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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 (Engels, Friedrich)

엥겔스 Engels, Friedrich

1820년 1월 28일 바르멘에서 태어나 1895년 런던에서 사망하였다. 영국의 베스트팔리아주에 있는 부퍼탈의 방직제조업자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엥겔스는 엄격한 캘빈주의적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브레멘에서 상업실무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학교 중퇴 이후 엥겔스는 급진적인 문학적 야망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최초로 1839년대의 청년 독일 운동의 민주․민족주의적 작가들에 매료되었는데 그 당시에 그는 헤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상업활동을 유예하기 위한 군복무의 기회를 잡기 위하여 1841년에 베를린으로 갔으며, 바우어를 중심으로 하는 청년 헤겔파 서클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엥겔스는 헤겔의 셸링에 대한 비판을 익명으로 공격함으로써 잠시 동안 명성을 얻었다.
1842년 가을, 엥겔스는 맨체스터에 있는 부친의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모제스 헤쓰의 영향으로 엥겔스는 그때 이미 공산주의자였으며 그 이후로는 《유럽의 3국 체제》를 따르면서, 영국을 사회주의 혁명의 최종 목적지로 생각하였다. 방직공장에서의 2년 간의 생활과 오웬주의자들과 챠티스트들과의 접촉은 그로 하여금 바우어 서클과 점차 멀어지게 했다. 《노동계급의 상태》에 기록된 경험은 엥겔스로 하여금 노동계급, 즉 ‘산업혁명’에 의해 창출된 하나의 독특한 새로운 힘이 혁명적 전환의 수단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게 했다. 영국을 떠나 책을 저술하는 동안에 엥겔스는 처음으로 마르크스와 의미있는 만남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우어 그룹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같이했고, 독일 밖의 노동계급 운동의 중요성에 그들이 비슷하게 감동하고 있음을 발견하였으며, 그들의 입장을 밝히는 공동의 저작인 《신성가족》을 저술하는 데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오랜 협력의 시작을 의미했다. 비록 그들이 분명히 노동계급과 정치운동에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지만, 그 당시 이들이 지지했던 공산주의는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184년 초부터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슈티르너[Stirner]의 비판에 영향 받은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와 청년 헤겔파 운동에 대한 그의 이론적 입장을 밝혔는데, 이것은 분명히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의 기원을 이루었다. 마르크스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과정에서의 엥겔스의 역할은 부차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학과 영국에서의 산업혁명 및 계급의식의 발달에 관한 엥겔스의 저서는 마르크스의 전체적 통합체계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게다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함으로써 그들의 미완성 공동작업에 매우 크게 이바지하였다.
1845년에서 1850년까지는 매우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진 한 시기였다. 엥겔스는 부친과의 관계를 끊고 마르크스와 함께 브뤼셀과 파리에서 정치활동에 전심전력하였다. 그들의 공동의 야망은 그들 자신의 입장에서 독일 공산주의자들과 싸워 승리하는 것이며, 공동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강령에 기초하는 외국 노동자운동과 국제적인 연계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을 정의 독일동맹(공산주의 동맹으로 재명명됨)에 참가하여, 1848년 혁명 전야에 《공산당 선언》을 만들어 냈다. 혁명 기간 중에 엥겔스는 귈른에서 발행되던 《신 라인 신문》에서 마르크스와 함께 일했다. 1848년 9월에, 체포의 위험으로 인하여 엥겔스는 프랑스로 갔으나, 1849년 초에 다시 돌아와서, 5월부터 7월까지 반혁명의 승리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의 최후의 단계에 참가했다. 군사에 대한 엥겔스의 관심은 이 시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데, 혁명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해석은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1851~2)에 기록되어 있다.
공산주의 동맹이 마침내 붕괴된 후 얼마 동안을 런던과 스위스에서 보낸 엥겔스는 1850년 맨체스터에 정착하여 집안의 공장을 다시 경영하였다. 여기서 그는 1870년까지 머물렀는데 이때의 성공적인 사업활동과 더불어, 그는 가난에 처한 마르크스의 가족을 돕고, 여전히 마르크스의 중요한 정치적 및 지적 동지로서 그들의 공통된 입장을 광범위하게 잡지와 신문에 기고하였다. 1850년대 말부터 비로소 엥겔스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과 자연과학에 있어서의 발전(→자연과학)과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관련시키는 일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주체에 대한 그의 미완성 논문들이 모두 모아져서 1920년대에 모스크바에서 《자연변증법》으로 발간되었다.
1970년에 엥겔스는 안락하게 은퇴하여 런던으로 옮길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건강이 점점 허약해짐에 따라 엥겔스는 계속 가중되는 그들의 정치적 과업에 대한 역할, 특히 제1 인터내셔날 말기에 그 실제적 운영을 맡게 되었다. 이 정치적 역할에서 엥겔스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의 실증주의적 흐름에 반대하여 《반듀링론》-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 대한 일반적 해설로서의 최초의 시도-을 썼다. 이 저작과 《공산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같은 《반듀링론》으로부터의 초록들이 1880년부터 1914년 사이의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 과정에서 엥겔스가 명성을 얻는 토대가 되었다. 이후의 저작인 유명한 《가족의 기원》과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론》은 제2 인터내셔날 기간 동안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철학자로서 그 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해주었다. 1883년 마르크스가 죽은 이후 엥겔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1885년과 1894년에 나온 《자본론》의 Ⅱ권과 Ⅲ권을 편집, 출판하면서 보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제2 인터내셔날의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인터내셔날) 이때 그는 제2의 인터내셔날을 사회주의의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한 최대한의 수단으로서,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파괴적인 전쟁의 위험을 저지하는 방벽으로 간주했다. 그가 《자본론》 Ⅳ권(후에 《잉여가치론》으로 출판되었다)의 작업을 시작한 직후, 그는 암으로 사망하였다.
1914년 이전까지 엥겔스는 비할 수 없는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마르크스 이상으로,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하나의 세계관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확신과 보급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1914년 및 러시아 혁명 이후 그의 위치에 이의가 제기되었다. 소련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의 저작들에서 분명히 보이는 과학주의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공인 철학의 일부로서 강조한 반면에, 서구의 사회주의자들은 엥겔스를 실증주의 및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엥겔스가 전시대의 실증주의 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두 가지 해석상의 견해는 모두 심각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 즉 마르크스 이전에 엥겔스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헤겔과 푸리에였으며,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해석도 그것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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