고 (3) 객관주의와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의 강조이다.
(1)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에 대한 점진적 탈중심화를 수반하며, 궁극적으로 역사적 근거를 가진 모든 해방 주체의 상실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그러므로 (청년 헤겔주의자들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혁명적 이론은 (계급의 표현이 아니라) 개인들의 속성으로 간주되며, 피히테적J. G. Fichtean ‘당위’Sollen로서 규범적 평면으로 추방된다. 이에 따른 이론과 실천의 분열―“비판적 사회 이론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간격을 연결할 수 있는 개념을 갖지 않고, 이를 약속하지도 그 성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는 마르쿠제의 진술에서 날카롭게 표현되는 H. Marcuse, One-Dimensional Man, London, 1968, p. 257.
―은 비관주의와 심판주의를 강조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자본주의, 과학, 기술, 분석적 사유 등에 대한 비판 이론의 총체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낭만주의적이며 비변증법적인―와 결합하여 그것의 사회 이론―(역사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식론의 진정한 보고로 간주되는―을 마르크스의 사회이론에서 상당히 먼 곳에 위치시킨다. 또한 이것을 통해 비판 이론은 마르크스 자신의 낙관적 합리주의와 프로메테우스주의가 모호하게 만든 문제들을 조명할 수 있었다.
(2) 호르크하이머의 “전통 이론과 비판 이론” M. Horkheimer, Eclipse of Reason, Oxford, 1974.
에서 하버마스의 󰡔지식과 인간의 이해관심󰡕 J. Habermas,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London, 1971.
에 이르기까지, 비판 이론은 해방적 이성과 순전히 기술적 또는 도구적 이성을 핵심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노동을 강조하고 자연을 순전히 인간 착취의 대상으로 개념화하는 마르크스와 점점 더 대립적이 되었다. 그러므로 마르쿠제는 해방된 사회를, 필요노동을 합리적으로 규제하거나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회가 아니라 감각적인 리비도의 놀이 속에서의 노동 자체의 승화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라고 파악한다. H. Marcuse, Eros and Civilization, Boston, 1955.
하버마스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구별하면서 노동과 상호 작용의 차이를 인식했지만 그 자신의 실천을 실증주의적인 방식으로 잘못 해석했으며, 이로 인해 인류의 자기 형성을 노동으로 환원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노동을 단순히 기술적 행위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에서 그리고 그 사회를 통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실증주의적 해석에 따라 노동(그것을 기술적 행위로 규정함으로써)과 자연과학(법칙연역적 모델로 적절하게 대변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을 잘못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채택한 사람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바로 하버마스라고 주장할 수 있다.
(3) 순전히 자연적인 과정의 결과로서의 인류라는 개념과, 인간의 활동 속에서 그리고 인간의 활동을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실재―자연을 포함하는―라는 개념을 결합하고자 하는 하버마스의 시도는 모든 초월적 실용주의의 이율배반을 잘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약 자연이 구성된 객관성이라는 초월적 지위를 갖는다면 그 자연은 구성하는 주체의 역사적 무대가 될 수 없고, 반대로 자연이 주체성의 역사적 무대라면 그 자연은 단순히 구성된 객관성일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다. T. McCarthy, The Critical Theory of Jürgen Habermas, London, 1978, p. 111.
자연은 그 자체이며, 우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아도르노가, 객관성을 주관성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잘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도르노는 서로 환원될 수 없는 한 쌍의 대립물을 어느 한쪽으로 환원하는 경향(예컨대, 의식을 존재로 환원하는 엥겔스적 마르크스주의의 경향이나, 존재를 의식으로 환원하는 루카치적 마르크스주의의 경향)을 제1철학―마르크스의 인식론을 포함하는―의 풍토병적인 결함으로 분리하고, T. Adorno, Negative Dialectics, London, 1966.
사유를 전제 가정 없는 토대에 기초 짓고자 하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여 모든 비판의 내재성을 옹호했다.
(i) 프롬Erich Fromm, 르페브르, 가로디Roger Garaudy, 헬러Agnes Heller, 톰슨E. P. Thompson 등과 같은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 (ii) 사르트르, 메롤로󰠏퐁티 등의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 (iii) 콜라코프스키, 샤프A. Schaff, 코직Karel Kosík 등의 동구 수정주의자들 그리고 (iv) 페트로비치G. Petrović, 마르코비치M. Marković, 스토야노비치S. Stojanović와 그들의 동료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의 실천Praxis 집단의 작업은 함께 다루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형성 과정과 주목하는 지점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 및 인간의 실천을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중심’ Praxis, vol. I, p. 64.
으로 새롭게 강조한다. 이 강조는 스탈린주의 시대에는 소실되었던 것으로, 분명히 󰡔경제학‧철학 수고󰡕에 크게(그리고 예컨대 코제브Alexandre Kojève와 이폴리트Jean Hyppolite 등이 제안한 헤겔의 󰡔현상학󰡕에 대한 새로운 인간주의적 읽기에 그보다는 적게) 힘입어 복구되었다. 이들의 견해에서 두 가지 점을 강조할 만하다. 첫째, 인간의 본성과 필요는, 역사적으로 매개된 것이지만, 무한하게 펼쳐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둘째, 경험적으로 주어진 인간만이 아니라 규범적으로 이상적인 인간―탈소외되고 총체화하며 자기 발전적이고 자유롭게 창조적이고 조화롭게 활동하는 인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분명히 마르크스로부터 포이에르바하로의 부분적 복귀를 나타낸다. 이 저자들 중, 사르트르의 저작은 역사를 개별 인간의 실천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이해하고자 한 가장 광범하고 지속적인 시도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지적했듯, 사르트르의 출발점은 논리적으로 그의 목표를 미리 배제한다. 즉 실질적인 변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특정의 맥락, 즉 사회관계들의 어떤 특수한 총체가 처음부터 개인의 상황의 구조 속에 내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설명 불가능한 독특성과 순환적 변증법과 추상적인 몰역사적 일반성의 조건(‘희소성’으로부터 ‘실천적󰠏불활성’practico-inert까지의)이 있을 뿐이다.
대체로 루카치부터 사르트르까지 반자연주의적인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존재론적 구조나 경험적 확인의 문제에 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편향성은 알튀세르와 다른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예컨대, 고들리에 등의―의 과학적 합리주의와 델라 볼페와 콜레티의 과학적 경험주의 및 신칸트주의에 의해 정정되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발리바르Etienne Balibar와 함께 쓴) 󰡔자본을 읽는다󰡕에서 가장 날카롭게 (1)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새로운 반反경험주의적이고 반역사주의적인 견해와 (2) 외부적 측면의 붕괴와 결합한 인식론 비판의 기초(‘이론주의’) 그리고 (3) 과학철학자 바슐라르와 메타심리학자 라캉Jacque lacan의 영향을 받은 일종의 과학적 합리주의―자동적 차원을 실질적으로 무효화하고 잠재적인 관념론을 결과하는―를 정식화했다.
(1) 알튀세르는 한편으로 구조와 복합성이라는 개념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환원 불가능한 사회성이라는 개념을 (사회적 총체성에 대해 중층결정적인 것이며 탈중심화된 복합적인 것이며 이미 주어진 총체적인 것이며 지배 속에 구조 지어진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다시 주장한다. 경험주의에 반대하여, 사회적 총체성은 전체적이고 구조 지어진 것이며, 그것의 인과성 형태는 뉴턴적(기계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역사주의와 전체론에 반대하여, 사회적 총체성은 복합적이고 중층결정적인 것이며, ‘표출적 총체성’―‘본질적 절단’이 가능하거나 동질적 시간성을 특징으로 하는―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것의 인과성의 형태는 라이프니츠적(표출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관념론에 반대하여 사회적 총체성은 이미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인간주의에 반대하여 그것의 요소들은 개인들이 아니라 구조들과 관계들이며 개인들은 단지 이것들의 점유자들이나 담지자들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알튀세르는 사회학적 절충주의에 반대하여 총체성은 지배적인 것이 있게 구조 지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하지만 그 자신의 적극적인 구조적 인과성 개념을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2) 알튀세르는 과학성의 기준은 문제의 과학에 완전히 내재해 있다고 주장하면서 철학을 과학으로 환원하는 것, 또는 그 역에 반대하지만, 철학 (그 자신의 것을 포함한)에 아무런 명확한 역할도 부여하지 않는다. 특히,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구분 기준이나 과학이라고 지칭되는 실천에 대한 비판의 가능성은 배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들을 위한 인식론적 자율성은 과학들의 역사적 자율성을 수반하고 뒷받침한다. 역사적 과정으로부터 과학의 탈구는 과학 속의 이데올로기(신비화나 허위의식으로 이해되는)의 불가피성을 전제하고 함축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견해와는 배치되는 견해이다.
(3) 알튀세르는 실재와 사유의 구별을 강조하지만, 실재는 그의 체계 속의 개념을 준準칸트적으로 한계 짓는 기능만을 수행하며, 그러므로 그의 체계는 예컨대 ‘담론 이론’에서처럼 자동적 차원을 완전히 내던져 버리고 쉽게 관념론으로 퇴화한다. 알튀세르는 헤겔이 아니라 스피노자를 마르크스의 진정한 선구자로 해석하는 데, 이 때문에 수학, 즉 명백히 선험적인 학문이 그의 과학 패러다임이 된다. 여기서는 개념들의 준거와 감각 사이의 구별 그리고 자료의 이론 의존성과 자료에 의한 이론의 결정 사이의 구별이 불분명해질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알튀세르는 실천과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대가로 치르고 구조를 구입하기 때문에 경험을 대가로 치르고 이론을 구입하는 경향을 보인다.
루카치가 마르크스주의 내의 헤겔적 경향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표현한다면, 델라 볼페는 실증주의적 주제들을 가장 정확하게 뽑아낸다. 그의 중요한 저작 󰡔실증과학으로서의 논리학󰡕Logic as Positive Science의 목표는 역사적 유물론을, 구체적인 경험 지향의 연구 도구로 복원하는 것이며, 유물론적 사회학이나 ‘도덕적 갈릴레오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옹호하는 것이다. 델라 볼페는 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을,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비판으로부터 칸트의 라이프니츠 비판까지 펼쳐지는 선험적 이성에 대한 유물론적 비판 노선의 역사적 절정으로 자리 매김한다. 그 속에서 마르크스는, ‘비규정적 추상’을 담고 있는 헤겔 변증법의 추상󰠏구체󰠏추상(A󰠏C󰠏A) 순환을, ‘규정적 합리적 추상’을 담고 있는 유물론적 인식론의 구체󰠏추상󰠏구체(C󰠏A󰠏C, 더 정확하게는 C󰠏A󰠏C´) 순환으로 대체하며, 그러므로 “근본 원리hypostasis로부터 가설hypothesis로의, 즉 선험적 주장으로부터 실험적 예측으로의” 전환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G. Della Volpe, Logic as Positive Science, London, 1980, p. 198.
“지식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지식이라면 어느 것이나 과학이며,” Della Volpe, Rousseau and Marx, London, 1978, p. 200.
언제나 과학은 이러한 틀―마르크스가 󰡔강요󰡕 서론에서 상술했다고 지적되는, 그리고 델라 볼페의 해석에 따르면 밀, 제본스Jevons, 포퍼 등의 가설󰠏연역적 방법과 유사한 것으로 요약되는―을 지켜야 한다.
여기서는 델라 볼페의 재구성이 갖는 문제점들 가운데 네 가지만 살펴볼 것이다. (1) 그것은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과 철학에도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상정된다. 결말은, 학문 분과들 안에서의 그리고 학문 분과들을 가로지르는 일원론적이고 연속주의적인 과학관에 사로잡힌, 그리고 마르크스의 발전 개념을 직선적이고 연속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사회과학에 대한 초자연주의적인 해석과 실증주의적󰠏예측주의적 철학 개념이다. (2) C󰠏A󰠏C 순환은 여러 이론적 이데올로기들에서도 똑같이 잘 작동하는 순전히 형식적인 절차이다. (3) 델라 볼페는 역사적 원인들과 이론적 선례들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는다. 그의 저작에서는 숨은 역사주의가 드러난 실증주의를 지탱하고 있다. (4) 가장 중요한 것으로, C󰠏A󰠏C´ 모델에 대한 정의에 결정적인 모호함이 있다. ‘C’는 개념화된 문제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구체적 객체를 가리키는가? 즉 그 순환은 무지로부터 지식으로의 이행을 서술하는가 아니면 존재로부터 지식으로의 이행을 서술하는가? 그것이 두 가지 모두를 서술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결과되는 경험적 실재론은, 타동적 차원과 자동적 차원을 결합시키고자 하면서 실재를 탈脫층화하고 지식을 탈역사화한다. ‘A’는 마르크스와 초월적 실재론에서처럼 실재하는 어떤 것과 관련되는가, 아니면 초월적 관념론과 실용주의에서처럼 단순히 관념적인 것과 관련되는가? 마지막으로 ‘C´’는 (i) 서술을 가리키는가, (ii) 시험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iii) 응용을 가리키는가? (i)과 (ii)의 구별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서술 순서와 탐구 순서 사이의 구별이고, (ii)와 (iii) 사이의 구별은 이론적 활동과 응용적 활동 사이의 구별이며, (i)과 (iii) 사이의 구별은 󰡔자본󰡕에서 상술된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제 가정들의 위계와 일정한 역사적 국면들(󰡔강요󰡕 서론에서 말하는 ‘다양한 결정관계들의 종합’)에 대한 분석의 종류―마르크스가 󰡔안개월 18일󰡕18th Brumaire나 󰡔프랑스 내전󰡕The Civil War in France에서 시도한―사이의 구별이다.
델라 볼페 학파의 가장 유명한 구성원인 콜레티는 변증법은 어느 것이거나 유물론을 배제한다고 주장하면서 델라 볼페의 제한적인 변증법, 즉 순전히 인식론적인 변증법조차도 기각했으며, 델라 볼페의 초자연주의적인 마르크스 재구성에 대해서는 그것이 물상화와 소외라는 비판적 주제들을 생략했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콜레티는 이러한 주제들을 그 자신의 층화되지 않은 경험적 실재론적 존재론 그리고 존재자 이외의 것으로서의 사유라는 개념과 조화시키는 데 막대한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실증적 차원과 비판적 차원 사이의 분열을 받아들였고, 이것에 의해 결국에는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격렬하게 포기했으며 그에 앞서 과학적 비판의 개념을 포기했다. 콜레티의 저작에는, 하버마스나 알튀세르의 저작과 마찬가지로(아마도 이 세 사람은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에 관한 근래의 저자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광범한 이원론이 자리하고 있다. 진리로서의 사유와 상황적인 것으로서의 사유 사이의 이원론, 어떤 물자체로서의 객관성과 주체의 객관화로서의 객관성 사이의 이원론,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다른 종들과 구별되는 종으로서의 인간 사이의 이원론 등이 그것이다. 콜레티의 저작은 이탈리아에서 (예컨대 팀파나로에 의해) 유물론의 존재론적 측면을 무시한다고 비판받았지만, 알튀세르적 경향과 델라 볼페적 경향은 일반적으로 지식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과학적 실재론적 재구성의 공격을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지식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긴장이 남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 이외의 과학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적절한 인식론이라면 어느 것이거나 그것의 고유한 경계 영역은 마르크스주의보다 훨씬 더 넓을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과학이 결코 유일한 종류의 사회적 실천은 아니며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가 훨씬 더 큰 외연적 범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포섭되는 (마르크스주의적 인식론의 개념 안에서, 인식론은 비판적으로 사용되게 되고 마르크스주의는 자신이 추방하는 논거를 추종하는 것처럼) 경향은 언제나 나타날 것이다.로티,실재론,자유라는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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