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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엥겔스와 동시대의 정치] (Marx, Engels and contemporary politics)

맑스와 엥겔스가 그들이 살던 시대의 정치에 대하여 접근하는 방법의 밑바탕에는 노동자계급 혁명에 대한 기대와 그것을 고무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깔려 있었다. 그들이 이전 철학적 의식을 일단 청산하고 나자 맑스와 엥겔스는 다른 혁명적, 사회주의적 운동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공상적, 기독교적 및 진정한 사회주의 등의 이론들은 《공산당 선언》(제3장)과 다른 곳에서 비 혁명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어 기각되었다. 한편 동시대의 어떤 혁명운동들은 순수하게 정치적인 혁명에만 지나치게 좁은 관심을 가지며, 맑스와 엥겔스가 당연히 그에 수반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광범한 사회변혁을 무시하였다는 이유로 비판되었다. 그러므로 엥겔스는 항상 맑스를 도와 바쿠닌 및 무정부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또 나중에는 사회주의 혁명이 보다 선진적 서구에서보다는 전(前)자본주의적 러시아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였던 러시아의 트카초프(P.N.Tkachev)에 대하여 ‘아직 사회주의의 ABC를 더 배워야 한다’고 비판하였다('러시아의 사회관계에 관하여’).
트카초프의 인식을 거부하면서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그리고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서문)과 같은 저서에 일찍이 표현된 역사발전에 관한 일반적 개념을 고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치에 대한 실제적 접근은, 특히 이후의 맑스의 경력에서, 때때로 역사적 유물론의 엄격한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 같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이 (특히 맑스가)러시아의 발전을 평가하면서 그것을 1870년대와 1880년대 초기에 본질적으로 비맑스주의적 운동이 계기를 얻었다고 하는 경우에 그러하다. 맑스는 엥겔스와 트카초프와의 논쟁, 그리고 이전에는 많은 러시아혁명가들에 대해 불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러시아가 농민공동체를 통하여 특수한 사회주의로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인민주의자들의 인식에 호의를 나타냈다(→러시아 공동체). 비록 적어도 공식적 표현에서 무조건적으로 그러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산당선언》의 러시아어판(1882) 서문에 표현된 러시아혁명이 서구에서의 노동자계급혁명에 대한 신호가 될 수 있으며, 양자가 서로 보완적일수 있을 것이라는 맑스와 엥겔스의 소망은 사회주의를 위한 물질적-문화적 전제조건들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경제적으로 보다 선진적인 서구 국가들에서 노동자계급혁명이 성공할 것이라는 그들의 근본적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명백히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나쁜 영향 때문에 짜르 정부는 맑스와 엥겔스에 의하여 그들이 폐기하려고 하는 유럽 질서의 보루로 간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9년과 1863년의 각각의 혁명들이 러시아에 의하여 억압된 헝가리와 폴란드에 대한 그들의 동정은 그 나라들에서 민족운동의 사회적 성격과 전망보다는 국제적 차원에서의 지향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헝가리인, 폴란드인 또는 ‘문명을 낳는’독일인 들의 열망과 투쟁하고 있던, 주로 슬라브 및 동부유럽의 인민들의 열망은 ‘반혁명적’인 것으로 저주되었다. 이것은 주로 맑스가 1848년과 1849년에 편집한 일간신문인 《신 라인 신문》의 외국인 편집자로 있던 엥겔스에 의해서 행해졌다(→민족;민족주의).
엥겔스가 원래 헤겔로부터 도출한 ‘역사가 없는 사람들’에 관한 인식을 발표한 것은, 그 뒤 논설은 물론, 이 신문에서 였다. 이러한 범주 속에 포함되는 것은 바스크족(the Basques), 브레튼족(Bretons), 스코틀랜드의 게일족(Gaels), 체코인(Czechs), 슬로바크인(Slovaks), 크로아트인(Croats) 및 다른 남부 슬라브인들, 즉 ‘뒷날 역사발전의 수레가 되는 민족들에 의해tj 억압-저지당한 이전의 인구의 나머지 부분’, ‘마쟈르인의 투쟁’(NRZ, 1849년 1월 13일)이었다. 비슷한 근거에서 엥겔스는 슐레스빅 홀슈타인(Schleswig-Holstein)의 통제를 둘러싼 독일과 덴마크와의 1848년의 전쟁에서 독일을 ‘야만주의에 대한 문명의, 그리고 안정성에 대한 진보의 정당성’이라고 하며 지지하였다. (덴마크-프러시아의 휴전‘ NRZ, 1848년 9월 9일)
엥겔스가 어떤 민족을 가리켜 ‘역사가 없다’고 표현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주어진 언어, 문화 및 지리적인 분열 아래서는 그들 가운데 어느 것도 충분히 많은 수의 인구를 근대 경제의 발전에 적합한 조밀한 영역 안에 집중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관찰로부터 나왔다. 그러한 경제를 창조하는 데는 전국민적 기초 위에서 시장과 계급구조가 발전하여야 하므로 맑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적 후계자들과는 달리(→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대규모의 단일국가를 선택하는 대신 연방주의의 인식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첫 번째 《독일에 있어서의 공산당의 제 요구》는 ‘단일하고 분리불가능한 공화국’이었다. 이러한 열망과 더불어 1848년에 표현된 다른 열망들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1866년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독일의 승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대의명분에 유리한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시민계급을 집중시키는 모든 것은 물론 노동자들에게도 유리하기’(맑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1866. 7.27) 때문이었다.
비록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Austro-Prussian War)이 독일의 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선호되었던 수단은 아니었지만, 맑스와 엥겔스는 경우에 따라서는 전쟁 그 자체가 우연히 노동자계급 혁명의 발생을 촉진할 수도 있다고 믿었다. 1848년 그들은 폴란드가 짜르 억압자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본국에서의 혁명을 강화하기 위하여 러시아에 대한 혁명전쟁의 개시를 요구하였다. 그 이전에도, 엥겔스는 그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을 ‘문명의 진보를 위하여 중요하고 다행스러운 사실’이라면서, 마치 그가 ‘게으른 멕시코인들’로부터 ‘정력이 넘치는 양키들’이 캘리포니아를 정복한 것을 환영한다는 듯 서술하였을 때, 그는 군사적 정복을 잠재적 사회진보의 대행자로 보았던 것이 된다(‘민주적 범슬라브주의, I'NRZ, 1849년 2월 15일). 나중에 맑스와 엥겔스는 서구에서 중요한 경제적 공황을 기대하였으므로, 크리미아 전쟁의 발발은 ‘러시아의 대리인’인 팔머스톤과 그밖의 사람들에 의한 내키지 않는 전쟁의 냉혹한 수행이 ‘제6의 위대한 유럽의 힘, 혁명’(‘유럽전쟁’, NYDT, 1854년 2월 2일:《동양의 과제》P.220)의 개입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는 그들의 소망을 자극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러시아를 겁내는 토리당의 하원의원 데이비드 우어콰르트와 협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관한 맑스의 관심은 포르테에 대한 어떤 특별한 기호보다는 혁명의 이익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비슷한 고려가 1859년의 프랑스-오스트리아 사이의 전쟁에 대한 그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에 대하여 그는 북부 이탈리아를 하프스부르크가 통제하는 것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의 패배는 혁명의 가장 위험한 반대자인 두 유럽강국, 즉 러시아와 나폴레옹 Ⅲ세의 프랑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1870년의 보불전쟁에서 맑스는 프랑스의 패배를 환영하였지만, 그는 일단 보나파르트가 항복하고 나면 독일은 더 이상 방위전쟁을 수행하지 않고, 증대되는 러시아의 영향 아래 떨어질 위험에 처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1870년 9월에 국제노동자협회(IWMA)를 위하여 쓴 두 번째 연설문에서 맑스는 탁월한 안목으로 독일의 외교정책이 1914년까지 따르게 될 과정을 예견하였다. 즉 독일은 처음에는 러시아와 보다 긴밀한 연계를 맺게 될 것이며, 약간의 휴식 뒤에 보다 심화된, 보다 광범한 전쟁을 위한 준비를 할 것이다. 이번에는 ‘슬라브족과 로마 인종의 결합’에 대한 전쟁일 것이다.
맑스가 유럽제국(주로 프랑스의 제2제정)에 대하여 잘 사용하지 않는 용어인 ‘제국주의’를 준비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유럽 식민주의의 문제에는 그가 영국에 정착하고 나서 얼마 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비유럽세계에 대한 그와 엥겔스의 견해는 사회주의의 도래를 위해 길을 포장하는, 끊임없는 확장을 향한 원료자원 및 시장의 추구에 의해서 강제되어지는, 보편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라는 그들의 관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한 팽창은, 만약 그것이 없었더라면 노동자계급 혁명이 일어났을, 보다 선진적 지역에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연기하는 데 봉사한 반면, 맑스와 엥겔스는 태평천국의 난과 같은 대격변이 ‘오랫동안 준비되어 온 일반적 위기, 즉 해외로 확산되어 대륙에서의 정치혁명을 수반할 위기’(‘중국과 유럽에서의 혁명’. NYDT 1853년 6월 14일)를 재촉할 것으로 보았다.
맑스와 엥겔스는 ‘사악한’아편무역으로부터 인도 폭동에 따른 보복에 이르기까지, 동양에서 서구의 많은 정책에 대하여 강한 도덕적 비난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동양의 전통사회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낡은 중국’은 그 ‘완전한 고립’에 의해서만 보존되어온 것으로 보였다. 한편 맑스가 광범위하게 다루었던 인도에서의 생활은, 적어도 서구의 침입까지는, 끊임없이 ‘품위가 없고, 정체적이며 무위의’것이었다. 인도에 서의 동양적 전제주의는 고립된, 자급자족적 촌락경제에 의존하면서, ‘인간의 정신은 가능한 최소의 한계 안으로 제한한다.’ 그러한 질서의 경제적 기초를 붕괴시킴에서 영국이 간섭은 그러므로 지금가지 아시아에서 들어본 가장 커다란, 유일한 사회혁명을 낳았다. (‘영국의 인도지배’NYDT, 1853년 6월 25일) (→아시아적 사회).
그뒤에 맑스가 자본주의의 동양사회에 대한 충격에 관하여 쓴 글들은, 점차로 그 혁명적 성격을 강조하기보다는 그것이 초래한 파괴와 고통을 지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식민주의의 현상을 분석함에서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뒤에는 레닌도 그러하였지만, 식민지 모국의 노동자들이 제국의 전리품에 ‘매수될’가능성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엥겔스는 1858년 10월 7일에 맑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점점 시민계급으로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모든 나라에서 이 시민계급은 시민계급적 귀족의 소유와 시민계급과 나란히 하는 시민계급적 노동자계급이 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하고 있다’(→노동귀족). 엥겔스가 영국노동자들의 시민계급화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요인들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영국의 최초의 식민지’(맑스에게 보낸 편지, 1856년 5월 23일)였던 아일랜드의지위이다. 소유계급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길러진 영국노동자들과 이일랜드 이민 노동자들 사이의 적대감을 맑스는 ‘영국 노동자계급과 자본가의 무력성의 비밀’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이전에 아일랜드의 해방이 영국 노동자계급의 승리에 따를 것이라고 믿었었지만, 이제는 ‘영국 지배계급에 대한 결정적 일격(그리고 그것은 전세계에 걸친 노동운동에 대하여도 결정적일 것이다)은 영국이 아니라 아일랜드에서만 전달될 수 있다(Meyer와 Vogt에게 보낸 편지, 1870년 4월 9일).
그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노동운동은 맑스가 푸루동과 바쿠닌의 영향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있었던 제1인터내셔날 안에서 유용한 동맹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교의들을 거부함에서 그것은 맑스의 혁명적 정치를 지지하지 않았다. 맑스와 엥겔스 자신이 인식하고 있었듯이, 영국의 노동자들은 특히 10시간 노동법의 통과와 협동조합 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1840년대 중반에 약간의 이익을 얻었다. 마찬가지로 인민헌장(the People's Charter)의 많은 목표들은, 비록 차티즘 자체가 1848년 이후로 쇠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달성되었거나 달성될 것처럼 보였다. 인터내셔날의 최초의 몇 년 동안에 이루어진 1867년의 개혁법(Reform Act)과 노동조합 조직 조건의 선으로 영국의 노동 지도자들은 혁명적 전략보다는 오히려 개량적 전략의 채택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그들은 참으로 1872년의 헤이그 인터내셔날회의에서 맑스가 영국, 미국 그리고 어쩌면 네덜란드에서도 노동이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이것을 달성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라고 선언한 것에 의해서 다시 한 번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맑스는 비록 영국의 노동조합주의자들이 인터내셔날의 지도 아래서 폴란드의 투쟁이나 이탈리아의 통일운동 등과 같은 국제문제에서의 그들의 이익과 장기적 정치적 열망을 공유하지는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남북전쟁은 영국의 노동운동을 1850년대의 상대적 침체로부터 다시 재울수 있을 것이라 인식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이슈 가운데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의 대의명분은 영국에서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계급들 사이에서도 광범한 지지를 얻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맑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탈리아에서 맑스의 경쟁자인 마찌니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인터내셔날 그 자체보다는 덜한 정도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맑스의 눈에는 마찌니의 정책이란 이탈리아 인민, 특히 농민층의 욕구에 대한 실제적 가치보다는 감정에 치우치고, 도덕적인 수사(修辭)가 강한, 잘못 고려된 것으로 비쳐졌다. 마찌니, 그리고 뒤에는 바쿠닌의 영향에 관심을 가졌던 것 외에도, 맑스는 힘의 정치의 수준에서 이탈리아의 독립 달성은 부분적으로는, 그 국내정치의 성격이야 어떻든, 러시아의 팽창에 대한 잠재적 완충장치의 역할을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의 희생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리소르지멘토보다 훨씬 더 영국과 분리시켰던 미국의 남북전쟁을 맑스는 ‘국제노동자협회(IWMA)의 개회연설(1864)에서 영국 상층계급에 의해서 보여지는 동맹에 대한 지지를 주목하고 있다. 다른 한편, 맑스의 대의 명분을 위해서 조합의 보존은 미래의 사회적, 정치적 및 경제적 발전을 위해서 필수적 선행조건으로 간주되었다. 남북전쟁에 대한 그와 엥겔스와의 관심은 전략적 차원에서 변화의 부족이 자본주의 그 자체의 본산지에서 오랫동안 지연된 경제적 위기를 초래하는 데 기여할지도 모른다는 소망과 또한 도덕적 기준에서 노예제에 대한 혐오감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인터내셔날의 형성에 보탬이 됐던, 세 번째의 주요한 국제적 격변은 1863년의 폴란드 폭동이었다. 1863년의 폴란드 폭동이었다. 1860년대 초에 있어서 폴란드에 대한 공통적인 동정심은, 오저(Odger)와 인터내셔날의 다른 창설자들의 연설에서 지적되었듯이, 영국과 프랑스의 노동운동을 긴밀하게 협력하도록 촉진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푸루동주의자들이나, 뒤에 폴란드의 회복은 단지 귀족과 성직자들만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벨기에의 Caesar de Paepe와 같은 집단에 의해서는 공유되지 않았다. 그러한 논의에 대하여 맑스와 엥겔스는, 1848년에도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폴란드의 분할은 러시아-프러시아-오스트리아의 신성동맹(Holy Alliance)을 지탱하는 고리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폴란드의 회복이 독일에서 프러시아의 우월함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유럽과 ‘러시아의 지휘 아래 있는 아시아적 전제주의’ 사이에 ‘이천만의 영웅들’을 올려놓게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1867년 1월 22일, 런던에서 개최된 폴란드에 관한 회의에서의 연설). 민족독립을 위한 투쟁이 착취당하는 비특권계급의 대의명분보다 덜 중요하다고 믿었던 루드빅 바린스키(1856~1889)와 같은 폴란드의 혁명가들에 대하여 엥겔스는 ‘국제 노동자계급 운동은 독립적 민족들 사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 1882년 2월 7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엥겔스의 언명에도 불구하고, 1850년대 초기에서, 그와 맑스는 유럽 전체의 사회주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폴란드의 독립이라는 대의 명분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 러시아에 출현하였던 혁명운동에 접근함에 있어서 그들은 마찬가지의 전략적 고려를 하였다. 특히, 그 시기에는 폴란드의 폭동이나 파리코뮨이 잔인하게 진압되고 난 뒤에, 다른 곳에서는 혁명의 퇴조기를 맞고 있었다. 짜르제도에 대항하여 적극적 전투를 벌이고 있던 그들 혁명가들에게는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에 강고하게 집착하는 것이 요구되지는 않았다. 유럽에서 짜르의 영향에 대한 일정한 평가에 의해서 맑스는 플레하노프와 같은 이론적으로 보다 ‘정통적’러시아의 추종자들보다는 오히려 러시아 자체 안에서 혁명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인민주의자들을 더욱 높게 평가하였다. 1881년의 알렉산더Ⅱ세 암살에 대한 다른 대안적 방법이 없다는 근거에서의 긍정은 유럽의 다른 곳에서의 그러한 사건, 즉 1878년년에 회델과 노빌링에 의한 빌헬름 Ⅰ세의 암살기도나, 1882년 더블린에서의 피닉스공원의 살해 등과 같은 것에 대한 그의 비난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맑스가 죽은 지 2년 뒤, 대체로 이론의 분야에서 보다 정통적 엥겔스는 1885년의 러시아가 ‘소수의 사람들이 혁명을 만들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바로 혁명은 혁명파 자체의 통제를 벗어난 힘들을 풀어놓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 1885년 4월 23일). 물론 엥겔스의 여생 동안에 그러한 혁명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세기말에 러시아의 공업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그는 러시아가 모든 가능성에 있어서 미래 사회주의사회의 기초로서, 사멸해가는 농촌공동체에 의존하기 보다는 서구 자본주의 발전의 경로를 따르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면서 엥겔스는 뒤에 표현된, 가령 레닌의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표현된,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의 입장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블랑키주의;보나파르티즘;맑스 시대의 제국;라살레)

[관련자료]
Avineri, S. ed. 1968 : Karl Marx on Colonialism and Modernization : his despatches and other writings on China, India, Mexico, the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Blooms, S. F. 1941 : The World of Nations : ㅁ study of the national implications of the World of Karl Marx.
Collins, H. and Abramsky. C. 1965 : Karl Marx and the British Labour Movement : Years of the First International.
Cummins, I. T. 1980 : Marx, Engels and National Movements.
Davis, H. B. 1967 : Nationalism and Socialism -Marxist and Labour Theories of Nationalism to 1917.
Haupt, G., Lowry, M. and Weill, C. eds. 1974 : Les Marxists et la question nationale, 1848-1914.
Kiernan, V. G. 1974 : Marxism and Imperialism.
Molnár, E. 1967 : la Politique ㅇ‘Alliances 여 Marxisme(1848-1889).
Walicki, A. 1980 : Marx, Engels and the Polish Question'.
■ 인접어

마르크스(1818-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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