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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nationalism)

민족주의는, 특히 초기에 맑스와 엥겔스가 공통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려 했던 힘을 과소평가 함으로써 방향을 잘못 설정했다고 느꼈던 주제이다. 매우 합리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었던 외국의 이주자로서 그들이 애국적 열기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희망이 계급투쟁에 고정되어 있었던 만큼 그들은 사회적 분화를 초월한다고 공언하며 계급의식을 둔화시키는 감성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은 그들에게 민족문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으며, 경험이 풍부한 조직가로서 그들은 노동운동에서 민족적 환경과 전통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민족문제에 관해 언급한 것 중에서, 1848∼49년 혁명기에 보다 강력한 독일어권 오스트리아인과 마쟈르인에게 반기를 들고, 따라서 보수주의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데 도움을 준 합스부르크의 소수 슬라브 민족을 비난했던 것보다 더 격렬하게 비판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들은 그 당시 들떠있던 모든 이질적 세력을 흑백, 즉 진보와 보수의 틀 속에 맞추려 하였다. 맑스와 엥겔스의 눈에 비친 오스트리아인과 마쟈르인은 사실 그들의 소수민족에 대한 태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최소한 민족주의적이거나 국수주의적이었지만, 단순히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엥겔스가 독일의 압제 하에서 투쟁하던 '용감한 체코인'에 관해 관대하게 표현했던 적도 있지만, 그들이 승리하건 패배하건 그들에게서는 미래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신 라인신문》1948년 6월 18일). 그리고 그 투쟁이 끝난 뒤 그는 훨씬 더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이러한 격렬한 비난은 몇몇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준 범슬라브주의가 반혁명의 강력한 동맹인 러시아의 지원을 의미한다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다. 레닌(1916)은 1848년의 슬라브인의 요구는 그 자체가 아무리 정당화될 수 있다 해도 그 당시로서는 부적당하였으며, 자신들을 보다 커다란 진보의 필요성에 종속시킬 것을 원하는 것이 당연하였다고 주장하며 엥겔스의 그러한 적대감을 합리화시켰다('사회주의 혁명과 민족자결권' CW 22, pp.149∼50).
폴란드는 너무 큰 국가였기 때문에 똑같은 방법으로는 생각될 수는 없었으며, 폴란드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비현실적이었지만 정치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폴란드의 독립은 짜르 체제를 약화시킬 것이며, 독일이 간섭 없이 발전할 수 있게 해주는,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장벽을 쳐주는 것이다. 사실 맑스는 폴란드가 독립적으로 생존해 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불안해하였다(《동구의 문제에 관하여》59장). 하나의 중대한 결함은 폴란드의 자유가 농노 소유 귀족계급의 무책임으로 인해서 상실되었으며, 19세기 말까지 카톨릭 교회와 연합하여 민족운동의 선두에 섰던 것도 그 계급이라는 것이다.《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부분에서의 지지는 토지혁명이 민족해방의 필요조건임을 주장하는, 보다 진보적 진영을 위해 선언된 것이다. 나중에 엥겔스는 이 문제를 다르게 설명하였다. 즉 폴란드의 민족해방은 우선 사회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성취되어야 하며, 어느 민족도 외국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전에는 다른 목적에 전념할 수 없다. 그리고 국제 노동자운동은 자유로운 민족들의 화합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을 뿐이다(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 1882년 2월 7일). 엥겔스와 맑스는 폴란드의 경우 이상으로 아일랜드의 독립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았는데, 그것은 아일랜드의 민족주의나 지도력에 대한 특별한 평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영국 제도 전체의 진보를 위해서였다.
민족해방 전쟁은 사회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주어지지만, 이것은 근거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각각의 전쟁마다 불가피하게 다른 것보다 문제가 많은 매우 복잡한 동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갈등이나 억압에 대한 기억에 의하면 그러한 전쟁들은 각 민족 노동자들 사이의 형제애적 연대가 고양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상처를 남겨 놓았다는 것이다. 모든 계급이 영향을 받았으며 정부는 국내의 불만을 호도하기 위해 배외(排外)감정을 부추기려고 노력하였다. 사회주의 운동에서 맑스주의 진영과 바쿠닌주의 진영으로의 분열은 독일, 혹은 서구의 우월성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슬라브인 중심의 자기 주장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바쿠닌은 평등한 지위를 보장하는 슬라브 민족 연합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Davis, 1967, p.42). 맑스의 사위 라파르그처럼 맑스주의 이념을 프랑스 노동운동에 이입시키려고 했던 사람들은 1870년의 패배에 의해 남겨진 악의와 맑스주의의 '독일' 이론으로의 불신을 의식하고 있었다. 1893년 라파르그와 게스드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반애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는 선언을 발표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라파르그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1893년 6월 23일). 맑스주의에 완전히 편향되지 않았고 모든 민족이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애착을 매우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사회주의자인 죠레스는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라는《공산당 선언》의 문구를 노동자들은 불행히도 민족적 생활의 터전을 빼앗겨 그것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통일을 갈망하는 나라들을 분할하였다. 레닌은 짜르와 대 러시아 제국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다수 민족으로 이루어진 짜르 제국의 복잡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전략은 실제적으로는 쉽게 실행되지 않는, 피억압 민족해방을 위해 사회주의자가 종주국에서 해야 할 의무와, 좁은 이기적 민족주의에 반대해야 할 사회주의자의 또 다른 의무간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볼세비키적 관점의 기준이 된 것은 1913년에 스탈린이 쓴《맑스주의와 민족 문제》라는 소책자인데, 그것은 어느 경우에서나 레닌의 관점에 충실하게 일치되고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적 원칙의 많은 부분과 마찬가지로 그 소책자도 그것을 쓰게 했던 당시의 상황과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 스탈린은 1905년 혁명의 패배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 동요를 야기할 산업의 급격한 확대와 함께 지역적 민족주의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그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들을 감염시킬 위험이 존재하며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과제, 즉 소수 지역의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수행할 능력조차 없음이 드러난 의무이다. 그러나 소수 민족주의는 완전한 자결권이라는 사회주의 공약에 의해 중화(中和)되었다. 스탈린은 자유를 갈망하는 다른 민족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중 군주국으로 변형시킨 합스부르크 제국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채택한 강령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이중 군주국으로의 변형은 충분한 문화적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야망을 충족시키려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레닌의 주장에 의하면 이것은 매우 부당한 것이며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의 불협화음이 민족 부문으로의 해체를 피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중대한 문제는 폴란드였다. 폴란드에서는 토지소유 귀족의 초기 저항이 쇠퇴해 갔으며 새로운 계급은 아직 그것을 대체하지 못하고 있다. 폴란드의 몇몇 사회주의자들―룩셈부르크가 가장 설득력 있었다―은 민족주의에 대한 지지는 철회되어야 하며 폴란드와 러시아 노동자의 단결을 더 한층 요구해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레닌은 폴란드의 독립의 권리에 대한 인식 없이는 강력한 단결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자결권을 지지하고 있었던 1916년에 그는, 사회주의의 목표는 국가들을 하나가 되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한 가족으로 결합시키는 것이지만 그것은 각 민족에게 자신의 길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기 전에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되풀이하였다('사회주의 혁명과 민족 자결권', CW 22, p.146).
1917년 이후 맑스주의 사고에서 중요한 요소는 비록 폴란드뿐만 아니라 핀란드와 발틱 지역이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레닌의 입장이 대대로 많은 영지를 이어받은 커다란 다수민족 국가의 확실한 교의였다는 것이다. 모든 민족 공동체에 자신들의 문화적 발전을 모색할 충분한 자유와 그 공동체의 규모의 역사에 대응하는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하려는 복잡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그러나 발전 수준의 다양함과 역사적 사실의 고통스러움 때문에 마찰은 불가피하였다. 6차 당 대회의 보고에서 스탈린은 지역적 분파주의와, 국제주의의 가면을 쓰고 민족들의 합병이라는 때 이른 운동을 고무하는 대 러시아의 교만이라는 두 종류의 적대감으로 인한 '잠재적 분열'의 위험성을 길게 논하였다. 그러나 재개된 외국의 침임에 대한 애국심의 호소는 일반 대중에게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해독으로부터 정화될 수 있기 때문에 정당하게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은 1941∼45년의 '대 애국 전쟁'에서 그 절정에 달했지만 대부분 농민으로 이루어진 그 당시의 군대는 사회주의의 방어라는 명분에 별로 호소력을 느낄 수 없었다. 소보로프[Suvorov] 훈장이 제정되고 짜르 제국주의의 전쟁 영웅을 미화하기 위한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은 맑스의 회의론적 합리주의와 매우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16년 더블린 봉기에서 숨을 거둔 제임스 코놀리[James Connolly]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적 봉기를 결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아일랜드에서의 그 시도는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분리주의 운동은 이전의 동구에서와 같이 서구에서도 증대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서는 사회주의와 맑스주의의 요소가 뚜렷이 나타난다. 그들은 공산당을 노동계급의 단결에 혼란, 후퇴나 파괴를 가중하는 것으로 보아왔다. 이것은 때때로 유럽의 밖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많은 아시아 국가와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소수 민족을 포함하고 있다. 이란과 파키스탄에서의 공산주의적 관점은 (소수 민족인 인도―이란족에게는 반가운 것이 못되지만) 소수 민족은 독립국가를 세우려 하지말고 다른 지역의 진보적 부분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이 전개되고 있던 곳에서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 또는 연합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14년 이전에 레닌은 아시아에서 민중 봉기를 모든 곳에서 사회주의의 성공을 위해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열렬히 환호하였으며, 제 2 인터내셔널과는 달리 제 3 인터내셔날은 식민지 해방운동의 뒷전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유럽과 비교해 볼 때 아시아에서 현대 민족주의와 맑스주의적 사회주의는 거의 동시에 전면에 나타났다. 우수한 조직과 분명한 이론을 가진 맑스주의적 사회주의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한 중국이나, 프랑스의 지배에 대항한 베트남에서와 같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인도가 예외에 속했는데, 인도는 서구와의 관계가 오래 전부터 있어왔으며 정치활동이 허용되고 자유주의 노선의 민족운동이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인도의 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그들이 민족운동에 동참할 것인지, 그리고 어떠한 조건에서 동참할 것인지에 관한 반복적인 논쟁이 있었다. 그들이 좀더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대체로 외견상 민족 투쟁으로부터 초연해 있던 데에 기인하였다.
특히 중국과 같은 몇몇 나라에서 궁극적으로 정권을 잡을 세력이 민족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시기상조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1943년 유럽에서의 코민테른의 해체는 소위 맑스주의의 '국제적'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이정표였다(Narkiewicz 1981, p.84). 그 이후 중소분쟁은 각 국가의 정당이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찾는 경향을 강화시켰다.

[관련자료]

Cummins, Ian 1980: Marx, Engels and National Movements.
Davidson, Basil 967(revised edn): Which Way Africa? The Search for a New Society.
Davis, Horace Bancroft 1967: Nationalism and Socialism.
Hodgkin, Thomas 1981: Vietnam: The Revolutionary Path.
Lenin, V. I. 1916(1964): 'The Socialist Revolution and the Right of Nations to Self-Determination'.
Nairn, Tom 1977; The Break-Up of Britain. Crisis and Neo-Nationalism.
Narkiewicz, Olga A.1981: marxism and the Reality of Power 1919-1980.
Stalin, J. V.(1936): Marxism and the National and Colonial Question.
Torr, Dona ed. 1940: Marxism, Nationality and War.
Tuzmuhamedov, R 1973: How the national Question was Solved in Soviet Central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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