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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회] (ancient society)

마르크스주의는 시대 구분의 근거와 시대의 연속성에 대한 설명이 일반적인 역사 발전론에 필수적인 것으로 보기기 때문에, 역사의 전통적 시대 구분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도입하였다(→발전단계).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고대세계보다는 고대 사회라고 언급하는 것이 하찮은 문자상의 상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 대한 전형적 언급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1859)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수행하는 사회적 생산 속에서 반드시 자신의 의지와 독립된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생산관계는 인간의 물질적 생산력 발전의 일정한 단계와 조응한다.…어느정도의 발전단계에 이르면 물질적 생산력은 현존하는 생산관계 또는 -동일한 것의 법률적 표현에 불과한-인간이 이전부터 맺어온 소유관계와 모순되게 된다. …그 다음에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에 따른 여러시기에 맞춰서 우리는 대략적으로 아시아적 생산양식, 고대적 생산양식, 봉건적 생산양식, 그리고 시민계급적 생산양식으로 이름붙일 수 있다.

역사적 시기에 대해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목록이 ‘그의 가장 헌신적 추종자들에 의해서 여러 번 수정’(Hobsbawm, 1964, p.19)되었지만 1세기 동안 단순화된 ‘통속적’해석이 사실상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아시아적 사회는 원시 공산주의의 무계급 시대로 대체되어 사라졌으며, ‘진보’(porgress)라는 단어는 단계적 발전, 즉 여러시대의 연대순에 따른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회혁명’은 글자 그대로 구체제 안에서 피착취계급에 의한 한 체제의 전복으로 이해되었다. 불행히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독단과 그 뒤 많은 해설가들 때문에,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과 그 뒤 나온 《자본론》집필을 준비하고 있었던 1857-58년에 작성한 방대한 양의 노트의 중심적 요점과 모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저서는 출판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마르크스가 혼자서 집필한 일종의 개인 의견이었다. 그것은 결국 모스크바에서 출간되었으며(1939-41), 1952년과 1953년에 베를린에서 출판된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마틴(Martin Nicolaus,1973)에 의해서 훌륭한 영역본이 출간되긴 했지만, 마르크스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에 앞서는 형태들’이란 표제어가 붙은, 고대사회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한 부분 (pp. 471-514)이 1964년 이후 영어권에서는 분리되어 활용되고 있다.
《요강》의 이 부분은-매우 추상적이고 때로는 생략적이지만-마르크스가 게르만-고대-슬라브적 소유와 생산 양식을 아시아적 양식으로 대체하는 원시 공산주의의 다른 탈출구로서 인식하고 있으며, 노예제와 농노제는 ‘공동체 사회에 기초한 소유와 공동체 사회 안의 노동에 필요하고 논리적 결과일지라도 항상 부수적이고 파생적인 것이며 결코 본원적인 것은 아니다’(p, 496)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여러 형태가 역사적으로 단계적 발전 속에서 각각의 형태로 이어지지 못하며, 특히 아시아적 사회는 그 자체 안에 자기 자신을 파괴할 동기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것이 된다.
1859년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그리고 그들의 직계 계승자들)가 왜 《요강》의 보다 복잡한 계획을 포기하고 표본으로 인정된 보다 단순한 단계적 발전의 길을 열었는지는 간단히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전(前)자본주의적 구성체에 대한 그들의 흥미가 역사발전론에 관한 관심에 종속되었으며, 우선적 관심사인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분석과 이해에 필요한 집중적 연구와 복잡미묘한 차별화를 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지적될 수 있겠다. 홉스봄(1964)이 지적했듯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전제조건을 설명하는 데 제외되는 전(前)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동인’, 또는 ‘노예제 경제의 실제적인 경제적 모순’, 그리고 고대의 양식이 왜, 어떻게 봉건제에 의해서 대치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좀 더 최근의 이론가들, 예를 들면 레닌이나 그람시 또는 알튀제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모든 노력은 현대 세계와 그 정치, 또는 가장 추상적이거나 일반적 (또는 양자가 결합된-예를 들면 루카치)형식의 이론이나 철학에 집중되고 있었다. 최근에는 힌데스와 허스트(1975)같은 예외적 경우가 있지만, 고대 사회에 대한 그들의 불합리한 인식으로 인해서 좌절되었다.
결국 마르크스주의 문헌에 나타난 그러한 간격을 해소시킬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고대사 역사학자에게 맡겨진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요강》이후 웰스코프(1957)에 의해 이루어진 최초의 대규모 연구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연구는 그녀 자신의 분석 성과는 별개로 치더라도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등이 그 주제를 다루었던 관점에 이르게 하는 가장 안전한 안내자이다. 그러나 이 문제들의 복잡성과 분량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고대(그리스-로마)세계는 로마제국 아래서 하나의 정치적 통일체가 되었다. 서기 2세기 초 그 제국은 가장 크게는 서아시아, 이집트에서 모로코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전체, 대륙의 북부지역 외에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대부분을 포괄하여 6천만의 인구를 가진 175만 평방 마일의 영토를 관장하였다. 그 거대한 영토의 변방에 위치한 척박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중앙에 의한 통제의 견고함이나 관세, 공물, (전쟁이나 정복기간의)전리품을 통한 제도적 착취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수만명의 이탈리아인을 정복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로마의 중앙행정부에 봉사하고 로마시민권과 원로원 지위를 요구하는 지역 엘리트가 발생하고, 이전에는 그리스-모라식의 도시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지역들, 특히 북부의 변경 지역과 서유럽에 그러한 양식의 도시를 건설하고, 상당히 먼거리에 걸쳐 상품의 광대한 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각각의 본질적 특성을 유지하는 이질적 사회의 모자이크였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그곳에서는 현대의 제국주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같은 제국 전반의 종속적 체제로의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발전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로마의 지배계급이 지역을 착취한 방법은 소유권 제도의 변형이나 그들이 정복-합병시킨 지역 안에서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 근본적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의 고대 또는 노예제 생산양식을 (그 둘이 동일한 양식인지 서로 다른 양식인지를) 정의하려는 노력이 외관상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 왔다.
중요한 일보를 이룬 것은 강조점을 생산양식에서 사회구성체로 변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그 둘 가운데 하나가 우세한 상태 아래서 편제된 생산양식의 구체적 결합’(Anderson, 1974, p. 22, n.6)이라고 정의된다. 그러한 변화는, 앤더슨을 다시 인용하면, ‘어떤 주어진 역사 및 사회전체 안에서 가능한 생산양식의 다원성과 이질성’의 실체를 설명하는 데 필요하였다. 이것은 특히 토지에 딸린 노예가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았고 중요했던 세기의 로마에서 자영 농민이 숫자상으로 의미가 있었음으로 인해서 빚어진 난점을 제거해 주고 있다. 그러나 고대 세계의 다른 시기와 지역에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예를 들면 기원 전 4-5세기의 그리스는 단지 문화적으로만 하나의 ‘통일체’였다. 그곳에는 노예제 생산양식이 지배적이었던 아테네 같은 도시국가들도 있었지만, 분명히 노예제 생산양식이 아닌 도시국가들도 많았으며 어쩌면 대다수가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노예가 있었던 스파르타나 변방에 위치한 일리리아와 마케도니아, 또는 테살리와 애톨리아 같은 ‘낙후된’지역이 그러한 곳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의미에서 그리스가 하나의 사회 구성체라고 할 수 있는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뒤 침략자인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지배계급은 새로이 획득한, 이집트에서 박트리아에 이르는 동쪽의 새로운 영토에 그리스식 도시문명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의 근저를 이루는 농촌 주민은 고대 그리스적(로마적)의미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며, 또 가사노예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곳의 특징적 정치구조는 도시국가가 아니라 절대군주제였다. 과거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지금은 관례적으로 헬레니즘기(期)로 알려진 이 시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최근 주요 연구가들은 가장 중요하다고 할 그 동쪽 지역은 아시아적 사회구성체로 분류되어야 하며, 반면에 처음부터 그리스를 형성하고 있었던 지역은 고대 양식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Kreissig, 1982). 여기서 단지 문화적인 ‘통일체’, 그것도 더욱이 영토 전체가 로마 제국으로 합병될 때까지는 유약한 통일체였던 그 곳을 다시 다루자면, 그 로마 제국은 로마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부(富)를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노예노동으로부터 (정복지의 착취와는 다른 것으로서)직접 갈취하였다는, 좁은 의미에서의 노예제 생산양식이 지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배계급이 지역적으로 다양화됨에 따라 -그러한 현상은 스페인, 갈리아, 북아프리카, 또는 시리아가 대부분의 황제들을 부양하고 있었던 서기 2세기에서 시작된다-이 계급이 노예제 생산양식의 착취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은 더욱 더 비현실적인 것으로 된다.
반론이 없는 문제는 합의의 결핍이라는 문제와 함께 현재의 마르크스주의 역사 서술을 특징짓는 불확실성을 반영해 준다. 아마 토지와 상품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가 고대사회 확립의 필수조건이었거나 시민공동체인 도시국가가 가장 적절한 정치형태였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을 떠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지속적 토론 주제로 남아 있는 데, 그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노예제의 본질과 역할이고 (그것에 관해서는 자주 논의되었다), 둘째, 천년 이상 지속된 고대사회의 역사적 단계 구분이다(보다 잘 이해되는 자본주의의 단계구분과 유사하다). 한편 모든 어려움이 본질적 마르크스주의적 범주에 대한 기묘한 아전인수(我田引水)의 정의에 의해서 상당히 방어되고 있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단계론적 관점을 견지함으로써 우회되고 있다(de Ste Croix, 1981). 또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고대의 범주를 포르투갈의 항해가인 ‘바스코 다가마 이후 아프리카’정도로 그 타당성을 가지는 것으로 단정하였다(Hindess and Hirst, 1977, p.41)
이들 가운데 어느 쪽도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난관을 회피하는 것이 곧 그 난관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새로운 생산관계가 출현하여 궁극적으로 지배적인 것으로 되는 변증법적 과정에 대한 연구로부터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위기라는 단어가 정기적으로 반복되지만, 그 위기의 특징이나 연대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그러한 어려움은 고대 사회로부터 봉건제도로의 이행과 로마제국에 관련될 때 가장 첨예화된다(→봉건제). 첫째, 이미 살펴본 것처럼 노예제 생산양식은 특별한 의미에서만 지배적이었다. 둘째, 그 제국의 동서 양쪽의 절반은 서로 다르게 발전하였다. 단지 서쪽의 절반지역에서만 봉건제가 고대 사회구성체를 대체하였다. 독단이 아니고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관념만으로 고대사회의 혁명적 전복을 믿는 사람은 없다(Staerman and Heinen, in Heinen, 1980). 그러나 동서 분할은 하나의 정치체제 아래 놓여 있었던 아시아적 사회구성체와 고대사회 구성체 사이의 구분과 게르만 양식의 서구 제국으로의 전래에 관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Anderson, 1974). 셋째, 현재는 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비마르크스주의자이거나 역사학자들은 봉건체제가, 6세기의 ‘이행기’는 제쳐놓더라도 일반적으로 생각되던 것보다 훨씬 늦은 연대로 추정된다는 것에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확실히 ‘제국주의적 노예제도’(Favory, 1981)보다 더욱 발전된 것이지만 ‘후기의 고대 사회-경제 구성체’(Giardina, 1982)를 찾아내야만 한다는 주장은 좀 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고대 사회의 단계구분에 관한 전반적 문제는 고대사회를 설명하는 데 근본적인 관계들과 함께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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