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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 1917년 2월 ] (the Russian Revolution - 1917. 2)

레닌 : 제국주의 전쟁이 객관적인 불가피성에 의해,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빨리 앞당겨 주었으며 지난날에 예가 없을 정도로 격화시키고 말았다. 이 전쟁은 적대적 계급의 내란으로 전화(轉化)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화는 1917년의 2〜3월 혁명에서 시작되었다. 이 혁명의 최초 단계는 우선 2개의 세력이 협력하여 츠아리즘에 타격을 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한쪽은 부르주아적・지주적 러시아의 전체와 모든 무의식적 추종자들 및 영국, 프랑스의 대사나 자본가로 대표되는 모든 의식적 지도자들이고, 또 한쪽은 병사대표와 농민대표를 자기편으로 흡수하기 시작한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바로 이것이었다. 이 3개의 정치적 진영, 3개의 기본적인 정치세력 ,즉 ⑴ 농노주적 지주의 우두머리이며 낡은 관료와 장성급의 우두머리인 츠아군주제와 ⑵ 부르주아적・지주적인 오크차브리스트 (Oktyabrist, 러시아 보수정당, 츠아의 10월 선언 옹호를 목적으로 하며 10월당이라고도 한다) = 카데트(Kadety, 러시아 입헌민주당의 통칭, 혁명 후 첫 선거에서의 국회 제1당, 그 후 반혁명으로 전환) 로서의 러시아, 그 뒤에는 소부르주아지 (그 주요대표자는 케렌스키와 티헤이제)가 붙어있다. ⑶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와 빈곤한 주민대중 전체에 동맹자를 구하고 있는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이 3 개의 기본적인 정치세력은 ‘첫 단계’의 8일간 조차도 남김없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먼 곳에서의 편지, 1917, 레닌전집 제23권 PP. 329〜330).
혁명기에는 대체로 생활이 급속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객관적 정세도 또한 급속하고 급격히 바뀌어간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의 전술과 자기의 당면임무를 각 정세의 특수성에 적응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1917년 2월까지 일정에 올라 있던 것은 대담한 혁명적・국제주의적 선전이요, 대중에게 투쟁을 호소하여 그들을 눈뜨게 하는 것이었다. 2월~3월사건 때에 필요로 했던 것은 당면한 적인 츠아리즘을 즉각 분쇄하기 위한 헌신적 투쟁의 영웅정신이었다. 지금 우리는 혁명의 이 첫 단계부터 두 번째 단계, 츠아리즘과의 격투로부터 구츠코프 (Guchkov) = 밀류코프 (Milyukov)의 지주적=자본주의적 제국주의와의 ‘격투’로 옮겨가는 과도기에 임하고 있다. 지금 일정에 올라 있는 것은 조직상의 임무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전적으로 틀에 박힌, 형식적인 조직을 위한 활동이라는 틀에 박힌 의미가 아니라 지난날 없었던 만큼의 광범한 피억압계급의 대중을 조직으로 끌어들여 군사적・전국가적 국민경제적 제 임무를 이 조직에서 구현시킨다는 의미에서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다양한 길을 거쳐서 이 특이한 임무에 착수하고 있다. 러시아의 어떤 지방에서는 2월〜3월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거의 완전하게 권력을 장악했다. 다른 지방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마도 ‘탈취’라는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 민병(民兵)을 창설하여 확대해갈 것이다. 또한 별도의 어떤 지방에서는 프롤레타리아적 조직의 성장, 병사와 노동자의 접근, 농민들 사이의 운동, 수많은 사람들의 구츠코프=밀류코프의 군사적 = 제국주의적 정부의 적격성에 대한 환멸로 해서 이 정부를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의 정부로 대치시킬 때까지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마도 민주주의적 선거권에 입각하여 시의회나 젬스트보 (Zemstvo, 1864年에 창설된 러시아의 지방자치기관)의 임시 개선(改選)을 쟁취하고 그것을 혁명적 구심점으로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동상서, pp. 364~365).
우리나라 혁명의 가장 주요한 특질, 가장 진지하게 숙고하지 않으면 안될 특질은 혁명이 승리한 직후에 성립된 2중 권력이다. 이 2중 권력은 두개의 정부로 나타나고 있다. 즉 주요하고 진정하며 현실적인 부르주아의 정부, 즉 모든 권력기관을 그 손에 잡고 있는 르보프 (Lvov) 일파의 ‘임시정부’와 국가권력기관을 직접 장악하고 있지는 않지만 절대다수의 인민과 무장한 노동자와 병사를 직접적인 기반으로 하고 있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라는 보충적, 부차적인 ‘감독적’정부이다. 이 2중 권력의 계급적 원천과 계급적 의의는 다음에 있다. 즉 1917년 3월의 러시아혁명이 츠아군주제 전체를 일소 했다던가 전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주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적 독재의 바로 직전까지 도달했다는 것에 있다. 페트로그라드와 그밖의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는 바로 이러한 독재 (즉 법률에 기초를 두지 않고 무장한 주민대중에 직접 강력하게 기초를 둔 권력) 이며 바로 전기(前記) 제 계급의 독재이다. 러시아혁명의 두 번째로 극히 중요한 특질은 다음에 있다. 즉, 페트로그라드 병사・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모든 점에서 판단할 때 대다수의 지방소비에트의 신뢰를 획득하고 있으면서도 부르주아지와 그 임시정부에게 자발적으로 국가권력을 넘겨주었으며 임시정부를 지지한다는 협정을 맺어 임시정부에게 자발적으로 우위를 양보한 뒤 자기는 방관자, 헌법제정 의회 (임시정부는 오늘까지 그 소집일정 조차 발표치 않고 있다) 소집의 감독자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역사상 아직 예가 없는 극히 특이한 상황은 두개의 독재——부르주아지의 독재(이렇게 말하는 것은 르보프 알파의 정부는 독재, 즉 법률이나 사전에 표명된 인민의 의지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폭력에 의한 탈취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권력이며 더우기 이 탈취는 특정계급, 즉 부르주아지에 의해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 (노동자・병사 대표소비에트)가 함께 하나로 얽힌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얽힘이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의 국가에 두개의 권력은 존재 할 수 없다. 그중의 하나는 소멸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러시아의 부르주아지 전체는 병사・노동자 대표소비에트를 제거하고 무력하게 하며 소멸시키기 위해, 부르주아지 단독의 권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미 전력을 다하여 온갖 방법으로 도처에서 활동하고 있다. 2중 권력은 혁명의 발전도상에 있어서 과도적인 사기 즉 혁명이 보통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넘어서 전진했지만 그러나 아직 ‘순수한’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에는 도달하지 못한 시기를 나타내는데 불과하다. (우리나라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1917, 레닌전집 제24권, pp. 43~ 44).

트로츠키 : 2월 혁명은 그것 자체로만 생각한다면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주아 혁명으로서는 너무나 늦게 왔다. 그리고 아무런 안정성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것은 동시에 권력에 나타난 제 모순에 이끌리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직접적인 서곡으로 전화(轉化)하거나——그것은 사실 그렇게 되었지만——혹은 러시아를 어떤 종류의 부르주아 과두정체(寡頭正体) 하에 두는 반 식민지적 존재로 내던져버리거나 그중 어느 하나가 되어야 했다. 때문에 2월 혁명의 기간을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즉 ‘민주주의’ 혁명의 강화 발전 및 완성의 시기이냐 혹은 프롤레타리아혁명에로의 준비기간이냐 하는 것이다. 전자에 속하는 자는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 뿐 아니라 우리당의 일부 지도부에도 있었다. 그들이 민주주의혁명을 가능한 한 좌측으로 밀어붙이려고 현실적으로 노력 한다는 상이점은 있었지만 그러나 그 방법에서는 완전히 똑같았다.——지배적 부르주아지에 대하여 ‘압력을 행사 하되’ 그것도 부르주아민주주의 체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계산된 ‘압력’을 말이다. (10월의 교훈, 1924, 트로츠키선집 제5권, pp. 77~78).
2월27일 다브리다 궁(宮)에서 창립되고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라고 불린 조직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 제도의 당초의 효시인 1905년의 노동자대표소비에트는 총파업으로부터 태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투쟁중의 대표를 직접대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트라익의 지도자가 소비에트의 대표가 되었다. 대표의 선출은 총칼 아래에서 행해졌다. 소비에트는 다시금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집행위원회를 선출했다. 그리고 이 집행위원회가 무장봉기를 일정에 올린 것이다. 2월 혁명은 군대 폭동의 덕분으로 노동자가 아직 소비에트를 창조하기도 전에 승리를 획득했다. 집행위원회는 혁명이 승리한 후 소비에트보다도 먼저 공장이나 병영에서 독립하여 위원회 자신에 의해 결성된 것이었다. (러시아혁명사 제2권, 각천문고, 동경, p.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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