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Neigung )
인간을 어떤 행동으로 향하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 헤겔은 이 말을 초기 이래로 욕망(및 충동)과 병렬되는 것으로서 후자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한다. 다만 그것은 후자가 사변적인 의미도 지니는 것과는 달리 주로 감성적 의미에 한정된다. 다만 그와 같은 한정 속에서도 행위의 동기 일반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우선 칸트적 규정을 전제한다. 예를 들면 베른 시대에 그것은 기도와 대치된다. 즉 기도는 "경향의 모든 매력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도록 너희들을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채우는 신성한 것에 대한 생각에 의해서, 인간을 이곳저곳으로 몰아세우는 욕망을 넘어서서 너희들의 심정을 고양시키는 것"[『예수의 생애』-『초기신학논집』(놀)]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헤겔은 분명히 칸트적 입장에 서 있다. 이와 같이 그것은 이른바 '칸트주의'의 베른 시대부터 칸트를 전제하고 있다.
이에 반해 그것은 칸트적 규정을 넘어선 규정도 지닌다. 예를 들면 프랑크푸르트 시대에 그것은 도덕적인 계명에 대치되는 지조(Gesinnung) 또는 경향성(Geneigtheit)과 동일한 것으로서 나타난다. "예수는 계명에 지조를 대치시킨다. 즉 그와 같이 행위하는 경향성이다. 경향은 자기 속에 기초지어져 자기의 이상적인 객체를 자기 자신 속에 지니는 것이지 소원한 것(이성의 도덕법칙) 속에 지니는 것이 아니다"[『기독교의 정신』 기본원고 1. 301]. 여기서는 경향의 법칙과의 합치가 법칙의 "플레로마(πλήρωμα, 채움)"로 된다 [『기독교의 정신』 1. 326]. 여기서 칸트적 규정을 넘어선 규정이 보인다. 확실히 이것도 사랑에 의해서 완전하게 되어야만 하는 특수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사랑도 파토스적으로 보면 경향이기도 하다[같은 책 1. 362]. 즉 거기서는 자기 안에서 기초지어지는 한에서 행위의 주체적 측면으로서의 동기 일반이 파악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 '자연적인'이라고 형용되는 곳에서 보이는 것처럼 어디까지나 감성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으로서의 한정이 덧붙여져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체계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 용법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정감성의 이론에서 보이는 샤프츠버리 이래의 감성 중시 사조의 영향 아래 칸트적인 이원론을 넘어서고자 하는 헤겔의 입장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고즈 구니오(幸津國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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