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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의 프롤레타리아혁명] ( Proletarian revolution in Russia)

레닌 : 프롤레타리아트가 농민의 원조아래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나라, 소부르주아 혁명의 대리인이라는 역할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여된 나라, 우리의 혁명은 빈농위원회가 조직될 때까지 즉 1918년 여름, 아니 가을까지는 상당할 정도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제지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10월 혁명을 그와 같이 쉽게 달성한 것은 농민이 전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전진했고 그들이 지주에게 칼을 들이댔으며 우리가 최후까지 전진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고 에스・에르파의 제 신문에 게재되었던 것 —— 겁쟁이 소부르주아지가 약속은 했지만 실행하지 못한 것을 우리가 법률형식으로 실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농위원회가 조직되기 시작했을 때 ——그 순간부터 우리나라의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의 과제에 당면했지만 이는 오늘날까지도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실천적으로 제기했다는 것이다. 빈농위원회는 과도적 단계였다. 소비에트 권력이 발표한 빈농위원회의 조직화에 관한 최초의 포고는 당시 식량업무의 선두에 서있던 동지 튜르파의 제창에 의해 실시되었던 것이다. 기아의 고통에 짓눌려 있던 비 농경주민을 아사로부터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적 조직으로서의 빈농위원회를 통해 처음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18년 여름, 농촌에서 10월 혁명이 시작되고 또 수행되어 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비로소 우리가 참된 프롤레타리아적 기반에 섰다고 생각됐고, 그때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혁명은 포고・약속・성명에서가 아닌 실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된 것이다. (러시아공산당 제8회 대회, 1919, 레닌전집 제29권, p. 144).
나는 몇 번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러시아인에게는 위대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시작한 것이 선진제국과 비교하여 용이했지만 이 혁명을 계속하여 사회주의 사회의 완전한 조직화라는 뜻의 최후 승리까지 관철한다는 것은 보다 곤란할 것이라고. 우리가 그것을 시작하는 것이 용이했던 것은 첫째, 츠아군주제가 정치적으로 이상하게—— 20세기의 유럽으로서는——낙후되어 있었던 데다 대중의 혁명적 습격이 예상 못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러시아의 후진성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지주에 대한 농민혁명과를 독특한 형태로 융합시켰기 때문이다. 1917년 10월에 우리는 그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만약 그것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당시 그와같이 용이하게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미 1856년에 프러시아를 논함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농민전쟁과의 독특한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볼셰비키는 1905년 초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적 독재사상을 주장해왔다. 세째로 1905년의 혁명이 노동자・농민대중의 전위에게 서유럽 사회주의의 ‘최신의 성과’를 알린 점에서나 대중의 혁명적 행동이라는 점에서도 노동자・농민대중의 정치적 훈련을 위해 기대 이상의 많은 것을 완수했기 때문이다. 1905년의 혁명과 같은 ‘총연습’이 없었다면 1917년의 2월 혁명도, 10월 혁명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넷째로 그 지리적 조건의 덕택으로 러시아는 자본주의적 선진국의 군사적 우세에 대해 다른 나라보다도 오래 버텨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특한 관계가 부르주아 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여 도시프롤레타리아가 농촌의 반(半)프롤레타리아적인 가난한 근로자층에 영향을 파급 시키는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섯째로 스트라익 투쟁이라는 장기적인 학교와 유럽의 대중적 노동운동의 경험이 심각하고 급속히 격화되어가는 혁명적 정세하에서 소비에트와 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조직의 독특한 형태의 발생을 용이하게 했기 때문이다. (제3인터내셔널과 그 역사상의 지위, 1919, 레닌전집 제29권, p.308).
주민의 대다수가 소농민적 생산자의 나라에서는, 농공업의 임금노동자가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발전된 자본주의 제국에서는 전혀 불필요한 여러가지 특수하고 과도적인 방책으로 밖에 사회주의혁명을 실현 할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는 수 십 년에 걸쳐 형성된 농업 임금노동자 계급이 있다. 이 계급만이 사회적・경제적・정치적으로 사회주의의 직접적 이행의 지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계급이 충분히 발달되고 있는 나라만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직접적인 이행이 가능하여 특별하고 전국가적인 과도적 방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많은 저작물에서, 우리의 온갖 연설에서, 온갖 정기 간행물에서 러시아에서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 러시아에서는 공업노동자가 소수이고 소농민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해 왔다. 이와 같은 나라에서 사회주의혁명은 두개의 조건이 갖춰진 경우에만 최후의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첫째는 하나 혹은 몇몇 선진국의 사회주의혁명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이를 지지한다는 조건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조건을 쟁취하기 위해 전에 비하면 매우 많은 일을 했지만 이것이 현실화 되기에는 아직 매우 불충분하다. 두번째 조건은 자기의 독재를 실현하고 있는 또는 그 수중에 국가권력을 쥐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인구 대다수와의 협정이다. 협정이란 매우 넓은 개념 하에서의 여러 가지 조치나 이행을 포함하고 있다. (러시아공산당〈볼〉 제10회 대회, 1921, 레닌전집 제32권, pp. 226〜227).

스탈린 :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정치적인 힘은 농민의 농업혁명(봉건제도의 타도)이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부르주아지가 아니고)의 지도하에서 일어났다는 것, 그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서곡이 된 것, 농민속의 근로분자와 프롤레타리아트와의 결합과 전자에 의한 후자의 지지획득이 정치적으로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에 의해 조직적으로도 강화되었다는 것, 그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주민절대다수의 공감이 생긴 것(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가 국내에 다수를 점하지 않아도 곤란하지 않다)에 있다. (러시아공산주의자의 정치적 전략과 전술에 대하여, 1921, 스탈린전집 제5권 P.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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