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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론타이] ( Kollontai, Alexandra)

1872년 3월 19일 세인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태어나 1952년 3월 9일 모스크바에서 사망. 콜론타이는 러시아 혁명의 여파 속에서 주요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었으며, 그녀의 이름은 현재 1920년대에 패배한 혁명적 관념론의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그녀의 생애와 업적은, 그녀가 죽은 후 소비에트 당국에 의해서는 무시되고 있지만, 서구의 사회주의적 여성 해방론자들에게는 하나의 영감과 경고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14년 볼세비키에 가담한 콜론타이는 1917년까지 당 중앙위원직에 있었다. 10월 혁명 후 사회복지국 인민위원이 된 그녀는 레닌이 이끄는 정부의 유일한 여성이었다. 1920년에 그녀는 당 여성국(局)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녀는 이미 가족과 부르조아적 성(性)도덕을 비판하는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으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그녀의 강경한 입장-종종 '자유 연애'로 잘못 해석되는-은 관념론과 개인적 관계에서의 방종을 뚜렷하게 보여주었으며, 가족에 대한 당의 정책에 의해 곧 분쇄되었다.
1920년 그녀는 관료화, 엘리트화 그리고 레닌의 新경제정책에서 생산에 대한 획일적 강조에 의해 점차 혼란 속에 빠져들었던 볼세비키 내부의 노동자 야당에 가담하였다. 이 때문에 불가피하게 명예가 실추되었으며, 레닌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고 1922년에 스탈린에 의해 보잘 것 없는 오슬로 주재 외교관으로 추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많은 좌익 야당 동지들이 희생되었던 스탈린의 숙청을 모면하였으며 스웨덴 주재 대사로까지 승진하였다.
콜론타이는 영향력 있는 필자였으며 또한 연설가였다. 그녀의 인기는 그녀와 그녀의 이념을 소비에트와의 공적인 관계로 유지시키는 데 하나의 장애가 되었다. 만년에 이를수록 화려하긴 했지만 그녀는 소련에서는 거의 무시되었다. 그러나 서구에서 그녀는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자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준 기폭제였으며, 그녀의 이념은 적극적으로 옹호되었고, 그녀의 삶과 신념은 높이 찬양되었으며 그녀의 운명은 남성이 지배하고 관료화된 당의 정통성에의 순교로 보여지고 있다. 콜론타이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긴 하겠지만,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이념을 거부한 당에 충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계속적인 반대보다는 평화적인 망명을 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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