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츠키 : 다만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경제발전 경향이 필연적으로 대경영을 사회적 소유로 이관시켜, 사회를 위해 경영케 하려 한다는 것뿐이다. 이 이관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느냐, 불가피의 수탈이 몰수로 되느냐, 아니면 배상으로 되느냐 또는 이것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으면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느냐, 이러한 것은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할 문제이다. 과거의 예를 인용한다 해도 그다지 효용이 없다. 마치 봉건적인 중압을 배제한 방식이 나라를 달리함에 따라 다르던 것처럼 이의 이행방법도 여러 가지다. 이행형태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상태, 당해 제 계급의 역량과 견해 등에 따라, 즉 원래부터 예측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제 관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역사발전에서는 예기 할 수 없는 일이 최대의 역할을 수행한다. (에르푸르트강령 해설, 세계대사상전집 14, 하출서방, pp.99~100).
그러나 사회주의적 생산에로의 이행은 소비재의 수탈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자도 그의 전부를 수탈할 필요가 없다. 사회주의 사회에 필요한 것은 대경영이다. 공동조합적 생산은 또한 생산수단의 공유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생산수단의 사유가 대경영에서 공동노동과 모순되듯 이 생산수단의 공유 또는 사회적 소유(公有)는 소경영과 모순된다. 이미 본바와 같아 소경영에는 생산수단의 사유가 필요하다. 사회주의의 추세는 노동자가 필요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므로, 소경영에 대해 그의 사유제까지 폐지한다는 것은 더욱더 무의미 하다. 그러므로 소경영에 의한 생산수단까지 수탈한다는 것은 결국 이것을 지금까지의 소유자들로부터 일단 빼앗았다가 다시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된다. 그러니 뜻이 없는 조치로 된다.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결코 소수공업자나 소농민들로 부터의 몰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이행에 의하여 그들은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느 정도의 이익을 얻을 것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다. 이미 본 것처럼 사회주의 사회는 상품생산을, 직접소비를 위한 생산으로 전화하는 경향을 수반하므로 사회에 대한 모든 납부금도 즉 조세라든가 사회적 소유로 넘어가고 있는 저당물에 대한 약간의 이자도 전연 철폐되지 않는 한 화폐로의 납부로부터 현물로써의 납부—곡물, 포도주, 가축 등—에로 전환코자 노략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농민에게는 대단히 편리한 일이다. 농민은 오늘날도 이미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경향이 많다. 그렇지만 그것은 상품생산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사화주의 사회에서라야만 비로소 가능하며, 또 이로써 농민경영이 파멸되는 주요원인도 제거된다. 이미 본바와 같이 농민이나 수공업자를 수탈하는 것은 자본가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이와 같은 수탈에 종지부를 찍는다. (동상, PP. 100〜101).
트로츠키 : 농노제로부터 농민을 해방하여 그들에게 토지를 주는 심각한 민주주의 혁명이 있은 후의 봉건적인 반혁명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일단 타도된 왕정이 어쩌면 또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자기를 중세기적 망령으로 둘러싸게 할런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미 봉건주의적 경제를 재건할 힘은 없다. 부르주아 관계는 봉건적인 질곡에서 일단 해방되면 자동적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거의 외적 힘으로써도 저지시킬 수 없다. 그것은 사전에 자기자신의 무덤을 파게할 무덤 파는 사람을 만들어 놓은 다음 자기자신의 무덤을 파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주의 관계의 발전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사유재산제의 질곡으로부터 생산력을 해방시킬 뿐만 아니라 해방된 생산력을 스스로 창건한 국가의 직접적인 자유운영에 일임 한다. 부르주아 국가는 혁명 후에 야경적(夜警的)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치고, 시장은 시장자체의 법칙에 맡겨 놓지만, 노동자 국가는 자기가 직접 경제가와 조직자의 역할을 떠맡는다. 어떤 정치체제를 다른 정치체제로 바꾸어 놓아도 시장경제에 대해서는 다만 간접적⦁표면적인 영향밖에 주지않는
다. 이와는 반대로 노동자정부가 부르주아정부 내지 프티부르주아 정부에 대체되면 필연적⦁계획적으로 단서(端緖))의 일소가 이루어져 끝내는 사유재산을 부활시키는 길로 인도될 것이다. 자본주의와는 반대로 사회주의는 자동적으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수립된다. 사회주의로의 발전은 사회주의를 원하는, 또는 좋든 싫든 간에 사회주의를 원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국가권력과 불가분리적이다. 사회주의는 대단히 높은 발전단계에서만, 즉 그의 생산력이 자본주의 생산력을 훨씬 능가하고, 각자의 인간적인 요구에 차고 넘칠 정도로 만족을 주며, 국가가 사회 속에 용융(熔融)되어 완전히 쇠멸될 때, 비로소 불변의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오늘의 소비에트 연방, 1935, 트로츠키선집 제9권, pp. 111 〜112).
톨리아치 : 자본주의 제도를 파괴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만들 필요성은 어떤 정당의 결정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의 능력 내지 힘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계급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역학관계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현실적인 제력(諸力)과 주관적인 제력의 발전 및 제 모순에서 생겨난다. 사회주의에의 이행을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발전과의 모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그 자체 내부께서 객관적으로 성숙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길과 민주주의 정부를 위하여, 1956, 틀리아치선집 제2권 P. 210).
김일성 : 낡은 봉건사회가 말망하고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한 것처럼 자기 세기를 다산 자본주의 제도가 새롭고 진보적인 사회주의 제도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은 막아낼 수 없는 사화발전의 법칙입니다. (공산주의 교양에 대하여, 1958, 김일성저작선집 2권, p. 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