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한(崔益翰, 1897~?) (號)滄海] ()
(一月會 회원, 조공 일본부 조직부장) 강원도 울진에서 대지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최재소(崔在韶), 최학소(崔學韶)의 아버지, 이청원(李淸源)의 장인이다. 1909년 봉화에서 개최된 시회(詩會)에서 장원을 했고 1911년 이후 영남학파의 거두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5년간 수학했다. 1917년 서울 중동학교 중등과에 입학했고 1918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영어과에서 2년간 배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검거되어 1921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924년 징역 3년으로 감형되어 출옥했다.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과를 다녔다. 1925년 1월 사상단체 일월회에 가입했다. 1926년 모스끄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년 4월경 조공 일본부 조직부장이 되었고 같은 달 「이론투쟁」에 「사상단체 해체론」이란 글을 기고했다. (조공 선전부장) 1927년 6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 재일본조선무산청년동맹 대표로 참석하여 협의회 비상설론을 주장했다. 9월 조공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조직부장, 선전부장을 지냈다. 1928년 초 「조선일보」에 「l927년 조선 사회운동의 빛」을 연재했다. 2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30년 8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32년 7월 대전형무소로 이감 도중 대전역에서 “조공 만세” “조선민족해방운동 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인 죄로 징역 1년을 추가받았다. 1935년 출옥했다. 이후 국학 연구에 치중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잡지 「춘추(春秋)」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고 「유학사 개관」을 저술했다. 1940년까지 「동아일보」 직원으로 근무했다. 1941년부터 1944년 11월까지 일본경찰의 전직(轉職) 알선을 거절하고 가정용 주류(酒類)소매업에 종사했다. 1945년 여름 경성사상범보호관찰소 의용대(義勇隊) 부대장직을 맡을 것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했다. (근로인민당 중앙위원, 국학연구자) 1945년 8월 조공(장안파) 결성에 참여했고 9월 계동 열성자대회에 참석했다. 같은 달 건국준비위원회 조사부장, 조선인민공화국 법제국장으로 선출되었다. 10월 국민대회준비회 대표모임에 참석하여 중경(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성명서를 발표했다. 12월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 및 기획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1월 조공 대회파의 일원으로서 사회노동당 결성에 참여하여 감찰위원이 되었다. 1947년 5월 근로인민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해 「조선사회정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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