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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헤리엇] (Taylor, Harriot)

테일러, 헤리엇(1856-1915)

헤리엇 테일러는 한 런던 외과의사인 토마스 하디와 그의 아내인 헤리엇 허스트의 딸로 1807년 10월 8일에 태어났다. 18세 때 그녀는 Islington에서 온 한 부유한 사업가인 존 테일러와 결혼했다. 몇 년 뒤 헤리엇은 세 자녀들을 두었다.
존과 헤리엇 테일러는 다 같이 유니테리언 교회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정치에 대하여 급진적 관점들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여성의 권리들을 일찍부터 지지한 유니테리언의 지도적 성직자인 윌리엄 폭스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헤리엇 테일러는 급진적 서클들로 옮겨갔고, 1830년에 그녀는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을 만났다. 테일러는 한 사람의 동료로서 그녀를대우해준 최초의 사람인 밀에게 끌렸다. 밀은 테일러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자신이 최근에 쓴 저서들에 대하여 읽고 논평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헤리엇 테일러의 남편과의 관계는 나빠지기 시작했고, 1833년에 그는 별거를 위한 재판에 동의했다. 헤리엇은 존 스튜어트 밀이 주말마다 그녀를 방문했던 곳인 Walton-on-Thames에 있는 한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헤리엇 테일러와 밀이 하나의 성적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친구들에게 추문이 되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수년 뒤 헤리엇 테일러와 존 스튜어트 밀은 결혼과 여성의 권리들이라는 주제들로 쓴 에세이들을 교환했다. 이 에세이들에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밀의 주장보다 더 급진적 관점들을 지지한 테일러의 주장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테일러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관점』(1814)과 『성격의 형성』(1813)과 같은 책들에 있는 로버트 오웬의 사상에 의해서 촉진된 사회주의 철학에 끌렸다. 특히, 그녀의 에세이 속에서 테일러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경제적 의존의 결과를 끌어 내리려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테일러는 이러한 상황이 오직 모든 결혼법들에 대한 급진적 개혁에 의해서만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은 동등한 권리들 속에서 테일러의 신념을 공유했고, 그는 여성의 독립보다는 여성 평등을 부여한 법들에 호의적이었다.
유니테리언의 잡지인 Monthly Repository에 있는 몇 몇 논설을 제외하고, 테일러는 그녀의 전생애 동안 자신의 얼마 안되는 저서만을 출판했다. 그러나 테일러는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서 생산된 모든 자료들을 읽고 논평을 했다. 그의 자서전에서 밀은 헤리엇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된 대부분 저서들과 논설들의 이음새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덧붙였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사상들과 고찰들을 완전히 공유했을 때, 그것은 문체를 유지하는 것으로 독창성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1848년에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가 출판되었다. 밀은 테일러가 책을 생산하는데 한 역할의 자세한 내용들을 포함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존 테일러가 이것에 대하여 들었을 때 그는 반대했고, 그의 아내에 대한 언급들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서 밀은 『정치경제학 원리』가 “자신의 아내와 함께 만들어진 공동의 산물”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서 밀은 『정치경제학 원리』가 “자신의 아내와 함께 만들어진 공동의 산물”이었다고 지적했다.
존 테일러는 1849년 5월 3일에 암으로 죽었다. 소문과 추문에 대하여 염려를 가졌던 헤리엇은 그들이 결혼하기 까지 2년을 기다렸다고 주장했다. 결혼 뒤 수개월 만에 Westminster Review는 『여성의 선거권』이 출판되었다. 이 논설이 주로 테일러에 의해서 씌여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존 스튜어트 밀의 이름으로 나타났다. 똑같은 일이 그들이 폭력적 남편들로부터 여성을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법들을 지지한 Morning Chronicle(1851년 8월 28일)에 있는 한 논설의 출판에서도 일어났다. 1854년에 밀에 의해서 씌여진 한 편지는 헤리엇이 밀의 저서들과 논설들의 공동 저자로서 묘사되는 것을 꺼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책 속 표지에 우리의 두 이름들이 씌여있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책을 당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나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모든 것과 함께만 나는 출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의 보다 좋은 절반은 당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언제나 비밀투표에 호의적이었지만 헤리엇은 이에 찬성하지 않았고, 결국 이러한 주제에 대한 남편의 견해들을 변화시켰다. 테일러는 민중이 공동체의 선을 위한 것보다 그들 자신의 자기이익에 투표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 그녀는 만일 민중이 공개적으로 투표한다면, 그들의 이기심의 노출은 대중의 이익들 속에 있는 정책들을 제시하려는 사람들을 뽑기 위한 선거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헤리엇 테일러와 존 스튜어트 밀은 다같이 결핵으로 고통을 당했다. 1858년 11월 프랑스에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질병에 대한 치료를 하는 동안 헤리엇은 사망했다. 이 때 밀과 테일러는 『여성의 복종』이라는 책을 쓰고 있었다. 이제 헤리엇의 딸인 헬렌은 그 책을 완성하기 위하여 밀을 도왔다. 이 후 두 사람은 매우 가까이서 15년 동안 일을 했다. 밀은 자서전에서 “현재나 미래에서나 누구든지 내가 마친 나의 저서와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것이 한 사람의 지성과 양심의 산물이 아니라 최소한 생각할 수 있는 세 사람의 결과물이며, 결국 최초의 원저자는 그것에 애착을 가졌던 사람일 것이다.”
밀의 책과 논설들로 밀을 돕는 것처럼, 헬렌 테일러는 여성의 선거권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Kensington Society 창립멤버의 한 사람이었고, 여성을 위한 투표권을 요구하는 최초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또 헬렌은 남성과 같은 정치적 권리들을 여성이 가질 수 있록 하는 1867년의 개혁법 개정을 보완하려는 시도를 한 날 the House of Commons에 존 스튜어트 밀과 함께 갔다. 그러나 개정안은 196명 가운데 73명이 투표를 해 부결되었다. 또 헬렌 테일러는 지방정부에 여성이 참여하도록 하게 하는 토론이나 논쟁같은 선전에 참여했으며, 1870년 교육법이 통과된 뒤에는 London School Board의 한 구성원으로서 일을 했다.

출처: 스파르타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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