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책 처음으로 | 사전 | 자유게시판 | 회원자료 | 로그인

 

       ■ 의견바로가기

[노동운동] ()

한국의 근대적 산업노동은 19세기 말의 개항장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그후 광산지대 · 운수 · 제조부문 등 각 산업분야로 확산되어갔다. 통계에 따르면 주요 산업부문의 노동자 수는 1911년에 6만 6천 명에 불과하던 것이 1942년에는 광공업 노동자 수만도 약 74만 4천명이 되었으며, 1944년 말에 全산업의 노동자 수는 200만 명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이같은 산업노동자의 급격한 수요 증가 구조는 특히 1920년대 이후의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공업화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공급원은 일반적으로 농촌의 몰락농민이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무력을 배경으로 그들의 식량 및 원료공급지 · 상품시장 · 자본수출시장으로 삼았다. 우선 그 당시 조선의 기본적 생산수단이었던 토지를 토지조사사업을 비롯한 각종 수법으로 약탈하여 고율의 소작료를 받아내는 등 조선 농촌을 반봉건적인 농촌으로 재편성하였다. 이러한 농촌경제에 대한 화폐경제의 침투는 농촌의 몰락을 더욱 더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 전국 경작지의 절반 이상이 총 농가호수의 4%도 못되는 지주의 수중에 들어가고 소작농이나 매우 적은 토지밖에 소유하지 않은 빈농은 농가호수의 80%에 달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극도로 궁핍한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 산업노동자의 창출원이 되거나 일본,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이주해야 했다. 따라서 1920년대의 임금노동자들은 본질적으로 반일세력일 수 밖에 없었으며, 3 · 1운동 때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시위에 참가한 것도 거기에 까닭이 있었다.
(1) 3 · 1운동은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사상의 보급과 더불어 1920년대 노동운동의 성장을 가져다 준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1920년대의 노동운동은 그 이전보다 조직성과 정치성을 강하게 띠어갔다. 1920년에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가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조선에서 최초로 조직된 대규모적인 노동단체이긴 하지만 노동운동을 위한 단체라기보다는 노사협조적인 사회개량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기존의 노동단체나 신설된 노동단체들이 지부의 형식으로 가입함으로써 전국에 15개소의 지부와 1만 5천여 명에 달하는 회원을 가진 전국적인 노동자 조직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초기의 사회개량적인 성격도 점차 변화되어 노동자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화 확산되어 갔다. 일제의 통계에서 보더라도 1925년의 경우 노동단체의 수는 128개에 달하고 있다. 게다가 1924년에는 노동운동의 성장과 각지에 있어서 노동, 농민단체의 통합을 향한 열기를 반영하여 전국적인 노동자, 농민단체로 조선노농총동맹이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약 60여 개에 달하는 노동자, 농민단체가 포함되었으며, 그 회원수는 약 4만에 달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노동공제회의 강령이 “조선노동사회의 개조”를 애매하게 명시했던 데 반해 조선노농총동맹의 강령은 “노동자 · 농민계급의 해방”, “완전한 신사회건설”, “자본가계급과의 철저한 투쟁”, “노동자, 농민계급의 복리증진 및 경제적 향상” 등을 선언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그만큼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성장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조직의 발전은 노동운동의 성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920년부터 1930년 사이에 총 891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하고 조선인 노동자만도 73,450명이 참가한 것은 이 시기 노동운동의 성장을 말해 준다. 이 중 대표적인 노동쟁의의 사례만을 본다면 다음과 같다.
1921년 9월 부산에서 부두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운수관계 노동자 5,000여 명의 스트라이크가 일어났다.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파업은 조선에서는 규모면에서 초유의 것이었다. 이 파업에서 1,000여 명의 부두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운수 각 부문의 노동자와 그 밖의 공장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15일에 걸친 투쟁 끝에 10〜15%의 임금인상에 성공했다. 이들이 보여준 단결력과 인내성은 다른 노동자들에도 영향을 끼쳐 10월에는 부산의 절영도에 있는 각 공장노동자 800여 명이 임금인상을 걸고 싸웠으며 11월에는 부산과 목포의 도자기공장 노동자들도 파업을 단행했다.
1922년에는 부산방적공장의 노동자들과 대구조면공장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 더우기 1922년부터는 매년 메이데이(세계노동자의 날 : 5월 1일) 기념시위도 전개되어 노동운동이 상당한 조직성과 체계성을 띠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노동운동은 1923년부터는 한층 급속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경성고무공장의 여성노동자 260여 명이 임금인상과 대우개선을 요구하면서 쟁의를 일으킨 것을 시발로 하여 평양양말공장 노동자 1,000여 명도 조선인 공장주에 반대하는 쟁의와 시위를 일으켰다. 또 이 해에는 부산의 조선방직 노동자 1,700여 명, 군산의 정미공장 노동자 300여 명, 인천의 가등(加藤)정미공장 노동자를 위시한 정미공장 노동자 1,500여 명의 쟁의가 일어났다. 갈수록 쟁의는 더욱 빈번해지고 대규모적인 것으로 발전했다.
1924년에는 평양인쇄공장 노동자 600여 명이 임금인상과 단체교섭권을 요구하면서 쟁의에 돌입했고 군산에서는 정미공장 노동자와 부두노동자들이 일본인 자본가의 가혹한 착취에 반대하면서 파업에 돌입하자 정미공장의 노동자들이 동정파업을 일으킴으로써 노동자들 간의 연대성을 과시한 최초의 사례가 된다. 1924년에는 이밖에도 무수한 파업이 있었다. 일본경찰은 처음부터 어떤 파업이든지 적극적으로 간섭하여 노골적인 탄압수단을 휘둘렀으며, 그때 마다 무수한 노동자들이 연행 혹은 검거당했다. 그러나 쟁의의 불길은 점차 번져갔고 그 투쟁 형태도 철저성을 더해 갔다.
1925년 서울전차노동자 500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일본경찰의 악랄한 탄압을 막기 위해 전투적인 지도부를 구성하여 조직적인 지도하에 장기 투쟁을 전개했다. 또 이들은 격문을 인쇄, 배포해서 시위를 선동하는 등 일보전진한 투쟁형태를 취했다. 평양양말공장 노동자 1,000여 명도 재차 공장주의 탄압에 반대하여 파업을 단행했다. 공장주가 일본경찰을 동원하여 파업지도자를 검거하자 노동자들은 대거 경찰서로 몰려가 검거된 간부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는 등 결연히 싸워 드디어 요구조건의 거의 전부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이 해에는 평양의 20여 개소의 인쇄공장 노동자 600여 명도 재차 파업에 들어갔는데 이들은 일반적인 경제적 요구를 계속 주장하는 외에도 8시간 노동제의 실시와 단체계약권의 확립 등 정치적으로 훨씬 발전된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1925년에 일어난 노동쟁의는 이 외에도 수없이 많다. 일제가 조사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1920〜1925년 사이에 335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2만 8,291명의 노동자가 여기에 참가했다. 이 기간 중 노동자 100여 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만도 약 100건에 달했다. 이처럼 1920년대 전반기는 조선의 노동운동 사상으로는 초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투쟁 양태에서는 자연발생적인 단계를 넘어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단계로까지 진전하는 놀라운 발전을 보였다.
노동운동의 성장은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 더욱 뚜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노동운동만이 아니라 농민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여 1925년 11월 조선노농총동맹에서는 노동단체와 농민단체를 따로 조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의, 각 지방의 조직개편사업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일제의 전국대회 방해로 인하여 1927년에 가서야 조직적으로 조선 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 총동맹의 완전한 분리가 결정된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노농 미분리의 혼합적 형태를 벗어나서 노동자들만의 단일한 전국적 조직이 형성되게 되었으며 보다 높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심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서는 지역별 · 산업별 노동조합 연합체가 나타남으로써 노동운동의 조직적 심화가 더욱 진전된 모습을 보인다.
1920년대 후반기의 노동쟁의는 1926년에 81건, 27년에는 94건, 28년에는 119건, 29년에는 102건에 달하고 있다. 이 시기의 노동운동은 1920년대 전반기에 비해 사회주의자 및 노동단체들의 활동이 눈에 띄며 노동자들의 단결력도 훨씬 강화되었다. 또 요구조건도 8시간 노동제의 실시를 비롯해 상당히 선진적인 요구를 내걸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광산지역에서의 투쟁이 활성화됨에 따라 남쪽에 치중되어 있던 지역적인 편재성도 거의 없어졌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싸움 중에서 경성방적공장과 영흥흑연광산, 원산노동자들의 파업은 대표적인 것이다. 1926년 5월 노동조합의 간부 7명에 대한 회사 측의 부당해고를 계기로 파업에 들어간 경성방적 노동자 360여 명은 조합간부의 복직, 임금인상, 임금의 정당한 지불과 벌금제의 폐지, 악질감독의 추방 등을 요구조건으로 걸고 싸웠다. 노동자들은 공장점거까지도 감행하면서 끝까지 싸워 결국 대부분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었다.
1927년 10월부터 12월에 걸쳐서 장기간 쟁의를 일으켰던 함경남도 영흥흑연광산노동자 300여 명은 8시간 노동제의 실시, 임금인상, 대우개선 등의 요구조건을 걸고 쟁의를 시작했다. 경찰이 파업지도자와 노동자들을 다수 검거하고 회사측에서도 다른 지방에서 노동자를 신규모집해서 파업을 파괴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최후까지 굽히지 않고 몇 차례의 대중집회와 시위를 단행했다. 여기에 대해서 다른 부분에 종사하는 영흥군의 노동자 400여 명도 동정파업에 들어가 흑연광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결국 이 쟁의도 노동자들의 승리로 돌아가 요구조건의 대부분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1928년에서 1929년의 장기간에 걸쳐 원산의 全노동자가 파업을 단행하며 싸운 원산노동자 총파업은 조선 노동운동 사상 빛나는 업적이 되고 있다. 투쟁은 1928년 9월 문평석유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일본인 감독의 폭행을 계기로 분연히 일어선 파업노동자들은 열악한 생활조건을 개선해 줄 것을 강경하게 주장했다. 이에 대해 회사측은 요구조건의 대부분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지 3개월이 지나도 회사측은 아무런 회답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일에 관해 문평노동조합의 단체 교섭권까지 부인했다. 회사측의 비열한 태도에 격분한 300여 명의 문평석유공장 노동자는 1929년 1월 14일 최저임금제의 확립, 8시간 노동제의 실시, 단체 계약권의 확립, 지배인의 파면, 대우개선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재차 파업을 단행했다.
문평석유 노동자들의 이같은 전투적 기세를 본 원산노동연합회는 즉시 산하의 노동조합들에 대해서 이들에 호응하여 파업을 단행하라는 지시를 보내는 한편, 조선 각지의 사회단체 및 노동대중에게 이 파업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여기에 대해서 각 산업부문의 노동자들은 “외국자본의 착취를 몰아내자”, “단결은 우리들의 무기다” 등의 슬로건을 걸고 여기에 호응했다. 그날 당장 국제통운회사 노동자들이 파업에 호응한 것을 시발로 하여 1월 21일까지에는 원산노동연합회 산하의 24개 노동조합의 노동자 전원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제 한 공장에서 시작되었던 파업은 대규모적인 총파업으로 발전되어 간 것이다.
한편 파업을 벌이고 있던 노동자들은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면서 훨씬 장기적인 투쟁을 결의하게 된다. 그래서 파업지도부의 지도하에 식량과 자금의 모금활동, 저축활동을 전개해 내부의 단결을 높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원산 총파업은 처음부터 전국 각지의 노동자 · 농민의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다수의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기타 사회단체들이 파업 중의 노동자들에게 격려문과 투쟁자금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원산 부근의 농민들은 식량과 땔감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일제는 한층 더 많은 경관 · 재향군인 · 소방대 · 청년단 등을 동원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여 파업을 파괴하려 했다. 무장한 300여 명의 일본경관은 원산 시내를 포위하고 원산노동연맹과 파업단본부 등을 습격하여 간부와 선진적 노동자들을 대량 검거함과 함께 파업중의 노동자들과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시켰다. 또 이들은 함남노동회라는 폭력단체를 조직하여 파업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원산노동 연합회와 파업지도부를 파괴했다. 그리고 타협적인 노동자들을 지도부에 침투시켜 파업의 파괴를 획책했다. 이 때문에 원산노동연합회는 그 이후 개량주의적 타협분자가 지도권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지도력을 크게 상실했다. 이 와중에서도 일제의 노골적인 탄압과 함남노동회의 폭력행위에 격분한 파업노동자들은 4월 1일, 함남노동회를 습격하였고 사태는 폭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선진적 노동자와 지도간부에 대한 일본경찰의 계속된 검거와 장기간에 걸친 투쟁으로 파업자금과 식량이 점차 떨어져 갔다. 원산노동자들이 약 3개월간에 걸쳐 완강한 투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잔혹한 탄압, 혁명적인 지도부의 결여, 원산노동연합회의 개량주의적인 타협 노선으로의 선회, 극도의 기아 등등 불리한 여러 조건으로 인해 결국 이 총파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산총파업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을이만큼 장기적이고 대규모적인 투쟁으로서 조선 노동자들의 용감성과 높은 단결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이 투쟁은 노동자들이 제국주의와 맞싸울 수 있는 주요한 세력임을 보여주었고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많은 경험과 교훈을 주고 심대한 영향을 미쳐 일제하 노동운동에 있어서 기념비적 사건이 되었다.
원산총파업으로 정점에 달한 1920년대 노동운동의 전반적 특징은, ① 초기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양 · 질적 면에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는 점 ② 쟁의의 주요동기는 식민지공업의 노동조건의 열악성에 기인하고 있었으므로 임금인상, 대우개선 등의 경제적 동기에 의한 것이 많다는 점 ③ 경제적 동기에서 시작했지만 쟁의의 과정에서 정치적 요구를 내걸음으로써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다는 점 ④ 식민지적 산업구조에 대한 저항이 노동운동의 주요배경이었을 뿐 아니라 쟁의의 주요대상이 일본인 자본가, 조선인 매판자본가였고 쟁의과정에서는 일본경찰과 대결함으로써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졌다는 점 ⑤ 일찍부터 노동단체들이 발전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후의 조선의 노동운동은, 1929년 세계대공황의 파급과 원산총파업의 영향을 받아 일층 발전된 모습을 띠게 된다.
(2) 1930년대에 들어서 항일민족운동의 일반적인 저하현상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갔다. 그것은 한반도를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으려는 일제의 정책에 따라 대규모 군수공장이 건설되면서 노동자계층의 양적 증대와 이농(離農)인구의 급증에 따른 것이었다. 1930〜36년 사이 공장노동자 수는 106,000여 명에서 2,007,000여 명으로, 광산노동자는 35,000여 명에서 161,000여 명으로 급격하게 증대했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투쟁은 훨씬 조직적이며 치열한 모습을 띠고 나타났다. 산업중심지에서는 계속해서 동맹파업이 일어났고 싸움은 비합법적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동맹파업은 소위 산업합리화라는 슬로건 하에 자행된 강제적인 임금인하, 유례가 없는 노동강화, 전쟁 수행을 위한 각종 부담금의 강제징수에서 직접적으로 촉발된 것이 많았다. 아무리 전시체제라고 해도 노동자들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정치 · 경제적 불만은 어떤 힘으로도 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1931년에서 1936년 사이에 일어난 주요한 파업건수는 1,040건에 달했으며 79,175명의 노동자가 참여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931년 1월에는 대구 26개소의 정미공장 노동자 1,600여 명과 운수노동자 1,000여 명이 파업을 단행했고, 함홍에서도 제사공장 노동자 600여 명이 파업을 일으켰다(이 제사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은 1934년까지 매년 일어났다). 5월에는 평양 평원(平元)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과 데모, 청진 · 원산 · 북청 · 김해 등지에서의 메이데이 시위, 6월에는 경성방직공장 노동자 400여 명의 파업과 공장 점거, 인천의 각 정미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노동쟁의는 점차 격렬한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 맞서기 위해 노동자들이 자기방어 태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2년 1월에는 청진 부두노동자 600여 명이 파업을 단행하고 결국 폭동화되었다. 5월에는 인천 조선성냥회사 400여 명의 노동자가 임금 5할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돌입하였으며 이들은 공장을 점거하면서 싸움을 전개했다. 이후에는 서울 · 함흥 · 광주 · 대전 · 청주의 제사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각각 잇따랐다. 1933년에도 부산 조선방직공장 노동자, 서울 편창(片倉)제사공장 노동자,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 함흥 제사공장 노동자, 서울 소화제사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6개소의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도 단행되었다.
1934년 역시 함흥 편창제사, 서울 편창제사 등 제사공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파업이 연속 일어났고, 함흥제련소 노동자들과 신의주 왕자제지공장 노동자들의 파업도 있었다. 1935년에 일어난 평양 세창고무, 의주 금광노동자, 일본광업주식회사, 남포제련소 노동자, 인천 부두노동자, 부산 삼화고무 노동자들의 파업 역시 대규모적이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36년에도 부산 항만노동자, 신흥 탄광노동자, 광주 방직공장 노동자, 대전 제사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이와 동시에 1930년대 전반기에는 대규모 산업시설이 있던 청진 · 원산 · 함흥 · 흥남 · 서울 · 인천 · 평양 · 부산 등에서는 일부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에 의해서 혁명적 노동조합(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즉 이 시기에 노동조합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1931〜35년간에 좌익노동조합운동으로 검거된 건수는 70여 건, 투옥된 관계자는 1,759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8시간 노동제의 실시, 단체계약권 확립, 최저임금제의 확립,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제의 실시, 피검거자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싸움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런 지하노동운동을 비롯한 전반적인 노동운동은 1936년 이후에는 점차 침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파업, 시위를 불문하고 철저하게 탄압하는 일제의 무력 앞에서, 노동쟁의의 회수는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제의 파쇼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이의 제압책이 무자비하여져갔기 때문이다.
1930년대의 노동운동 전반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코민테른의 프로핀테른이 채택한 조선 노동조합운동에 관한 「9월테제」(1930.9)와 범태평양노동조합의 「10월통신」(1931.10)이었다 할 수 있다. 이 테제와 통신은 노동운동 수난기의 타개책으로서 파벌의 극복, 노동운동의 정치투쟁으로의 발전, 일본 및 중국 노동운동과의 연결, 민족개량주의 반대, 산업별 조직과 공장 중심의 노동조합 활동 등을 제시했다. 이들 방법론의 영향과 일제의 강화된 탄압 때문에 1930년대의 노동운동은 폭력화하는 경우가 많아져 갔고 또 공산당 재건운동과 깊이 연결되면서 비합법적인 적색 노동운동 중심으로 바뀌어 갔다. 특히 중일전쟁(1937) 이후부터 노동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발악적으로 강화되었지만 1937년부터 1940년까지의 4년 동안에 430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했고 2만 5천 명의 노동자들이 이에 참가했다.
■ 인접어

나철 羅喆 1863(철종 14)-1916
남궁억 南宮憶 1863(철종 14)~1939
남로당의 운동노선과 정치활동
남북한 단정(單政) 수립
남북협상
노동운동
농민운동
대한노총
사월혁명(4月革命)
사월혁명 4月革命
사회구성체 논쟁 社會構成體 論爭

뒤로
■ 의견

 



HOME - 후원방법 안내 - CMS후원신청 - 취지문 - 사용 도움말 - 회원탈퇴하기

2002 노동자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만들기 모임
120-702 서울시 중구 정동 22-2 경향신문 별관 202호 44
laborsbook@gmail.com
모바일버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