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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Marxist economics in Japan)

역사적 배경 Historical Background

일본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20세기 초반에 최초로 도입되었다. 일본 사회민주당은 1901년 결성되는 날에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이 널리 유포되는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주로 강단 밖의 활동적인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산당 선언》의 최초 일본어 번역은 1904년 당의 주보(週報)에 실렸으며, 《자본론》의 요약·소개는 1907년에 출판되었다. 반면 일본인들의 독자적인 다른 책들은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을 사회주의의 기초로서 소개하려고 하였다.
당시 마르크스주의는 1868년 명치유신 이후 급속히 일본으로 수입되었던 일련의 유럽(주로 독일)의 사상 및 제도들 중의 하나였다. 명치유신이 일본 경제구조에 끼친 변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일본 마르크스주의자(이하 참조)들 사이에서 몇몇 주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초기 유럽 자본주의의 상대적으로 느린 성장이나, 그 후의 미국이나 유럽의 성장률에 비해 전례 없는 자본주의적 확장과 외국무역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들 구(舊) 자본주의 경제들과는 달리, 일본의 산업자본주의는 비록 산업기술과 기술지식의 수입에 주로 의존하였으나, 일본 자본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산업과 경쟁할 수 있게 하는 근대적 공장, 항만 그리고 광산의 수요에 대해 건설을 떠맡은 명치 정부에 의해 직접적으로 제공된 하부구조(infrastructure) 위에 주로 세워졌다. 제도적 구조의 수입도 곧 뒤따랐는데, 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의회 권력이 의회 아닌 천황이 직접 책임지는 행정부에 의하여 통제되고 제한되는 정체(政體) 모델을 제공한 데에는 특히 프러시아의 영향이 컸다. 명치헌법은 어떠한 본질적인 권력의 변화도 수반하지 않는 '근대화'를 지향하였으며, 비스마르크의 독일은 적당한 모델을 제공하였다. 민족적이며 역사적인 발전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독일 '역사학파'는 당시 사회·경제적 사고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는 대학에서 곧 인기를 잃어버렸던 고전 정치경제학의 자유방임 정책보다는 강력한 개입주의적인 일본정부에 명백히 더욱더 적절한 것이었다. 한편 1894∼5년의 청일전쟁과 1904∼5년의 러일전쟁을 통한 일본 자체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으나, 여전히 엄청난 비율의 소작인들과 농촌실업자들에 의해 억제되는 궁핍화된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었다.
러시아 혁명은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사회주의 운동에 관한 새로운 관심과 지원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공산당은 1922년에 결성되었고, 이 기간 중에 사회주의자, 인민전선, 노동자와 농민의 당들이 잇따라 형성되었다. 일본 자본은 독점화 과정을 강화함으로써 세계 공황에 대응하였다. 오늘날 일본 자본주의의 특징인 '재벌'은 러일전쟁 이후 형성된 카르텔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금융자본이 현저하게 완성된 것은 전쟁 기간 동안이었다. 비록 이들 대기업들의 성장이 노동조합을 급속히 발전시키고 성장시켰으나, 임금과 노동조건은 여전히 농업과 어업에 고용되어 있으면서, 노동인구의 거의 절반을 구성하는 도시의 다수 산업예비군과 함께 (제조업 종사자는 20% 미만임.) 매우 후진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Itoh, 1980, p. 16) 사회주의 정당들이 소작인과 지주들 간의 투쟁, 보통 선거권의 주장, 노동조합의 문제제기를 시작한 한편,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최초로 대학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새로이 신설된 경제학부뿐만 아니라 정규 경제학부가 없는 대학에서의 교수직도 독일에서 교육받고 전전(戰前), 혹은 전후 독일의 융성했던 마르크스주의적 문화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종종 돌아갔다. 마르크스주의 저작들의 번역은 일본 자본의 성장과 필적하는 비율로 급증했다. 1920년대 초반까지는 세 권의 《자본론》조차도 일본어로 번역되어 나오지 않았던 반면에, 1933년 무렵에는 세계 최초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완전한 전집과 함께, 다른 번역본과는 비길 수 없는 상세한 색인이 첨가된 일본어판이 출판되었다. 1930년대의 가혹한 정치적 억압이 일본 마르크스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거의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대학에서의 그들의 지위를 상실했으며, 중·일 간의 충돌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자 대량검거와 검열로 인하여 대학 밖에서의 얼마간의 효과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발전도 궤멸되었다.
전후 정치적 운동에서의 사회주의적 발전이 일본 자본주의가 급속히 확대됨에 따라 실패하자, 강단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정치적 운동들로부터 크게 괴리되었다. 동시에 마르크스주의는 잠시동안 사실상 정통파적 관행이 되면서 경제학부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학문적 교류가 증대함에 따라 신고전학파와, 얼마간은 케인즈주의 경제학이 또한 세력을 잡게 되고, 마르크스주의와 '근대'(즉 비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두 부류 학파가 이제는 거의 비슷한 세력이 되었다. 두 학파는 서로 고립된 채로 더욱 발전해 왔으나, 대부분의 일본 대학에서의 기초적인 교육은 마르크스주의와 비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모두에 이루어져서, 서구와는 달리 대부분 일본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는 마르크스주의의 원리를 알고 있었다. 이는 특히 수학적인 분야에서 약간의 흥미로운 절충적 발전을 초래했다. 코시무라(1975)는 수학적 모형을 사용하여 마르크스의 재생산 표식을 불비례 공황을 고찰하는 데에 확대하였으며, 오키시오(1963, 1977)는 이윤율 저하 경향과 산업 예비군의 증대를 모형화하였다. 좀 더 포괄적인 방식으로 모리시마(1973)는 마르크스주의를 폰 노이만 성장이론에 결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계량경제학적 기법도 몇몇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그들의 경험적 작업에서 사용하였다.

논쟁 The Debates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일어났던 일본경제의 성격에 관한 논쟁은 20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것과는 정치적 의미를 달리 한다. 코민테른은 일본에 닥쳐오는 다음의 주된 전환이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이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기 이전에 부르조아 혁명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일본 공산당은 명치유신이 일본에 자본주의를 가져오지 못했으며 여전히 일본은 기본적으로 봉건사회라고 주장하면서, 1932년에 종국적으로 후자의 입장에 도달하였다. 이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강좌파(Koza-Ha School;봉건주의자)로 알려졌으며, 노동파(Rona-Ha School;노동자와 농민)는 이에 반대했다. 이들의 이론적 입장은 공식적인 공산당의 외곽에 있는 다양한 사회주의 제정당의 좌익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들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강좌파들은 일본국가의 절대주의적 성격을 지적하였는데, 이는 사구 자본주의 국가들과 동일하게 개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명치유신은 단순히 봉건적 토지제도의 몇 가지 개혁에 불과한 것으로 주장되었는데, 이를 통해서 부상하는 자본가 계급이 봉건적 토지소유자들과 동맹을 맺어 서로 화해하게 되었고, 여기서 지주는 그들의 지배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고율지대가 계속 존재하고, 대부분이 물납으로 이루어지며 궁핍한 농업부문이 수적으로 압도적이라는 것은 농업노동자의 봉건적 착취가 일본에서의 잉여 유출의 주된 형태라는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었다. 반면 노동파는 명치유신을 일본의 부르조아 혁명으로 보았는데, 명치유신 이후에 봉건적 착취보다는 자본주의적 착취가 일본 경제 내에서 유세하게 되었고, 농민의 급속한 프롤레타리아트화와 함께 계급구조가 변화했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점령에 의해 실시된 토지개혁의 결과 일본이 결국 자본주의화 되었는가 하는 데 대한 강좌파 내부에서의 유사한 논쟁이 있었다. 쿠리하라는 토지개혁의 결과 지주계급은 소멸하였지만 이것이 농업에서의 자본주의적 발전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농업 생산관계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 통제는 국가 독점자본주의의 한 형태가 위로부터 부과된 것을 의미했다. 정통 강좌파의 이론가들은 이러한 견해를 기각했는데, 왜냐하면 노동파의 비판에서와 같이, 만약 전후의 토지개혁이 위로부터 어떠한 형태로든지 자본주의적 발전을 가져왔다면, 이전에 명치정부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과 불일치한다. 반면에 만약 명치유신이 혁명주체가 결여되었으며, 위로부터 이루어진 재조직화였기 때문에 부르조아 혁명이 아니었다면, 이는 또한 점령군에 의해 이루어진 전후의 변화에도 적용된다. 사실상 그들은 점령이 그들의 일본이 여전히 전자본주의적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고 주장했다. 즉 일본은 절대주의 구가의 협조를 얻은 미국 제국주의의 통치에 의해 지배되면서 반봉건적 구조를 그 내부에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견해는 부르조아 혁명의 정치적 우선권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러한 이론적 입장은 일본 자본주의가 급속히 성장하여, 1950년대부터는 일본 자본주의 또한 제국주의적 힘을 지니게 됨에 따라 그 현실적 근거를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공산당 내에서의 수정주의적 경향의 발전은 당 지도부 사이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유로코뮤니즘에 접근하는 입장의 발전이 경제의 특정 부분을 국가 독점자본주의라고 했던 초기의 규정을 뒤따를 수 있는 한, 이러한 원래의 입장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편, 전후 농지개혁은 당연하게도 노동파 이론가들에 의해서 대지주의 권력에 대항하여, 자본주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 사적 토지 소유권의 자본주의적 개혁이라고 분석되어졌다. 특히 이 입장은 일본에서의 다음의 민주화 단계로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관되게 주장해 온 사회당의 좌익에 의해서 채택되었다.
일본 경제의 성격, 명치유신과 전후개혁의 본질을 둘러싼 논쟁에 있어서의 두 가지 관점은 그 당시의 방법론 논쟁을 통하여 보다 명확해졌고, 마침내 일본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우노(宇野)학파라는 제3의 그룹을 탄생시켰다. 그 두 가지 관점이란 첫째는, 강좌파로 하여금 일본 경제의 성격을 봉건적인 것으로 규정하게끔 만든 요소들은 오히려 일본 경제를 자본주의적 발전의 특정 형태라고 규정할 수 있게끔 해준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생산양식 및 그것의 운동법칙의 추상적 설명과 그것이 특수한 경제에서 취하는 특수 형태와의 관계에 대하여 의문이 발생했다. 둘째는 당의 정치적 입장의 동요를 반영하는 정통파(강좌파)의 이론적 관점이 동요하여왔다는 점으로부터 경제적 이론과 정치적 투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였다. 宇野弘藏은 《정치경제학의 원리》(1964)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다음과 같이 분석의 세 가지 차원을 명확히 구분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1) 《자본론》에서의 마르크스의 분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고 발전된 원리론. 여기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순수 경제적 운동법칙이 공식화될 수 있다. 우노는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19세기 초반부터 중반 사이의 영국 경제를 표준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그랬던 이유는 그 시기의 영국 경제는 순수한 자본주의 경제의 전형적인 경우(paradigm case)를 향해 발전하고 있었으며, 결국 그러한 경제로부터 기본법칙의 추상화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원리론은 현실경제와 완전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은 하나의 추상이었다.
(2) 분석의 다음 차원은 자본주의 발전의 운동법칙이 세계에서, 그리고 제 정책을 통해 작동해 온 역사적 제 형태의 단계론으로 전개되었다. 우노는 여기서 세 단계를 상정했다. 즉 양모공업에 기초한 영국 상업자본이 지배적이었던 중상주의 단계, 면직공업에 기초한 영국 산업자본이 지배적이었던 자유주의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국뿐만 아니라 독일과 미국에서의 중공업의 발전에 기초한 금융자본이 지배적이었던 제국주의 단계가 그것이다.
(3) 셋째로 경험적 분석의 차원에서는 특정국가의 경제발전이 고려되며, 이것은 경제적 요인만이 아니라 정치적 요인에 대한 분석도 필요해지는 이행기의 분석에 적용될 수 있다. 우노는 제1차 세계대전이래 전세계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로 접어들었고,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의 내부와 외부에서의 사회주의적 세력 간의 정치적 대결이 정책을 규정하기 때문에 세계는 더 이상 자본주의 발전의 순수한 단계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이와 같이 분석의 세 차원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이 《자본론》에서 묘사된 자본주의 발전의 형태를 따르지 않았을 때 정통파 이론이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후자는 원리론의 차원이었지만 일본 자본주의 발전은 일본 농업 및 계급 구성의 특수한 성격이 존중되는 경험적 분석의 차원에서 파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우노학파는 이 새로운 방법론을 가지고 가치론과 공황론에 흥미로운 기여를 하였고(→경제위기), 대부분의 일본 마르크스주의와는 달리 교조주의로부터 탈피라는 건전성을 과시하였다. 일본에서 우노학파와 여타 이론을 분리시키는 주요한 영역은, 경제학은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운동과는 독립적인 것이라는 우노의 주장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분명히, 그 학파의 구성원들 중에는 물론 사회당의 좌익에 참가하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 자신들이 사회주의적 이행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주요 임무라고 믿고, 학문적 영역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연유한다.
이러한 분리와 그것이 그들의 작업에 부과한 한계는 분석수준의 방법론적 분리 그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자본주의 운동법칙의 해명이라는 협소한 관점은 필시 계급투쟁의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우노는 그러한 과제를 경험적, 정치적 차원으로 위임한다지만, 다른 학자들은 계급투쟁은 생산양식이 그 자체를 재생산하는 과정에 내재하고, 따라서 그들의 개념규정 안에 포함되어야만 하다고 주장하였다. 우노가 원리론의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위기의 기초라고 설명한 노동력의 상품형태에 존재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단지 계급투쟁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처럼 계급투쟁을 자본주의 운동법칙의 내생변수로 취급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경향은 이러한 점에서 현재의 세계경제를 보다 풍부하게 분석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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