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책 처음으로 | 사전 | 자유게시판 | 회원자료 | 로그인

 
마르크스주의 | 인물 | 정치경제학 | 미학 | 철학 | 한국현대사회운동 | 한국사회주의운동가

       ■ 의견바로가기

[인터내셔날 ] (Internationals, the)

국제 노동자 연합(1864∼76) 제1 인터내셔날은 노동운동이 1848∼49년 사이의 패배를 겪고 난 뒤에 다시 부활되었던 서구 및 중부 유럽을 기반으로 조직된 국제적인 노동계급의 동맹이었다. 비록 런던과 파리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세워지기는 했으나, 1863년의 폴란드 민족운동과 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마르크스(1864∼72)와 엥겔스(1870∼72)는 지도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르크스는 '실제적인 "전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즉시 인정했으나 '새로 시작되는 운동이 이전과 같은 대담한 발언권을 확보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1864년 11월 4일)임을 알고 있었다. 이 새로운 운동은 1847년과 1852년 사이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지도한 공산주의자 동맹을 기본 골격으로 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푸루동이나 마찌니[Mazzini], 그리고 라샬레와 같은 추종자들은 물론이고 영국 노동조합의 자유주의적 지도자들과의 협력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회사의 규칙을 받아들였다. 이 기구는 개인들뿐만 아니라 지역적 및 민족적 조직과도 관계를 맺었다. (정기적인) 연차 총회에서 선출된 협의회는 1872년까지 런던에 그 본부를 두고 있었다.
인터내셔날의 초기 몇 년 동안 협의회에서 제기된 거의 모든 문안들의 초안을 작성했던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 의한 직접적인 동의와 구체화된 행동을 허용하는 지점'에서 자제하는 입장을 취했다.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 1866년 10월 9일) 이러한 일 중에는 파업파괴자들을 수출하는 데 반대하는 행동과 아일랜드의 페니언 감옥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항의, 그리고 반전(反戰) 투쟁 등이 있다. 인터내셔날이 발전함에 따라 마르크스는 점증하는 사회주의적 성격의 요구들을 수용,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1868년에는 수가 줄어들고 있던 푸루동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유(公有)에 대한 특별한 언급도 없이 시작됐던 IWMA[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는 광산, 철도, 경작지, 숲, 그리고 통신 수단의 집단적 소유를 선언했다.
1871년의 파리 코뮨은 IWMA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의미한다. 엥겔스는 파리의 춘계 혁명을 '비록 인터내셔날이 파리 코뮨을 일으키는 데 손가락 하나 움직이진 못했다 하더라도 지적인 면에서 인터내셔날의 후예였음은 의심할 바 없다.'고 기술했다.(조르게에게 보낸 편지, 1874년 7월) 인터내셔날의 프랑스 지지자들은 주로 푸루동주의자들로서 인터내셔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협의회는 국제적 단결을 위한 운동을 조직하였다. 마르크스는 협의회의 다수에 의해 하나의 칙서(勅書)라고 명명된, 코뮨을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저작 《프랑스 내전》을 집필하였다. 노동계급의 선거권의 확대와 더불어 코뮨의 경험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로 하여금 정치적 활동을 위한 효율적 형태를 갖출 필요성을 강조하게 했다. 이들의 주도 하에 1871년 9월에 런던 총회에서 IWMA는 최초로 '노동계급의 정당으로서의 조직'을 지지하였다.(→당) 그 목적은 마르크스가 초안을 잡고 1872년 인터내셔날에 헤이그 총회에서 채택한 새로운 규칙 7a조에 포함시켰다. 그 조항은 '정치권력의 장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큰 임무이다.'라는 점을 상술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바쿠닌과 그의 지지자에 의해 반대에 부딪혔는데, 이들은 인터내셔날에서 무정부주의적 전제(→무정부주의) 아래 정치로부터의 자제를 주장하고 있었다. 바쿠닌의 사회민주주의 국제동맹은 1868년에 IWMA에 가입할 것을 요청했다. 이들이 갖고 있던 강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다음해에 IWMA가 '모든 분파들을 IWMA의 이론적인 구상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해도 좋다.'는 원칙 하에 바쿠닌의 동맹을 받아들였다.(《제1 인터내셔날 자료집》3권, pp.273∼7, 310∼11) 마르크스 지지자들과 바쿠닌 지지자들 간의 투쟁은 1869년에서 1972년까지 열린 인터내셔날에서 가속화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인터내셔날이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에서 대립을 보였다. 바쿠닌은 협의회의 '권위주의'를 공격했으며, 동시에 인터내셔날을 계급적으로 조직된 비밀 결사체나, 그 자신이 조정하고 있는 협회의 산하에 두고자 했다. 국가의 탄압과 바쿠닌주의자들의 방해라는 내우외환에 직면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협의회의 권한을 강화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바쿠닌은 영국의 실무진의 후원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등에서 자신의 반대에 대한 지지를 획득했다.
1872년의 헤이그 총회에는 유럽 13개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65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이 인원은 예전에 비해 수적으로 아주 많은 것이었다. 이 총회는 협의회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인터내셔날 내에서 비밀 조직을 결성하려 했던 바쿠닌과 그의 동료 기욤므[Guillaume]를 추방했다. 총회는 또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그들의 지지자들의 이름으로 제안된 협의회 본부의 뉴욕으로의 이전을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된 중요한 동기는 런던에 있는 한, 프랑스의 블랑키주의자들(→블랑키주의)의 세력권 내에 포섭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패배한 바쿠닌주의자들이 그들과 동맹을 맺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IWMA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1876년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마침내 해체되었다. IWMA의 세력을 잡으려고 했던 인터내셔날의 '반권위주의자들'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으나 1877년에는 무참히 분열되었고, 종국에 가서는 순수한 무정부주의자들만의 잔당 회의로서 1881년까지 연명되었다.
다음해에는 거의가 어느 정도나마 마르크스주의적 성격을 띤 국내의 노동당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것은 IWMA가 특히 1871∼2년에 이루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어려운 과제였다. 1883년에 죽을 때까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제2 인터내셔날의 창립총회 전야까지도 '쓸모 없을 정도로 불가능한 국제적 조직에 얽매이는 것'에 반대하였다.(로라 라파르그에게 보낸 편지, 1889년 6월 28일) 그러나 그 뒤에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날에 중요한 지원과 충고를 해주었다.

제2 인터내셔날(1889∼1914)은 188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국제 노동자 회의에서 설립되었다. 제1 인터내셔날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본질적으로 유럽의 노동운동에 기반을 두었으나 이는 선행자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았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도권을 잡았으며 여기에 속한 당들은 대중의 기반을 이미 구축했거나, 또는 구축해가고 있는 과정에 있었다. 1904년에 이들은 무려 21개국에서 선거에 참여하여 660만표를 획득하였으며 의회에서 261석을 얻을 수 있었다. 1914년에는 400만명의 당원을 확보하였으며 유권자는 1200만이 되었다. 제2 인터내셔날은 기본적으로 당과 노동조합의 방만한 동맹이었다. 1900년에는 직접적인 기능보다도 기술적이고 중재적인 역할을 하는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이 브뤼셀에 설치되었고, 상임 비서는 카밀 휴즈만이었다. 다른 사상적 조류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 인터내셔날에 속했던 정당들 중에서 영국 노동당(1908년에 승인된)을 제외하고서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들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여기에는 1893년과 1896년 총회에서 정치투쟁에 관한 문제로 패배한 뒤에 인터내셔날로부터 축출되었던 무정부주의자들도 초기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1895년 엥겔스가 죽은 후 제2 인터내셔날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공식적 성격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두 이론가는 카우츠키와 플레하노프였다.
인터내셔날은 4년에 2회씩 정기총회를 열어 1차 회의에서는 공동의 행동을 결정하고, 2차 회의에서는 정책의 문제를 놓고 토론했다. 1차 회의에서는 1890년부터 8시간제 노동을 지지하여 메이데이(노동절)때마다 모든 나라에서 시위를 조직할 것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우파와 좌파, 그리고 중도파 간의 투쟁은 처음에는 국내 정당들내에서 시작되었으나 곧 국제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1900년 파리 총회에서는 '밀레랑주의[Millerandism]'의 문제를 놓고 날카롭게 대립했다. 즉 프랑스 사회주의자인 밀레랑이 전년에 했던 것처럼 부르조아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결국에 가서는 당이 승인만 하다면 그러한 타협의 단계가 '일시적인 편의로서 … 예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카우츠키에 의해 기초된) 타협안이 채택되었다.(브라운탈[Braunthal]에 의해 인용됨, 1966, 1권, pp. 272∼3)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다음 총회에서는 일년 전에 드레스덴에서 열린 독일 사회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통과된, 베르슈타인의 수정주의적 이념을 비판하는 결의문에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해 토론이 벌어졌다. 이것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인 베벨이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지도자인 죠레스[Jaur s]의 비난에 저항하여 그의 당을 옹호하는 전략상 중요한 논쟁이었다. 죠레스의 이론적 경직성은 선거에서의 지지율 신장과 왕권 전제체제를 변화시킬 수 없는 무기력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총회는 드레스덴 결의문에 25 : 5의 지지를 보냈고 12명은 기권하였다. 그러나 수정주의자들은 독일당으로서 인터내셔날에 남아 있었으며 그 양자는 자신들의 이념을 침투시켰다.(→수정주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다른 중요한 문제는 식민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식민주의는 보어[Boer]전쟁 당시인 1900년의 인터내셔날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7년 후에 열린 슈투트가르트 총회에 참석했던 식민지 대표들 대부분은 '어떤 상황 하에서나 모든 식민지 정책을 일률적으로 거부할 수만은 없다.'고 주장했다. 즉 여기에는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개화를 목적으로 한' 식민정책의 경우를 들 수 있다.(브라운탈, 앞의 책, p. 318) 격렬한 논쟁을 벌인 후에 127 : 108로 이 주장은 부결되었다. '자본주의적 식민지 정책은 그 본질상 토착민들을 노예화시키고 노동을 강요하며 뿌리를 근절시킨다.'는 결의문이 통과되었다.(브라운탈, 앞의 책, p. 319)
반전투쟁이 인터내셔날의 핵심적인 투쟁이었으며 인터내셔날의 초창기부터 총회의 결의문에 반영되어 왔었다. 이 문제는 전쟁의 먹구름이 유럽을 뒤덮고 있을 때인 1907년에 열린 슈투트가르트 총회의 중심적인 문제였다. 여기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마지막 결의문-토론과정에 있어서의 심각한 차이에도 불구하고-은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을 촉구한 후에 계속되었던, 레닌과 룩셈부르크 그리고 마르토프에 의해서 제출된 수정안에 흡수되었다. '어느 곳에서든 전쟁이 발발한 경우에는 전쟁의 빠른 종식을 위해서 개입해야 하고, 대중들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전쟁에 의해서 생기는 모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위기를 전력을 다하여 활용해야 하며, 자본주의적 계급지배를 하루라도 빨리 종식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노동운동"의 임무이다.'(브라운탈, 앞의 책, p. 363) 이것은 다음에 계속되는 두 번의 총회에서 재확인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한 해 전에 열린 바젤의 정기총회는 평화를 위한 시위가 되었으며 -또 다시 만장일치로-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혁명적 투쟁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2년 후 1차 대전의 발발은 그러한 말들이 '깊이 내재된 민족주의를 폭로하는
두터운 허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Deutscher 1972, p. 102) 제2 인터내셔날의 주축이 되었던 정당들은 자국의 정부에 의해 수행되는 전쟁을 지지했으며, 그리하여 인터내셔날의 불명예스러운 붕괴를 유발시켰다. 이것은 자본주의 팽창의 절정이며 노동운동의 민족적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직 러시아, 세르비아, 헝가리 등의 당들-다른 당 내에 있는 소그룹들과 더불어-만이 인터내셔날에 의해 계속 지지되었던 원칙들을 고수하였다.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전쟁 중에, 특히 중립국에 있는 당들을 중심으로 제2 인터내셔날을 복구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인터내셔날 사무국은 네덜란드로 옮겨졌다. 그러나 1919년의 베른 회의는 그 해의 제2 인터내셔날의 잔영만 남은 모습으로 재구성되었으며(베른 인터내셔날), 다음해에 제네바에서 17개국이 참가한 총회가 개최되었다. 1921년에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USPD),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P ) 그리고 영국 노동당을 포함한 10여개국의 좌익 사회주의자들이 비엔나에 모여 '제2.5 인터내셔날'이라는 별칭이 붙은 사회당 국제 노동동맹('비엔나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것은 총괄적인 인터내셔날의 일단계였다. 1923년에 함부르크 총회에서 부활된 제2 인터내셔날과 결합하여 노동자 사회주의 인터내셔날을 결성했고, 이것은 1940년까지 그 기능이 지속되었다. 1951년 현재 존재하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날로 이어졌으나, 이는 세계에 퍼져있는 사회당 및 사회 민주당의 느슨해진 연합으로서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다.

제3 인터내셔날(1919∼1943). 1차대전이 발발하여 제2 인터내셔날이 해체되면서 레닌은 1914년 11월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제2 인터내셔날은 죽었다. 기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쓰러졌다. … 제3 인터내셔날이여! 영원하라. …' ('사회주의 인터내셔날의 위치와 임무', CW 28, p. 40) 이러한 제3 인터내셔날-일명 공산주의 인터내셔날 또는 코민테른[Commintern]이라고도 불린다.-은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중부 유럽에 혁명적 열기가 고양되던 시기에 볼세비키의 제창으로 1919년 3월 모스크바에 세워졌다. 1차 총회에서 레닌은 '국제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앞의 책, 28권 p. 477)고 선언함으로써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분위기와 기대를 표현했다. 그 후에 모든 '부르조아 민주주의를 대치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와 소비에트 권력의 인정'을 '제3 인터내셔날의 기본적인 원리'로 선언했다.(앞의 책, 31권 pp. 197∼8)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세계 연합(Degras 1971, 2권, p. 465)'은 비록 그것이 1935년 이후에 쇠퇴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존재를 통하여 공식적인 목적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1920년 7월∼8월 사이에 열린 제2차 총회에는 41개국의 당과 조직으로부터 대표들이 참석했고 프랑스 사회당과 독일 USPD에서도 참관인이 참석했는데, 이들 프랑스와 독일 사회당의 참석자 대부분은 그 해가 가기 전에 코민테른에 가입할 것을 제안하였다. 새로운 인터내셔날이 불안정한 사회민주적 요인들에 의해 해이해질 우려가 있다는 데 유의하여 총회는 엄격한 21개항의 가입 조건을 규정하였다. 가입을 원하는 모든 당들은 개량주의자와 온건 중도파들을 노동운동의 책임 있는 위치에서 모두 축출해야 하며, 군대 내에서의 체계적인 선전을 포함하여 합법적인 운동과 비합법적인 운동을 펴나가야 한다. 그 시대를 '첨예화된 시민전쟁' 시기의 하나로서 규정하면서 당을 중심으로 한 '철의 원칙'과 '가능한 한 최대한의 중앙집권화'를 요구했다. 즉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코민테른의 집행권 아래서 모든 내용이 결정되기를 요구했다.(Degras, 1권 pp. 166∼172)
코민테른은 그의 법령에 '백색인만을 위해서 존재했던 제2 인터내셔날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한다.'고 천명했다. 코민테른의 임무는 모든 유색인 노동자들을 포용하고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제2차 총회는 레닌이 기초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채택했는데, 이 테제는 민족 및 식민지 해방운동이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는 노동계급 운동과 소비에트 러시아와 반제국주의적 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강조하였다.(Degras, 1권 pp. 138∼44) 1920년에 쓰여진 레닌의 팜플렛 '좌익 공산주의-소아병적 혼란'에서 그는 코민테른에 있어서의 '극좌익적인' 경향과 대립했으며, 코민테른의 반동적인 노동조합 내에서의 작업과 의회 선거에 공산주의의 원칙적인 참여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그가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회의에서 목도했던 조류였다. 그때 그는 혁명의 파고가 퇴보하고 러시아 외부의 공산당들이 노동계급의 소수만을 대표하며, 근본적으로 러시아적 경험에 근거한 이전까지의 공세적 혁명 저술이 더 이상 서구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회의는 노동계급의 즉각적인 요구를 위해 투쟁할 국내외 노동계급 정당들의 통일전선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코민테른의 집행위원회와 제2 인터내셔날, 그리고 비엔나 동맹이 1922년 베를린에서 회의를 열었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는 데에는 실패했다.
1923년 10월에 독일 혁명에 대한 희망이 좌절된 이후로 코민테른은 자본주의의 상대적인 안정화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 뒤 몇 년 동안은 소비에트당의 당내 투쟁이 코민테른에서 전개되었다. 치열한 투쟁이 여러 번 전개된 후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저항과 앵글로 러시아 노동조합 전체 위원회, 그리고 1925∼27년의 중국 혁명에 적용되었던 전술과 전략이 패배하였고, 트로츠키는 1927년에 코민테른 집행부로부터 추방되었다. 1928년에 열린 코민테른 6차 총회는 대부분 부하린에 의해 초안된 포괄적인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제3기'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그 당시 사회민주주의는 '사회 파시즘'으로 비난되었으며, 그 지도자들과의 통일전선에 대한 제안이 거부되었다. 1931년에 코민테른 집행부는 파시즘과 부르조아 민주주의 사이에, 그리고 의회 형태의 부르조아 독재와 그것의 공공연한 파시즘적 사이에 선을 긋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점을 천명하였다.(Sobolev 1971, p. 313) 이러한 정책의 위험스런 결과가 특히 독일에서는 1933년부터 코민테른 전략 수정으로 발전하였다. 1933년 3월에 나치 독재의 확립에 뒤이어 코민테른 집행부는 코민테른에 가입된 모든 당들이 파시즘에 대항하여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와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통일된 행동으로 발전했다. 65개 정당에 속해 있던 300만이 넘는 공산주의자들(자본주의 국가의 785,000명을 포함해서)을 대표하여 1935년에 열린 7차이자 마지막 코민테른 회의는 노동계급 정당들의 통일전선과 파시즘의 물결을 저지하기 위한 보다 광범위한 인민전선으로의 확대에 유력한 실례를 만들어냈다. 보고문에서 디미트로프는, 이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부르조아 민주주의 간의 선택이 아니라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파시즘으로 대변되는 테러주의적인 부르조아 독재 간의 선택임을 강조했다. 코민테른의 새로운 전략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분쇄하기 위한 USSR과 서구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평화전선일 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대항한 스페인 공화국의 투쟁에 국제적 지지를 결집시켰다.
소련 공산당에 의해 항상 효과적으로 주도되던 코민테른은 1930년대의 스탈린의 숙청작업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스탈린의 정책에 의해 몇몇 지도자가 추방되었으며 1938년 폴란드 공산당이 해체되었다. 1939년 8월의 독소(獨蘇) 불가침 조약에 따라 코민테른은 서구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파시스트 국가 간의 근본적인 차이에 근거한 기존의 전략을 수정하였다. 1939년으로부터 1941년까지 코민테른은 전쟁 당시자는 모두가 부당하고 반동적이며 제국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1941년 6월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에 코민테른은 소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추축국들에 대항한 투쟁에서 서구와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코민테른은 1943년 6월에 소련 최고회의 상임간부회의 제안에 따라서 해체되었다. 그 상임간부회의는 크게 확대되어 있는 공산주의 운동이 과업을 수행해야 할 상황이 매우 다양하므로, 국제적 중심부에서 방향을 하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코민테른의 해체는 서구와의 동맹을 합리화하려는 스탈린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Claudin 1972)

제4 인터내셔날은 트로츠키의 제안에 의해서 제2 인터내셔날과 제3 인터내셔날을 '반혁명적'이라고 비난하던 소그룹의 트로츠키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소그룹으로 존재하다가 사분오열되었다.(→트로츠키주의)

■ 인접어

인류학
인민전선
인민주의
인식론
인종
인터내셔날
인터내셔날
일본에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임금
잉여가치
잉여가치와 이윤

뒤로
■ 의견

 



HOME - 후원방법 안내 - CMS후원신청 - 취지문 - 사용 도움말 - 회원탈퇴하기

2002 노동자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만들기 모임
120-702 서울시 중구 정동 22-2 경향신문 별관 202호 44
laborsbook@gmail.com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 www.laborsbook.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