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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독일의 예술비평 ] ()



바움가르텐 등에 의한 미학의 철학적 정초와 더불어 독일에서는 계몽주의시대의 합리주의에 반항하는 새로운 예술관이 일련의 비평가들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었다. 이 예술관운 방켈만과 레싱으로부터 시작되어 질풍노도(Sturm und Drang)시대의 하만, 특히 헤르더에 의해서 강력하게 추진된 후 괴테로 이어진다.

1)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

미술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던 빙켈만은 다음에 언급할 레싱보다 연장자였지만, 그 태도 면에서는 오히려 혁신적이었다. 처녀작 『그리스 미술 모방론』(Gedanken über die Nachahmung der griechischen Werke in Malerei und Bildhauerkunst, 1755)에서 그는 당대의 피폐한 미술을 그리스의 원천으로 복귀 · 소생시키려고 하였다. 그리스 미술에 대한 찬미로 일관된 이 책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예술의 관찰법상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서는 계몽기의 오성적 · 분석적 방법 대신에, 기본적으로 깊은 공감과 동격 속에서 작품을 정신적으로 통일된 내면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가 발견된다. 예를 들면 『라오콘의 군상』을 놓고 빙켈만은 육체의 고통과 정신의 위대함의 극치라고 말한다. 그는 이 작품의 가장 내면적 ․ 통일적인 구상에서 출발하여, 자세와 표정이 갖고 있는 ‘고귀한 단순함과 정태적인 위대함’(edler Eibfalt und stille Größe)을 추체험적으로 파악한다. 이와 관련하여 『모방론』에서 주목되는 두 번째 측면은 미의 정신성에 대한 강조이다. 그에 의하면 이 군상에서 표현된 위대한 영혼은 아름다운 자연을 단순히 모방하는 차원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이것은 예지가 예술에 손을 뻗쳐 평범한 영혼 이상의 것을 불어 넣은 것이다 또 그리스의 걸작 속에는 가장 아름다운 자영 뿐 아니라 자연 이상의 것, 즉 오성에 인도된 상(像)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자연의 이상적 미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예술관찰의 새로운 방법과 미에 대한 정신적 해설은 주저인 『고대미술사』에서 전면적으로 발전되었다. 방법적 측면에서 보면, 이 미술사는 그의 소위 ‘예술미의 감득능력’과 ‘기술’을 수단으로 하여 각 민족들의 미술양식이 갖는 차이를 풍토적 환경으로부터 설명하고, 그 기원 ․ 성장 ․ 발전 및 몰락의 각 단계 속에서 전개되는 유기적 전체로서의 양식의 변천을 정신의 동향과 결부시켜 이해하려 했던, 참으로 획기적인 저작이었다. 빙켈만은 이 저작에서 그리스 미술을 소재로 하여 일종의 신플라톤주의적인 미론(미의 해석)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고의 미는 신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적인 미의 개념은 통일성과 비분할성의 개념에 의해 물질로부터 구별되는 최고 존재자에 일치 ․ 적합하는 정도가 클수록 보다 완전하게 된다.” 최고의 미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묘사를 넘어서 있고, 또한 일체의 인간적 감정은 전혀 표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적 미에는 그 본질적 요소로서 형태가 나타나고, 또한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상적 형태는 신의 속성을 반영한 단순하고 통일적인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타원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상미(理想美)의 형태는 도덕성의 현현으로서의 ‘고요함’으로만 표출되며, 이때에 비로소 감동적인 미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러한 최고미 ․ 이상미 ․ 검동미 등의 개념들 간에는 모순이 존재한다고 지적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빙켈만은 예술을 비속한 목적과 단순한 자연모방으로부터 구별해내고, 작품과 그 역사 속에서 정신의 현현을 찾으려고 했던 점에서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2) 레싱 (Gotthold Ephraim Lessing, 1729~81)
계몽기의 비평가로서 레싱은 어디까지나 합리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당시의 경직된 합리주의의 틀을 부수고 질풍노도 시대로의 길을 열었다. 그의 비평 활동 중에서 우선적으로 꼽히는 것은 시의 명확한 한계를 설정했다는 점이다. 멘델스존과 같이 저술한 『포우프 론』(pope ein Metaphysiker! 1754)에서 그는 . 철학과 시의 한계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형이상학적 사고의 체계적 질서와 창조의 자유로운 환희는 서로 섞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우화론』(Abhandlungen über die Fable, 1759) 과 『에피그람에 대한 주석』(Anmer Kungen über das Epigramm, 1771)에서, 이러한 장르의 개념규정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각각에 고유한 형성법칙을 도출해내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탐구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조형예술과 문예의 한계에 대해 논한 『라오콘』(Laokoon oder über die Grenzen der Malerei und Poesie, 1766)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라오콘의 군상』의 작가가고민의 노출을 피한 것은 빙켈만의 해석처럼 위대한 영혼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태가 추악하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며, 이에 비해서 베르질리우스가 라오콘으로 하여금 절규하게 했으며 이에 비해서 베르질리우스가 라오콘으로 하여금 절규하게 했던 것은 그것이 시의 미감(美感)을 해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형예술(회화)과 문예는 각기 표현수단의 상이함에 따라 표현의 대상도 달리한다. 공간상의 형상과 색채를 수단으로 하는 회화는 병립적 대상으로서의 물체(Körper)를 본래의 모방대상으로 삼고, 시간상의 분절음을 수단으로 하는 문예는 계기적 대상으로서의 사건전개(Handlung)를 본래의 모방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이 견해 자체는 이미 뒤보스, 디드로가 어렴풋이 지적하고 있던 것이어서 레싱의 독창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라오콘』은 그의 선행자들이 여전히 “시는 회화처럼”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데에 비하여, 양자의 구별을 처음으로 중심문제로 삼고 문예의 독자성에 대한 자각을 촉진했다는 점, 또한 그 수단상의 제약이 초래한 문예의 표현상의 특징들을 상세히 탐구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다음으로 『함부르크 연극론』(Hamburgische Dramaturgie, 1767~1769)은 전면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탁월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연극의 본질을 깊이 파악하고 있는 책이다. 그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에 대한 정의와 카타르시스의 개념에 대해 해석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에 따르면, 비극적 정서로서 제시된 동정과 공포는 서로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고, 공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동정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정서의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것은, 비극의 궁극적 목표가 도덕적 교화에 있는 한, 과격한 정서가 덕성에 맞는 것이나 절도있는 것으로 전화하여 순화되는 것을 말한다. 비극은 한마디로 말해 이러한 동정을 일으키는 시이며, 동정을 환기시키기 위한 수단은 ‘내면적 그럴듯함’을 지닌 사건전개를 모방하는 것이다. 이 그럴듯함은 플롯과 역사적 사실의 합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성격의 인간이 어떤 상황 하에서 보여주는 행위의 필연적 연관에 의해서 확보된다. 연극의 규칙들은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의를 갖는다. 따라서 본질적인 것은 줄거리의 통일에 대한 규칙이고, 시간 및 장소의 통일은 이차적 요소에 불과하다ㅡ 이러한 비극관(悲劇觀)에 근거하여 레싱은 셰익스피어를 프랑스 고전주의보다 우위에 놓고, 후자의 영향 하에 있던 당시의 독일 연극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시의 도덕적 목적과 동정의 환기라는 비극적 효과를 자연스럽게 달성했던 천재 셰익스피어는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칙과 내면적으로 합치했던 것이다. 이러한 레싱의 셰익스피어 찬미에는, 합리주의가 무시했던 예술창작의 역사적 및 심리적 조건에 대한 통찰이 숨겨져 있고, 이러 점에서 합리주의에 의한 합리주의의 극복이 보여진다.

3) 하만(Johann Georg Hamann, 1730~1788)
난삽한 문체와 신비적인 사상 때문에 ‘북방의 마인(魔人)’(magusim Norden)이라고 불린 하만은 질풍노도 운동의 숨은 선구자로서, 합리주의에 기울어 있던 독일인의 정신생활을 신앙과 감정의 세계로 이끌었다. 『미학소론』(Aesthetica in nuce, 1762)에 의하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신과 인간의 관계와 유사하고, 신앙에 인도된 인간의 창조활동만이 맹목적인 자연에 빛나는 색채를 부여할 수 있다. 이러한 창조활동의 시원을 이루는 것은 언어이기 때문에 시(Poesie)는 인류의 모국어이다. 이렇게 언어를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활동의 발현으로 간주한 하만은 일련의 논문에서 그 기원을 문제 삼는다. 그래서 그는 언어가 궁극적으로 신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이러한 언어에서는 형상이 개념에, 감정이 오성에 선행한다고 생각했다. 후에 칸트 철학의 비판을 시도했던 『초비판』(Metakritik über den Puri-
smus der Vernuft, 1800)에서도 감정과 오성의 공통적 근거를 언어에서 찾고 있다.

4) 헤르더 (Johann Gottfried Von Nerder, 1744~ 1803)
하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헤르더는 질풍노도시기에 미평가로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도한 바움가르텐과 칸트의 미학에도 관심을 보이면서 광범위한 예술사상을 전개했다. 청년 헤르더는 당시의 쇠약한 독일문예에 창조적 풍부함을 가져다주는 데서 자신의 사명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근래의 독일문학에 대한 단편』(Fragment über neuere deutsche Literatur, 1767)과『독일풍과 독일예술』(Von deutscher Art und Kunst, 1773)등에서, 어떻게 해야 시가 창조적으로 될 수 있는가를 문제 삼았다. 그는 우선 언어와 시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 순수하게 드러나는 창조의 과정을 발생론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전술한 『단횬』과 『언어기원론』(Abhandlung über den Ursprung der Sprache, 1772)등에 의하면, 언어는 동물적인 감관의 외침이 아니라, 인간에게만 갖추어진 반성능력의 소산이며, 인간이 인간인 한 필요로 하는 영혼의 자기이해이다. 그 발전의 최초 단계는 ‘시적 언어시대’인데, 이 단계에서 언어는 직접성이 풍부하고 감동과 정열의 직접적 표출로서 생기에 가득 차 있었다. 언어의 창시는 한 민족의 시의 창시이고, 시는 민족의 삶의 근원에서 촉발된 감정의 거대한 외침이라 할 수 있는 가요(Lied)를 원형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기요와 같은 시의 원형은 ‘자연시’(Naturpoesie)또는 ‘민족시(Volkspoesie)라고 불리며, 성숙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예술시‘와 대비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근거하여 그는 고대 스코트랜드의 오시안 (Ossian)과 헤브라이 · 인도 등의 고대시를 관찰하고, 또한 각 시대에 걸친 여러 민족들의 민요를 수집하는 일에도 종사했다. 시가 창조적으로 되기 위한 조건을 탐구한 후, 헤르더는 각 시대의 탁월한 작품을 비교하였는데, 특히 그리스비극과 셰익스피어극과의 차이에 대해서, 전자를 규준으로 할 때 몰형식에 가까운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도 시대와 국민성에 간거한 고유의 개성적 형식이 구비되어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만년에 그는 광범위한 비교문학사를 구상하여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모든 창조적인 시는 민족과 천재에 의한 삶의 개성적 표현으로서 일체의 외면적 · 객관적 규범을 초월한 것이고, 그러한 한에서 또한 국민적 · 역사적 다양성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고찰 외에, 헤르더는『비평논총』(Kritische Wälder, 1769)의 제 1부에서 시의 효과에 대해 논의하고, 레싱의 『라오콘』을 비판하면서 시가 우리에게 작용을 가하기 시작하는 것은 단어의 음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의미에 의해서이며, 또한 그 의미가 공간적 ․ 시간적으로 작용하는 힘(Kraft)으로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상상표상의 다양성을 하나의 시적 전체로 통합하는 데에 시의 본질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비평 논총』의 제 4부에서 그는 바움가르텐이 창시한 미학이 앞으로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하면서, 그것이 미적 대상과 그 감각성의 문제도 다룰 것을 권유하고 있다. 헤르더에 의하면 미는 시각 ․ 청각 ․ 촉각 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 파악되기 때문에 여기에 대응하여 미적인 광학 ․ 음향 ․ 생리학으로 나누어지고, 이것들이 각기 회화 ․ 음악 ․ 조각의 이론으로 되어야만 한다. 조각을 촉각에 근거지우는 그의 특이한 사상은 그후 『조소론 』(plastik, 1778)에서 더욱 발전되었는데, 거기서는 감각 자체보다도 오히려 감각적 ․ 외면적 현상의 다양함이 내면으로부터 유기적으로 통일되는 곳에 미의 본질을 두고 있다. 예술을 하나의 유기적 ․ 개체적 존재로 간주하는 헤르더의 독자적 사상은 만년의『칼리고네』(Kalligone, 1800)에서 미학적으로 심도 깊게 추구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미를 생명으로 충만한 합목적성의 표출에 근거하는 것이라 하고, 그 표출의 근거를 대상과 향수자 간에서 일어나는 내면적 공감에서 찾음으로써 일종의 감정이입적 태도를 가지고 대상의 내면적 ․ 유기적 완전성을 향수할 때, 거기서 미적 체험이 성립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칼리고네』는 원래 칸트 미학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한 것이었지만, 이 주제 자체에 ei해서는 중요한 의의를 인정하기 어렵다. 결국 헤르더의 공적은 예술에 있어서 독창성의 의의를 높여 예술을 그 자체의 내면적 법칙성에 근거한 유기적 개체로 파악하고, 각 시대 ․ 각 민족으로부터 개개의 작가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형성의 다양성을 발견했다는 점, 또한 특히 시와 언어에 대해서 그 기원의 의의를 중시하고 시의 발생사적 이해에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 등에 있다할 수 있다.

5)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예술에 대한 괴테의 사색은 창작활동과 자연과학적 탐구에 불가분하게 결부되어 있고, 양자와 합일되어 한 인격의 전체적 형성에 이바지했다는 점에서 그 특색을 갖는다. 질풍노도의 전성기에 헤르더로부터 직접 커다란 감화를 받았던 청년 괴테는, 예술의 본질이 개성적 자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창조에 있음을 주장했다. 예를 들면 1772년의 건축론에서는, 미(schön)와 성격적(charakteristisch)이 대비되고, 참된 예술은 미라기보다 정신의 성격적 표현이며, 고딕사원의 ‘몰형식’ 속에야말로 독일적 감정의 참된 조형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예술론에서는 내용이 모든 것에
앞선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외면형식은 그 자신의 법칙성을 박탈당하고 있다. 그러나 괴테는 다른 한편 주관성의 지나치게 방종한 유출을 경계하면서, 이미 1775년의 연극론에서는 외면형식으로부터 구별된 내면형식, 즉 손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감득(感得)될 것을 요구하는 형식이 존재함을 지적하고, 내용과 시의 각종 형태 간에 충분한 적합성이 있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예술의 각 장르형식에 대한 내용의 적합성 문제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관심사였으며, 후에 이 관점에서 서사 문예와 극문예의 차이가 논의되고, 또한 조형예술의 대상이 논의되었다. 이전의 연극론을 전후하여 플로티누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 특히 샤프츠베리에 깊이 경도되고 또한 자연의변형(Metamorphose)에 대하여 독자적 관점에 도달한 괴테는 자연과 예술은 하나의 거대한 전체를 이루고, 그 소산은 궁극적 목적을 자기자신 속에 갖는 자존(自存)하는 유기체이며, 거기서는 전체에 의해 개체가 규정되고, 어디서나 동일하게 작용하는 하나의 법칙성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상은 이탈리아 여행에서 얻은 고전미술의 체험을 통해 훨씬 더 확고해졌다.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훌륭한 예술작품은 동시에 자연의 최고의 소산이며, 참된 자연법칙에 따르는 사람에 의해 생산된다.” 이탈리아 여행 직후에 쓰여진『단순한 자연모방, 마니어, 양식』(Einfache Naturnachahmung, manier, Stil, 1789)에서는 이 세 가지 방식의 예술적 형성이 단계적으로 발전한다고 설명하고, 최고 단계로서의 ‘양식’에서 예술은 인식의 가장 깊은 기초 위에 서서 사물의 본질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괴테는 이러한 사상을 점차 심화시켜가 마침내는 예술창작을 자연의 생산 활동 자체의 발전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그의 자연해석에 따르면, 모든 자연적 소산은 최고의 완성을 향하여 부단히 발전하는 근원적 ․ 보편적 형성력이 외부 조건의 특수성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빙겔만』(Winckelmann,1805)에서 괴테는 자연 최후의 발전 단계에서 인간이 생겨났는데, 자연은 보다 고차적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상승하여 결국 인간을 통하여 예술품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보편적 형성력의 소산으로서의 자연 및 예술은 그 특수성 ․ 개별성에도 불구하고 항상 보편을 대표하는 것이며, 특히 예술품은 세계 전체를 반영하는 소우주(Mikro -komos)라고 간주된다. 이렇게 성숙기의 괴테는 예술의 객관성을 밝히는 데 주력했는데, 물론 이 경우에도 정신적 창조성의 의의가 간과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최고의 자연작품인 예술품의 우월성은 바고 그 정신성 속에서 찾아진다. 예를 들면 『프로필래엔 서론』(Einleitung in die Propyläen,1798)에서는, 예술가가 자연과 경쟁하여 정신적 · 유기적인 것을 창조하고, 그 작품에 자연적임과 동시에 초자연적이라 할 그러한 내용과 형식을 부여할 것을 요구한다. 『디드로의 회화론』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예술은 자연과는 다른 고유의 깊이와 힘을 가지고 있고, 예술가는 그를 탄생시킨 자연에 대한 보답으로써 제2의 자연, 그러나 느껴지고 사고되어지며, 인간적으로 완성된 자연을 제작한다는 것이다. 『수집가와 그의 친구』(DerSammler und die Seinige, 1798)에서 괴테는 인간이 사고하고 느끼는 하나의 전체임을 강조하고,예술은 인간성의 이러한 풍부한 전체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괴테에게 있어서 예술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정신적 창조성에 있었지만, 청년기의 주관적 경향에 비하여, 말년의 그는 예술적 천재의 창조활동에서 세계의 근원적 생산 법칙이 최고도로 발현됨을 인정했다. 또한 노년의 괴테는 예술의 상징적 의의를 중시하는 동시에 세계문학론과 자연의 변형설에 근거한 문예장르론에서 독자적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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