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사(大韓民國憲法史)] ()
I. 헌법은 국가의 통치체제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원칙으로 정한 국가의 최고 기본법이다. 해방 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함께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헌법은 현재까지 아홉 차례의 개정을 겪으면서 여섯 차례 ‘공화국' 형태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근대 시민혁명의 결과물인 ’입헌주의 또는 입헌국가'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권력분립을 중심요소로서 규정한 헌법에 의거하여 통치할 것을 요구하는 정처원리이다. 봉건제와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평둥·자유를 확보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찾으려는 정치적 요구들과 절대국가의 통치로부터 독립하려는 식민국가들의 독립투쟁의 정치적 결정체로서 근대 입헌주의 헌법이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근대 헌법은 국가의 통치체제와 이념이 국민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구체적으로 보장하고 실현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하는 모든 과정과 그 결과의 총체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국 헌법은 봉건제와 절대왕정에 대항하여 이룩된 정치투쟁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40여 년간 9차에 걸친 헌법 개정을 평가할 때 ‘헌법은 헌법적 효력을 가진 헌법 규범의 단순한 총화'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 의미의 헌법을 넘어서서 이른바 ’초설정범적인 기본 가치의 실현체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자와 같이 이해할 때 한국 헌정사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현실과 동떨어져서 고립된 제도사(制度史)만을 의미하게 된다. 제헌 이후 아홉 차례의 헌법 개정 속에서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정치체제와 이념이 어떠한 배경 하에서 채택되었는지, 그 체제와 이념은 국민의 합의로써 결정되었는지 그리고 통치체제와 이념이 국민의 기본권을 구체적으로 보장하는지, 마지막으로 헌법 이념의 내용과 한계가 선험적어든 현실정치의 타협이든 어느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 등의 문제는 변화하는 헌법조문의 해석을 통한 제도사만으로는 절대로 파악될 수 없다. Ⅱ.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제헌헌법이 공포되기 전의 약 3년 동안 남한 사회의 헌법사항은 미(美) 군정 법령에 의해 담지되었다. 미(美) 군정은 일제시대의 악법을 개폐하고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관한 군정령(미군정범령 제 11호, 1945년 10월 9일)을 발표하고, 또한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건설될 때까지의 기본 통치구조에 관한 ‘과도적 통치 체제'를 갖추었다. 이 시기의 미 군정 법령들은 한국에서 ’헌범'이자 ‘공식적 규범'으로 나타났다. 1947년 여름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자, 미국은 종래의 방침인 4개국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 문제를 국제연합에 이관하였다. 미국이 '기계적 다수'를 확보하고 있는 국제연합이야말로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다는 명분을 세우면서도 한국 문제로부터 빠져 나을 수 있는 가장 편리한 통로였다. 또한 미국이 노골적인 의도를 감춘 채 남한에 강력한 반공정부를 세울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다(참고로 미 군정청이 1946 년 8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한에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70%로 나타났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13일).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연합에서 결정한 남북한 선거를 통한 통일국가의 수립 계획은 소련의 반대를 예상하고 한 조치였고, 결국은 예상대로 북한내에서는 선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유로 국제연합은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유도하도록 재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한국내의 내적 노력을 국제연합의 결의(사실상은 미국의 의도를 형식화한 것에 불과하다)로 국제적인 문제로 형해화시키고 김구, 김규식 등의 민족주의자들과 좌익 진영의 통일을 위한 노력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라는 국제연합의 결정으로 배제하였다. 이승만과 그의 옹호단체인 『독립촉성국민희』,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의 보수 우익 세력은 민족주의자들의 남북한 총 선거 및 남복 요인회담 등의 주장을 공산주의자의 주장과 동일한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남 한 단독 총선거를 전국적으로 추진하였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한국의 영구분단을 걱정하면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나"(Channing, Lien., United States Rule in Korea", Far Eastern Survey XVIII, 1949. 4, p. 78) 남한 단독 총선은 계획대로 추진되고 설시되었다. 1918년 5월 10일 설시된 선거로 198명외 국회의원이 선출되고 5월 31일 국회를 구성하였다. 제헌국회는 2년의 임기를 가진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무소속이었고 한민당이 일개 정당으로서는 다수의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530선거는 남한의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참가한 것이 아니었고, 특히 김구, 김규식 등 민족주의자들의 총선 거부는 540선거의 정당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다. 1948년 6월 1일 국회 제2차회의에서 헌법기초위원이 선출되어 이미 제안된 초안들(유진오 안과 권승렬 안)을 검토·토의한 후 초안을 작성하여 국회 본회의에 회부하였고, 거의 수정 없이 통과되어 1948년 7월 17일 공포되었다. 제헌헌법은 ‘건국 초기에 정부의 안정성, 정치의 강력성을 도모할 필요'가 있어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였다고 했으나 이는 이승만의 강력한 주장에 기인한 것이었다. 대통령선거는 간선제(間選制, 국회에서 선출), 국회는 단원제를 채택하였다. 헌법 제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미 단정 노선에 찬성을 표하고, 기존질서의 유지에 존재기반을 가진 사람들(즉 일제 관료 중심의 모임인 『행정연구회』의 회원들, 한민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유진오와 권승렬, 헌법기초위원장 서상일을 비룻한 한 민당원들, 이승만과 그를 중심으로 한 『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의원들)은 모두 보수 우익의 의사만을 대변하였다. 헤방후 전국민의 합의에 기초하여 새 나라 새 헌법이 탄생했어야 함에도 제정 과정에서부터 합의와 단절된 채 헌법 상황은 왜곡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제헌국회는 1950년 4월 12일 새로운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공포하였고, 이 법에 의해 5월 30일 제2대 국회외원선거가 시행되었다. 5·30총선에는 5·10선거 때 총선을 거부했던 중도파들도 대거 참여하여 많은 사람이 당선되었고, 이승만의 지지세력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야당의원들이 한국전쟁중 제1,2차 개헌안(의원내각제 주장)을 계속 제출하자, 정부는 정치적인 테러를 자행하는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중심으로 한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결국 야당안과 정부안이 절충된 ‘발췌개헌안'이 마련되고 심야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이는 국회를 통한 간접선거로는 중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승만이 대통령직선제로 전환시켜 대통령 중임을 관철할 것을 목적으로 했음이 명백할 뿐만 아니라, 국회의 일사부재리 원칙에 위배되며 공고되지도 않은 개헌안이 통과되는 어처구니없는 정치폭력이었다. 1954년 1월 23일 정부는 기존 헌법의 경제조항이 지나치게 통제경제적이어서 외국인이 쉽게 투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제조항을 자유화하는 개헌안을 제출 하였으나, 같은 해 3월 9일 돌연 이를 철회하였다. 이때부터 이승만의 삼선을 위한 개헌안이 준비된 것이며 이를 위해 경제조항 개헌안을 보류하였다. 1954년 5월 20일 선거에 의하여 자유당이 원내 절대다수를 차지하자 이미 제안된 바 있는 ’경제조항의 자유경제 체제화'와 함께 '대통령 삼선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1954년 11월 27일 민의원에서 이를 표결한 결과 재적 203명 중 135명의 찬성을 얻어 부결되었으나, 이틀 후 사사오입 이론을 도입하여 가결로 번복 결의하였다. 초대 대통령의 삼선제한을 철폐하고 국무총리제를 폐지하는 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제 3차 개헌은 그 절차상으로는 물론 민주주의적 절차와 법 원칙에 위반된 개정이고 이승만의 장기집권만을 위한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평등의 원칙에 위반되는 부당함을 면치 못한 것이었다. 이후 자유당 정권은 1958년 1월 25일 양원 선거법을 제정 하였으나 부정·편의적 선거운용을 하였고, 『신국가보안법』(1958년 12월 24일)과 『지방자치법』(같은 날)을 폭력적으로 통과시켰다(세칭 '24 보안법파동'). 또한 언론 기관을 탄압하고, 시·읍·면장을 임명제로 할 수 있게 하고 국민의 정치민주화 여망을 폭력적으로 통제하였다. 1960년에는 제4대 대통령선거를 조기 실시키로 하여 3월 15일에 선거를 공고했는데 민주당 공천 대통령후보인 조병옥이 급사하여 이승만이 단독 출마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이 정·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3·15선거는 완전한 부정선거였고 이에 항의하는 4·19혁명으로 드디어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종말을 고하였다. 이후 국회가 내각책임제를 중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제3차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 다. 제3차 개헌은 본문 55개 조항과 부칙 15개 항목에 걸친 개정을 내용으로 한 것이며, 그 규모에서는 가히 신헌법 제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국민 기본권 의 강화(언론·출판에 대한 허가제 금지 등), 법관의 선거제 도입, 경찰중립화 명문화, 헌법재판소 제도 도입 등 민주정치를 위한 제반 조건을 갖추었으며, 4·19정신을 구체화하는 하위법 개폐작업에 착수했다{국회의원선거법, 정부조직법, 국회법 등). 새로운 헌법 하에서 자유를 누리던 국민들은 3·15부정선거의 원흉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주장하며, 민주반역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에 민의원은 10월 17일 헌법 부칙에 과거의 반민주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정의 근거를 설치하는 목적으로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법 원칙인 ’소급입법의 금지'를 헌법에 의해 특별법으로 제한하는 헌법개정을 하게 된 것이다. 국회는 1960년 11월 29일 반민주행위자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의 근거로서 제4차 개헌을 하게 되었다. 헌법상 규정된 헌법재판소도 구성되기 전, 대법원장선거를 며칠 앞두고 1961 년 5월 16일 군부쿠데타로 제2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삼권과 주요시설을 장악한 후 남한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 다음날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을 번경하고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함으로써 기존 헌법을 유명무실화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정치활동 규제를 위한 『비상조치법』을 개정하고(1962년 3월 16일), 『정치활동정화법』(같은 날)을 제정하였다.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비상조치법을 개정하여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 군사정권은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헌법을 제출하여 국민투표로 제5차 개 헌안을 통과시키고(1963년 12월 26일), 『대통령선거법』(1963년 2월 1일), 『국회의원선거법』(1963년 8월 6일)을 제정·공포하여 양선거를 사전 계획대로 추진하였다. 새로 출범한 군사정부는 『정부조직법』, 『법원조직법』 등을 전문 개정하면서 쿠데타 주도세력의 법적 지위와 정당성 확보에 노력을 기울였다. 1967년 제 6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재선되고,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재적의원 2/3 이상을 획득하였다. 양선거의 ‘부정'이 논의되고 있던 중에 박정권은 헌법의 삼선 금지규정의 개정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준비하였다. 결국 1969년 8월 7일 개헌안 이 국회에 제출되었고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가결 되었다. 국민의 기본권을 폭압적으로 제한하는 각종 법규들과 기구들의 전횡적 행사를 바탕으로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또다시 당선된 박정희에 대하여, 야당을 비롯한 재야세력이 거세게 반발하였다. 특히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그동안 침묵의 바다에서 움터 온 민중의 요구가 전면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대해 박정권은 ’남·북한 간의 긴장완화'를 빌미로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박정권은 초헌법적인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1971년 12월 27 일)을 제정하고, 국회와 재야에서 공박되던 박정권의 부당성과 민중의 생존권적 요구 등을 ‘국난의 위험'으로 보고 경제규제 강화, 국가동원령 선포, 언론·출판'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최대한 통제, 노동3권의 제한 등 국가 전반에 걸쳐서 전형적인 군부파시즘의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연속선상에서 박정권은 7·4공동 성명과 ’통일'을 빌미삼아 1972년 10월 17일 비상조치를 선포하여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악의 유신헌법을 마련하였다. 1972년 10월 27일 공포·확정된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박정권의 정당화 기구를 비롯하여, 국회의원선거와 국회 구성에서 ’유정회'라는 공화당 친위집단을 설치하고 사법부를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등 내용은 물론 형식에서조차도 철저히 반민주적이고 비정상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1979년 10·26으로 유신체제가 붕괴하고 비상계엄이 선포된 상태에서 국회는 개헌특위를 구성하고, 보궐 당선(1979년 12월 6일)된 최규하 대통령은 ‘유신 악령'인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1979년 12월 8일) 대대적인 복권조치(1980년 2월 29일)를 취함으로써 개헌→총선→민간정부로의 이양의 구도로 정치일정을 진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1979년 12·12 군부쿠데타로 실세를 장악한 군부 강경파는 전두환(1980년 4월 14일 현재 국군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겸임)을 중심으로 5·17정변을 강행하고, 여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최규하 대통령이 공약한 정치일정에 의한 실행권한을 민간정부에 넘기지 않기 위해 초헌법적인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제5공화국의 성립을 위한 국정개혁을 시행하였다. 국보위에서 ‘준비한 개헌안이 1980년 10월 27일 확정·공포되었다. 헌법 발효와 함께 국회구성 전까지 국회의 기능을 담당한 국보위 입법회의에서 제5공화국외 법적 장치를 제공하였고, 반민주적 5공비리는 7년간 계속 축적되었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선거를 계기로 표면화된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대통령직선제 기본권 보장 등의 개헌요구로 나타나게 되었다. 유신 이후 계속 성장해온 민주화를 갈망하는 민중의 계급적 이해가 정치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1987년 6월민주화항쟁으로 제5공화국은 무너지고, 제9차 헌법개정과 함께 제6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국회에서 헌법개정안이 발의되고 1987년 10월 27일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확정·공포된 제6공화국 헌법은 국민의 민주화요구와 6'29선언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6·29선언의 결정력에 중심을 두고 국민의 민주화요구를 격감시키려는 제6공화국의 실체는 형식적 민주화, 5공비리의 미봉적 해결 등에서 볼 수 있다. 즉 헌법의 성장, 헌정질서의 민주화는 정치세력의 은혜로운 승인에 의해 이륙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가의 주권자로서 자리 잡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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