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崔賢, 1907~82) (本)최득권] ()
(고려공청 만주총국 회원) 길림성(吉林省) 훈춘현(琿春縣)에서 독립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4년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만주총국 동만구역국(東滿區域局)의 성원으로서 자금 모집과 격문 살포에 종사했다. 1926년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연길(延吉)감옥에 수감되었으나, 군벌 장작림(張作霖)의 사면령에 따라 징역 6년으로 감형되었다. 옥중에서 반제동맹 지부를 건립하고 사상범의 탈옥 지원, 단식투쟁, 선전사업을 전개했다. 1932년 7월 만기출옥한 뒤 이름을 최현으로 고쳤고 8월 연길 반일유격대에 입대했다. 1933년 9월 오의성(吳義成)이 이끌던 길림구국군(救國軍) 부대, 한국독립군과 연합하여 동녕현성(東寧縣城)전투에 참전했다. 한때 민생단원이라는 혐의를 받아 직책을 잃고 연행되었으나 왕덕태(王德泰)의 도움으로 구제되었다. (항일연군 제1로군 제3방면군 제13단장) 1936년 3월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1사 제1단장이 되었고 1937년 3월 제2군 제4사 제1단장이 되었다. 5월 안도현(安圖縣)에서 토벌대 이도선(李道善)부대와 접전하여 전멸시켰다. 6월 김일성(金日成)부대와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전하여 보천보(普天堡)전투, 간삼봉(間三峯)전투를 치름으로써 국내외에 커다란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1938년 11월 유격대 편제가 재편됨에 따라 제1로군 제2방면군 제2군 제4사단장이 되었다. 1939년 8월 제1로군 제3방면군 제13단장이 되었다. 그해 말 일본군에 의해 현상금 1만엔이 걸렸으며, ‘사자’라는 은어로 지칭되었다. 1940년 1월 대수분하(大綏芬河) 북쪽에 밀영(密營)을 설치하고 소부대활동에 종사했다. 11월 소련 영내로 이동하여 블라지보스또끄 근처의 남야영(南野營, B야영)에 입소했다. 1941년 3월 남야영 당위원회 후보위원, 항일연군 교도려(敎導旅, 소련극동방면군 제88보병여단) 제1영 제1련장(連長)을 지냈다. 1942년 교도려 제2소대 소대장으로서 훈춘, 연길, 왕청(汪淸) 지방에서 정찰 임무에 종사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장) 1945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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