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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국(金思國, 1892~1926) 金解光] ()

(고려공산동맹책임비서) 충남 연산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동생 김사민(金思民)과 함께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서울 보성학교를 중퇴하고 1910년 만주로 망명한 후 만주와 러시아에서 반일운동에 종사했다. 1919년 4월 서울에서‘국민대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20년 출옥했다.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했다.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선교육개선회위원이 되었다. 7월 박원희(朴元熙)와 결혼했다. 11월 토오꾜오(東京)에서 『오일신보(五一新報)』 발기에 참여하고 흑도회(黑壽會) 결성에 참여했다. 1922년 2월 『조선일보』에 발표된 「전국 노동자 제군에게 격함」(동우회선언)에서명했다.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차 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 사건’ 관련자의 제명안을 제출했으나 부결되자 서울청년회 외 8개 청년단체를 이끌고 조선청년회연합회를 탈퇴했다. 8월 제3차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위원이 되었다. 9월 당과 공청 간의 상호관계 문제를 둘러싸고 조훈(趙勳)과 견해차이가 생기자 고려공청 중앙총국에서 탈퇴했다. 10월 개선된 조선노동대회 간부들로 하여금 자유노동자대회를 개최하게 했다. 1923년 봄 ‘자유노동 조합 사건’을 계기로 만주로 망명하여 북간도에서 서울파 공산주의그룹 간도총국을 결성했다. 그해 간도에서 사회주의 교육기관 동양학원(東洋學院)을 설립했다. ‘동양학원 탄압사건’ 때 검거를 피하여 영고탑(寧古塔)으로 가서 대동학원(大同學院)을 설립했다. 이후 소련으로 가서 조선 사회운동의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1924년 6월 폐병에 걸려 귀국했다. 10월 고려공산동맹을 결성하고 책임비서가 되었고 12월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상무위원이 되었고 1926년 5월 8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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