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옥(崔允鈺, 1892~?)] ()
(고려공청 중앙검사위원) 평남 덕천 출신으로, 흥덕(興德)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의명중학(義明中學)에서 2년간 수학했다. 서울 보성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21년 이래 평양에 거주하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평양지국 기자를 지냈다. 1922년 9월 평양노동동맹회 결성에 참여하고 간부가 되었다. 1923년 4월 평양양말직공조합 상담역이 되었고 5월 오윌청년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4년 1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노농대회 발기단체 총회에 평양노동동맹회, 평양양말직공조합 대표로 출석했다. 6월 평양노농연합회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이 되었다. 4월 고려공산청년회 결성대회에 참석하고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달 평양양말직공조합 파업 때 교섭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8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1925년 9월 서면투표에 의해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0월 평양노농연합회 부설 노동학원의 담임위원이 되었다. 1926년 3월 평양노농연합회를 평양노동연맹으로 개편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8월 대동강선운노동조합 상무위원이 되었다. 1927년 12월 신간회 평양지회 창립준비회 결성에 참여하고 설립대회에서 대표회원,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 시기 평양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성했다. 1929년 1월 신간회 평남도연합회 조직위원으로서 평양 ․ 안주 ․ 진남포 3개 지회를 망라한 도연합회 결성에 참여했다. 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8월 평양 고무공장 총파업 이후 해고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생산조합운동에 참여했다. 9월 평양공제생산조합 고무공업부를 설립했고 11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