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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과 선사시대] (archaeology and prehistory)

노동과정과 사용가치 생산에 대한 마르크스의 유명한 분석은 고고학 자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자본론》, 제Ⅰ권, 제 Ⅱ부, 제 1절).

과거 노동 도구의 유물이 화석이 사라진 동물의 종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것처럼, 사회의 소멸된 경제형태의 연구에도 동일한 중요성을 갖는다. 다양한 경제적 시기 구분들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만들어진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가 어떻게 , 어떠한 기구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는가에 의해서이다. 노동 도구는 인간의 노동이 도달할 수 있는 발전 정도의 기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노동이 수행되는 사회적 조건의 표지판이다.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 인용된 이 문구는 소련의 고고학 연구에 역사적 유물론을 적용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Artsikhovskii, 1973), 서구 고고학계의 고든 차일드[V.Gordon Childe]의 초기 선사학에 통합되었다(1947, pp.18, 26-7). 그러나 고고학과 선사시대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지식은 고작 석기는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며, 유물은 아시아적 사회에서 관개제도의 중요성이 고증된 근동의 황야지역에서 발굴되었다는 일반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1853년 6월 6일;→아시아적 사회). 마르크스는 스칸디나비아인이 고고학 연구의 개척자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며(1868년 3월 14일), 선사시대의 발견과 구석기 시대와 같이 최근에 정의된 시대는 모건[Morgan]에 의해 발전된 사회 진화의 단계와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Krader, 1972, p.25)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원시인의 인종학적 해석과 그리스-로마의 역사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원시사회와 국가의 기원을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 예를 들면, 플레하노프의 《역사의 유물론적 개념》에서 고고학적 발견물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으며, 모든 인종은 유사한 사회발전 단계를 거친다는 단계론적 진화개념을 옹호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었다(→발전단계). 플레하노프는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은… 인간이 완전히 동물적인 삶을 벗어난 순간부터 이미 멀리 이동한 상태로… 발견되었으므로 “원시인”에 관한 우리의 관념은 단지 추측일 뿐이다’라고 썼다. 이러한 이야기는 고고학적 자료가 근본적으로 초기의 사회형태를 재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1세기 전에 선사학이란 ‘무용한 것에 관한 전적인 추측’이다 라고 한 존슨의 유명한 격언을 연상시킨다. 물론 사회 진화론이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저서들, 특히 엥겔스의 《가족의 기원》의 중요한 논제를 이루고 있지만, 주의깊게 읽어보면 선사학은 거의 전적으로 인종학적 연구와 역사 연구로부터 재구성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첫 구절이 ‘현존하는 모든 사회의 기록된(written) 역사는…’으로 읽도록 수정된 《공산당 선언》1888년 엥겔스의 영어판 주해).
에반스[Evans]가 크레타섬에서 청동기시대의 궁전을 발굴한 것과 같은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 세기가 바뀐 뒤에야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 고고학적 증거를 방기한 것을 설명하려는 것은 불충분하며 잘못된 것이다. 마르크와 엥겔스가 살아있는 동안 상형문자와 설형문자로 된 문서가 판독되었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유물이 발굴되었지만 실용성에 관련된 사회학 상의 원인과 초기 고고학의 구조상 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고고학적 유물에 관한 연구가 그 당시 고전어 교육의 일부가 되지 못했으며, 19세기의 고고학자들은 역사적 유물론의 주장자들의 흥미를 끌었던 사회 진화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유럽에서 고고학 연구의 중요한 동기는 민족주의의 성장이었다(Kristiansen, 1981, p.21). 반면에 근동지역에서 연구는 대체로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의 진화에 관한 흥미는 다윈에 의해서 자극되었지만 모르틸레[G. de Mortillet]와 같은 초기의 구석기 연구가들은 자연과학, 특히 지질학 교육을 받았으며, 선사학이 지구의 역사를 규정한 시기에 상응되는 일련의 연속적인 시기에서 사회적 과정이 아닌 자연적 과정으로 전개되기를 희망하였다. 고고학은 유한계급 구성원을 매혹시키는 낭만적 매력이 있었으며 (Daniel, 1976, p.113), 유물들은 도시지역이 아닌 농촌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접하기가 쉬웠으며 그들에게 발견되었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분류한 여러 단계의 경제 사회 구성체의 외관상의 엄밀성에 대한 고들리에[Godelier](1978)의 상상력 넘치는 설명과는 반대로, 고고학과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현실 사이의 커다란 간격은 그 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한 인식이 계급사회 출현에 관한 엥겔스의 논점을 수정시키거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본질과 보편성에 관한 초기의 논쟁에 변화를 주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회의를 가져오게 한다.
고고학은 러시아혁명 뒤 처음으로 소련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융합되었다 .1919년에 레닌은 소련의 유력한 고고학 연구소를 설립하였고, 20년대 후반에는 모스크바의 아르트시코프스키와 레닌그라드의 라프도니카스 같은 젊은 고고학자들이 고고학을 토대로 초기의 사회형태를 재구성할 가능성과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고고학 자료에 역사적 유물론의 원칙을 적용시키기 시작했던 유물문화 역사학회를 창설하였다(Masson, 1980). 20년대의 에피멘코 같은 소련의 고고학자는 3기 시대(석기-청동기-철기 시대) 분류법을 폐기하고 선사시대의 사회를 전(前)씨족기(dorodovoe obshchestvo), 이방인기 (rodovoe), 계급형성기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분류는 결국 차일드[Childe](1951, p. 30)에 의해서 비판되었으며, 1950년대 초 소련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단계론의 교조적 형태로 거부되었다. 중국에서는 중국이 언제 노예제에서 봉건제 사회로 넘어갔는지에 관한 문제에 일치된 견해가 없지만, 이러한 단계 구분이 아직도 중요시되고 있으며 연구의 촛점이 되고 있다(Chang, 1980, p.501). 중국에서 엄격히 학문적 배려 아래 공식화 된 고고학 연구 계획은 국가 부설 또는 지원 연구 계획과는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지 못한다. 구석기 시대 고고학이 독립적으로 유지되고, 오늘날에는 고생(古生)척추동물학 연구소와 중국 과학원(AS)의 고생 인류학회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지만, 주요 연구소인 중국 사회과학원(CASS)의 고고학 연구소는 소련을 모방하여 1950년대에 설립되었다.
서구의 고고학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관계없이 발전해왓다. 선사시대에 대한 민족주의적이고 인종 차별적이기까지 한 해석은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진행된 연구의 많은 부분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외국에서 행해진 대부분의 중요한 발굴 작업은 사재(私財)와 훌륭한 예술 작품을 복구하는 데 관심이 있는 박물관의 자금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근동지역에서 대도시의 중심부에 있는 대규모의 공공 건물-사원과 궁전-은 거의 독점적으로 발굴되었으며, 그러한 기념물을 건축하고 지탱해주었던 사회의 하부구조에 관한 자료는 거의 제공하지 못했다. 전체 사회가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알아볼 목적으로 진행된 정착지 유형 연구 또는 여러가지 형태들의 정착지-촌락, 성채, 특수 생산지 등-분포의 분석법은 1950년대 윌리[G.Willey]에 의해서 고고학의 한 연구과정으로 수구의 고고학계에 도입되었다. 이것은 이러한 연구 방법이 소비에트 중앙 아시아의 톨스토프[S.P. Tolstov]에 의해서 사용된 지 거의 15년이 지난 뒤였다.
오스트레일리아계 영국인 고고학자 차일드(1872-1967)는 서구에서 고고학적 자료를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에 통합시키려고 노력한 중요한 학자였다. 차일드는 고고학자료를 인종 차별을 위해서 악용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고 사회의 형태를 기술혁신과 관련지으려고 하였다. 그는 생산력에서 기술의 발전이나 향상이 자동적으로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회 진화를 고증하는 데는 불완전하긴 하지만 고고학적 기록이 민족지학(民族誌學)에서 도출한 일반적인 원칙이나 유추에 기초한 추측보다 나은 일차적 자료가 된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선행 인류로부터 인간이 출현한 뒤 인간의 필요물이 인간에게 생득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진화하였다. 그 진화는 그 과정의 다른 측면과 같이 비교 방법론과 역사적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된다.…그러므로 진화의 단계에서 어떠한 기술적 고안물이나 기술적 과정의 서열은 어떤 일반적 원칙에 의해서 추론될 수 없으며 고고학 자료에 의해서 추론되어야 한다. 정치적 혹은 윤리적 기준보다 기술적 기준이 가지는 하나의 이점은 고고학적 기록을 통해서 인간의 필요물을 더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차일드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용어-신석기 시대와 도시혁명-를 만들어내면서 선사시대의 사회 변화를 상상력에 의해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기술(記述)에 초점이 맞춰진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여러 사회가 한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진화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보다는 선사시대의 불연속적 단계들의 규정을 강조한 점이 비판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추상적 단계의 정적인 설명에 관한 관심이 몇몇 나라들,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명백히 규정한 고고학 연구를 아직도 지배하고 있다(Lorenzo, 1981, p.204).
서구의 고고학이 대체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는 별개로 발전했지만 선사시대의 유물들은-차일드의 통합을 통해서 처음으로 전해짐으로써-20세기 후반까지 사회진화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논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사회발전의 단계에 대한 논쟁(예를 들면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1962)들은 전통적으로 인정된 사회경제 구성체의 순서를 수정하거나 변화시키고, 원시 공산주의 개념을 정교화시킨 고고학 논문을 자주 인용한다. 선사시대의 유물은 인간이 존재한 시간대를 크게 확대시켰으며 사적 유물론의 창시자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전망을 열어 놓았다. 차일드에 따르면 유럽은 역사의 대부분을 근동의 이교도와 접하며 존재해 왔으며, 고대 근동을 특징짓는 정체된 절대 통치체제로 부터는 자유로웠으므로 이러한 관계는 유익했던 것으로 보여진다(Hobsbawm, 1964,p.254)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급사회는 선사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것,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에 2차 수정을 가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점일 것이다. 친족사회의 해체, 사회적 불평등의 시작, 그리고 국가의 기원은 고고학 자료를 참고로 하여 접근되어야 할 문제들이다.
동시에 서구 인류학(→인류학)에서 진화사상의 부활과 문화 현상에 대한 유물론적 이기도 하고 사회생태학적이기도 한 해석의 재현은 고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에서는 테일러같은 고고학자들이 ‘역사 이전의 유물 이면에 있는 인디언 사회를 밝히려고’(예를 들면 그 유물들이 만들어졌던 사회의 ‘전후 관계’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1960년대에는 ‘새로운 고고학’이 사회정치적으로 복잡한 단계들을 구분할 수 있는 고고학적 기준을 명확히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발전에 영향을 받은 고고학자들, 특히 아담스[R. McC. Adams](1966)같은 학자는 여러 지역의 진화과정을 비교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은연중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힘입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고, 고고학 연구의 궁극적 목적에 독자적 결론을 내리지만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좀더 실용적이고 단순하지 않은 과학관에 기초하고 있지만-1920년대에 소련의 고고학자들이 주창한 것과 유사하였다(Masson, 1980, p.20;Klejn, 1977, p.13)
과거 사회형태의 재구성과 그것들이 어떻게 진화되어 변화되었는가에 대한 해석은 현대 고고학 연구를 이끄는 보편적 목적이다. 최근 고고학 연구 방법의 향상-크로노미터 측정 기술의 도입, 선사시대 유물의 기원을 측정하기 위한 물리?화학 분석법의폭넓은 활용, 과거의 생존 범위를 직접적으로 고증해주는 동-식물 자료의 표준형태로의 복구, 그리고 지역적 정착지 유형 추정에 촛점을 두는 연구 방법 등-은 어떤 의미로는 차일드가 인식하지 못했던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가능하게 해준다. 오늘날의 길만[A. Gilman](1981)과 같은 서구의 일부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의 자료를 해석하는 데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을 창조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유물론자들은 사회적 갈등을 최소하시키고 선사시대를 인간이 특수한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형태, 혹은 박물학의 확대로만 다루려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초기의 도구에 대한 마르크스의 논의에 내재하고 있는 과거 사회형태의 재구성 가능성, 또는 고고학적 낙관론 현대의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실현되지는 않겠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거의 사회구성체와 그 사회의 생산관계를 중요하게 보는 선사시대에 관해 신뢰할 만한 종합적 연구서가 집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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