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책 처음으로 | 사전 | 자유게시판 | 회원자료 | 로그인

 

       ■ 의견바로가기

[남로당의 운동노선과 정치활동] ()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단절된 역사의 장면들을 재생시켜 보려는 노력이 매우 치열하고도 크다. 특히 오랜 식민지 시대와 분단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은 국토의 단절을 말하기에 앞서 역사의 강요된 단절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대표적인 부분의 하나가 남로당에 관한 연구이다. 이 영역에서는 남북분단과 강도 높은 외부적 규정성에서 오는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게다가 자료의 한계가 덧붙여져서 역사인식을 가지고 현재적으로 재해석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 몇년 사이에 발간된 자료집과 논문들은 우리 현대사의 연구 진작을 위한 활력소가 되고 있어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해서 현대사에 관한 묻혀진 연구자료들이 공개되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우리의 사회적 힘이며 외부적 규정성에 도전하는 내부적 역량이기에 더욱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남로당사는 우리 민족이 그 암울한 식민지시대, 끝없는 갈등의 시대를 헤쳐나오면서 역사의 구비구비에 아로새겼던 처절한 몸부림과 비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로당의 운동노선과 그 전개과정을 보는 데는 현재 크게 보아 두 가지의 흐름을 잡을 수 있다. 그 하나는 남로당의 운동노선이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레닌이 제기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론을 한반도에 기계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전략적 단위의 한계는 물론이고 구체적인 정치활동에서도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남로당의 운동노선은 사실상 〈인민민주주의〉 (또는 진보적 민주주의)였지만 합법적 공간에서의 대중정치운동이라는 전술적 계산에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론을 내세웠다는 입장이다.
이제 이 글을 남로당의 운동노선과 정치활동, 대중운동을 유기적으로 연결지어 살펴보면서 그 관계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1)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운동노선 : 8 · 15직후 조공 재건파는 1928년에 해체된 조공의 정통적 계승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8월 20일 〈재건준비위〉를 구성하고 이른바 「8월테제」(「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발표한다. 여기에서 조공 재건파는 조선혁명의 현단계를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의 단계로 규정하고, ① 그 기본과업으로 민족의 완전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을 내세운다. ② 혁명의 동력은 노동자 · 농민이 중심이 되고 도시소시민과 인텔리겐챠 등이 참가하는 〈인민정권〉을 지향한다. ③ 또한 그들은 2단계혁명론의 도식을 나타내고 있으며, ④ 국제관계 인식에 있어서도 미 · 소의 체제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2차대전을 통해 형성된 반파쇼 국제(민주주의) 연합에 따른 대미 타협노선의 범위 안에서 정권을 수립하려고 한다.
한편 8 · 15직후 당시에는 재건파 이외에도 장안파와, 일본에서 귀국한 일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프롤레타리아 혁명단계론〉(또는 〈동시혁명론〉), 백남운의 〈연합성 신민주주의론〉 등이 있었다. 이들 운동노선들을 여기에서 모두 논의할 겨를은 없고 다소 도식적 한계를 무릅쓰고 도표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남로당(조공)이 다른 노선에 비해 특별히 차이나는 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혁명의 단계가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된 것은 미 · 소 타협에 의해 주어진 합법적 공간을 고려했는지는 모르나 그 내용과 부합되지 않는 점이 많다. 가령 토지의 국유화 (부르조아 혁명의 범위를 벗어남), 민족 부르조아지의 배제(부르조아 혁명의 동력에 못미침) 등의 과제와 동력 간의 큰 혼란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조공은 8 · 15직후 줄곧 변혁운동과 정권의 수립을 국제노선이라는 외적 변수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보인다. 가령 백남운이 “〈국제노선〉은 세계사적 견지에서 지침은 될지언정 척도는 아니다”라고 하면서 내부의 사회 경제적 성격에서 구하여 정치적 자주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 변수가 미 · 소 양국이 다 승인할 수 있는 형태의 정권을 보증해 주지는 못하였다.



〔표 1〕8.15직후 각 노선의 비교
-----------------------------------------------------------------------------------------------
혁명단계:

장안파-프롤레타리아혁명론
재건파-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론
백남운-연합성 신민주주의론
북한-반제 반봉건 민주혁명

정권의 형태:

장안파-프롤레타리아독재 또는 소비에트 정권
재건파-인민정권,
백남운-연합민주정권(일부자산가 및 지주 포함)
북한-자본민주정권 또는 인민민주(독재)정권

혁명의 방법

장안파-영속혁명론 또는 동시진행혁명론
재건파-2단계 혁명론
백남운-명시되지 않음
북한-동시혁명론에 가까움 (2단계혁명론은 아님)

혁명의 동력과 대상

장안파-①동력-프롤레타리아트, 빈농 ②대상-자유주의적 민족부르조아지 ③고립대상-농촌 중농, 도시중소상공층,
재건파-①동력-(PT헤게모니下)노동자, 농민, 도시소시민 인텔리겐챠 ②대상-지주, 민족부르주아지전체(8월테제) 이후 친일파, 민족반역자 제외한 통일전선 강조
백남운-①대상-명확치 않음 ②동력-무산자와 일부유산자의 연합(혁명성있는 민족자본이 참여)
북한-①대상-미국, 지주, 매판자본가, 반동관료 ②동력-노농동맹, 통일전선

국제관계인식

장안파-⦁2차대전은 사회주의 혁명전쟁 ⦁국내: 계급전쟁 ⦁소련과 영·미간의 전쟁예고
재건파-⦁반파쇼동맹-국제관계 ⦁미·소 합작에 민주주의 실현가능성 믿음 ⦁1946.7월 신전술로 ‘반미’
백남운-⦁국제노선 비판 ⦁연합국에 의해 민족혁명이 대행되었으나 ‘민족해방’의 과제는 남아 있음
북한-⦁복수의 외세에 의한 해방 ⦁초기에 반제는 일제 잔재청산, 후기(1946.4월)에는 반미로 전환

조직

장안파-1945.8.15. 장안당, 1945.11.24 해체
재건파-1945.9.11 조공, 1946.2.15 민전, 1946.11.23 남로당
백남운-1946.1.3 독립동맹경성지부, 1946.3 남조선신민당, 1946.10.26 사회노동당
북한-1945.12 북조선 공산당, 1946.7.22 북조선민전, 1946.8.28 북로당
----------------------------------------------------------------------------------------------
세번째로, 조공은 변혁의 단계론과 민주개혁을 구체적 실천과정으로 연결시키지 못하였다. 물론 거기에는 남북한 군정의 성격과 조건이 달랐음은 인정할 수 있으나, 당시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변화에 대한 욕구를 통일전선 속으로 흡수하고, 또 그렇게 결집된 역량을 정권수립운동으로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북한과의 큰 차이를 초래하게 되었다.
네째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조공이 1946년 이후에는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론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될 시기에는 ① 영 · 미의 대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국제독점자본주의의 파쇼세력과의 결탁 가능성 ② 동구제국에서의 〈인민적 민주주의〉의 방향의 당위성 등을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1946년 7월 〈신전술>이 나타날 때까지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당시의 정세로 보아 제국주의의 침략이 허용되어서는 민족해방을 성취하지 못하므로 민주주의적 입장에서 중소민족자본을 포함하여 동력의 범주를 상정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혁명의 동력으로서 프롤레타리아와 빈농이 독자적으로 혁명을 주도할 역량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외세가 봉건적 모순을 강하게 긴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혁명의 단계와 성격에 있어서 〈인민민주주의〉를 규정하면서도 동력으로서의 〈인민〉의 포괄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 또한 통일전선의 문제를 사고 · 실천함에 있어서 개혁부문과 적절하게 결합시키지 못했다. 즉 개혁부분에 있어서도 노동계급의 민주적 제 권리의 쟁취, 친일대자본의 자본전횡 방지와 파시즘세력의 물적 토대를 제거하는 민주개혁을 자주적 민족통일국가 건설의 민중적 에네르기로 결집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2) 남로당의 결성과 정치활동 : 조공은 「인공」 수립(1945년 9월 14일), 「민주주의 민족전선」(46년 2월 15일), 3당(공산 · 신민 · 인민)합당운동(46년 8월초부터)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정치활동이나 대중운동을 합법적 방식에 의존하고 있었다.
지방인민위원회-1945년 8월 말경 이미 145개 이상의 폭발적인 건준지부로부터 파생된-는 민족연합전선의 형태로서 아래로부터의 국가형성의 단위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전평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조직이 생겨나고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은 조선화물자동차 · 인천알미늄 · 오스카인쇄소 · 화신산업 · 조선피혁 · 경성전기 등에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경성방직 · 동양방직 등에서의 임금인상파업, 철도노조에서의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파업 등은 “노동자의 당면 일상 이익을 위한 투쟁을 조직함과 동시에” 이 투쟁을 “조선의 독립과 결부시켜 건국초의 경제건설의 추진력이 되게 하는” 정치적 차원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농민운동에서도 전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조직의 결성, 구(舊)일본인 소유 토지와 민족반역자의 토지점거와 몰수, 인민위원회를 통한 토지의 분배, 소작료 불납운동 등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반제반봉건민주혁명의 과제에 있어서 이러한 요구는 결국 반봉건적 토지소유를 철폐하고 민족반역자의 경제적 기반을 제거함과 노농동맹을 강화하여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이루고, 완전한 민족해방을 성취해 나가는 중요한 운동의 형태요 과정이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급속히 팽창한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열기를 당의 수준, 나아가 국가건설의 수준으로까지 어떻게 결집화해내는가 하는 것은 핵심적인 과제였다.
더구나 〈해방공간〉이라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민중의 자발적인 정치세력화를 역전시키려는 새로운 외세의 점령과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즉 〈합법적 시기와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민주정권의 수립으로 연결시키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조공의 전술변화를 기점(1946년 7월의 〈신전술〉)으로 하여 전·후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겠다. 전자의 기간에 있어서 조공의 기본전술은 미군정과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전자의 기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미군정과의 협력관계로 설정했다면 그 협력 속에서 민중세력의 확대 · 강화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민족문제에 있어서 미국을 〈제국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당연히 할 수 없겠다고 할지라도 지방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에 대해 지방단위의 대응요구를 적절하게 지도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오류로 지적된다.
가령 농민운동에 있어서 자연발생성, 지역적 고립분산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도-물론 지도부에 의한 미미한 방향 제시와 조직화가 있었지만-하기 보다는 치안유지와 같은 비본질적인 요소의 강조로 농민의 열기를 냉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제1차 인민위원회대표자회의(1945.11.20〜23)에서 미군정과 우호적인 관계유지만을 강조한 데서도 매우 잘 드러난다.
또한 「인공」은 미군정이 진주했을 때, 사실상의(de facto) 정부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했으나 미군정에 의해 부인되자 (1945년 10월 10일 하지(Hodge)의 부인성명, 10월 27일 미군정관에 의한 인민공화국의 〈국〉자 명칭 삭제요구), 한반도에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미군정을 인정하고 인공의 역할을 보류한다는 각서를 하지(Hodge)에게 제출하였다. 이러한 전술은 신탁문제를 둘러싸고도 그대로 나타났고, 46년 7월 26일 〈신전술〉이 발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즉 46년 7월말 이후의 시기에 있어서 조공은 기존의 미·소 협조합작노선을 근본적으로 재고(再考)하면서, “미제국주의의 구체적 내용을 폭로하고, ……대중의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조선공산당이 대중의 혁명적 열기를 〈민족통일전선〉운동 속에 담아내지 못하고 〈민족문제에 있어서의 우익적 타협노선〉을 견지함으로써 〈혁명역량〉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46년 3월부터 시작된 북한의 개혁실시, 1차 미소공위의 결렬, 지방인민위원회의 파괴, 정판사 위폐사건, 3개 신문사 정간조치, 박헌영 · 이강국 · 이주하의 체포령, 내분의 심화 등 대내외적 정세가 불리해지자 상실해 가는 운동역량을 가지고 전면적 투쟁을 시도한 것이다.
<신전술>에 의한 전술전환 역시 기층민중운동의 역량을 당적 수준에서 올바로 결집해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46년 중반에 와서는 이미 2월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반(反)박헌영세력(반(反)콩그룹)의 도전, 북한에서 분국설치(4월)와 〈북풍〉의 영향 등에 직면하여 대중정당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3당합동을 모색하면서 남로당을 결성하게 된다.
1946년 11월 23일 결성된 남로당은 기존의 조선공산당과는 달리 어느 특정 계급의 전위당이 아니라 근로대중을 위시한 광범한 민족구성원의 대표(대중정당)임을 표방했다. 남로당의 강령에서 나타난 내용은 이미 1946년 3월부터 북한에서 실시한 각종 개혁조치를 반영하고 있었다. 즉 「8월테제」에서 노정된 전략적 노선의 한계점을 발전적으로 보완하여 전략적 단위에서도 명실공히 〈인민민주주의〉의 노선으로 전화해갔다.
그러나 남로당은 여운형 · 백남운 세력을 배제한 채, 분파주의적 권력투쟁을 전개하면서 〈추수폭동〉의 시기를 앞당기고 기층민중의 열기를 세력화 · 통일화가 아닌 고립화 · 분산화로 몰아간다.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2 · 7구국투쟁 등으로 이어지는 비합법위주의 투쟁은 무장유격대인 〈야산대〉의 출현으로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사후적 방어적 의미의 〈무장투쟁〉은 지도력의 한계가 작용함으로써 무참한 패배로 귀결된다.
지금까지 대중운동과 정치활동의 과정을 요약하자면 45년 8월〜46년 중후반까지의 민족모순의 인식과 실천에 있어서 우경적 오류와 통일전선의 실패, 46년 중후반 이후의 급선회한 모험주의 (47년의 〈합법, 비합법 배합투쟁〉→48년 남한단정 수립 저지를 위한 〈비합법 무장투쟁〉 : 제주도 4 · 3봉기, 10월 여순사건→49년 9월공세, 50년 남로당 붕괴)는 운동의 사멸을 재촉할 뿐이었고 오직 확실하게 살아남은 것은 미국에 의한 구식민지 국가기구의 〈부활〉과 분단국가일 뿐이었다.
이상의 논의를 중심으로 남로당의 노선과 전술상의 오류를 지적하고 정치 활동을 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
첫째, 정세인식의 오류가 지적될 수 있다. 1945년 이후 1946년 7월 신전술 이전까지는 미군정에 관한 인식과 실천에서 우경적 오류가 지적되며, 46년 7월 〈신전술〉 이후는 좌경적 오류를 범했다고 평가된다. 즉 초기 조공의 미군정에 대한 타협적인 태도는 국내역량의 강화보다는 국제세력(미 · 소)의 균형적 관계에 너무 집착함으로써 대중운동에 있어 합법적인 부분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현상추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군정의 탄압 강화, 우익의 세력화 방조, 인민위원회의 파괴와 역량의 상실을 자초하게 되었다.
한편 〈신전술〉에 의한 전술전환(반미 적극공세) 역시 기층운동세력의 역량을 당적 수준에서 올바로 결집시키는 것으로 되지는 못하였다.
민족문제와 관련시켜 볼 때, 46년 4월 이후 북조선 분국이 북조선공산당으로 형성된 상황에서 남북간의 주체 상호관계가 적절히 설정되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분파주의적 맹동주의까지 겹치게 됨으로써 해방직후의 〈타협주의〉는 46년 중반 이후 〈모험주의〉로 급선회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민족통일전선의 올바른 건설의 실패를 들 수 있다. 각계각층(또는 통일전선 대상에 속하는 당)의 공통된 원칙(최소강령)을 중심으로 통일전선을 광범위하게 결성할 수 있어야만 했다. 미군정의 지방인민위원회 탄압이라는 상황을〈전술적 수세기〉로 설정하고, 그 시기에 적의 폭압으로부터 완충지대를 설정하여 주체역량을 튼튼히 확보할 수 있을 때에 一 그러한 통일전선을 확대 · 강화시켰을 때 一 비로소 〈신전술〉 이후의 〈전술적 공세기〉에서 정세의 역전은 가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층통일전선과 상충통일전선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하는 것임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하층통일전선(지방인민위원회)을 확고히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조공의 지도부는 단결과 투쟁을 적절히 배합시키지 못하고, 특히 민족문제 해결에 있어서 합법적 방법(타협)만을 중심에 둠으로써 무력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째, 이미 둘째의 과제와 관련된 것이지만 조공 지도부는 지방조직과의 연결노력이 부족했고 그들의 정치교육의 결여로 대중의 힘을 정치세력화 하는데 실패했다. 이러한 사업의 부재로 인하여 미조직된 대중교육의 대상은 미군정과 우익에게 양도되었다.
네째, 이상의 논의에서 볼 때 조공의 초기 운동노선은 전략적 차원의 혁명 단계설정에서의 일정한 오류가 정치적 활동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양상을 띠었다.
이상의 지적은 요컨대 남로당이 민족문제를 제일의 과제로 두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결합방식에 있어서 〈민족해방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중심축에 두면서 민족해방의 역량결집이라는 전략적 구도 속에 계급적 모순의 해소과정을 상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 여현덕
■ 인접어

나도향 羅稻香 1902-1926
나석주 羅錫鷹 1889-1926
나운규 羅雲奎 1902-1937
나철 羅喆 1863(철종 14)-1916
남궁억 南宮憶 1863(철종 14)~1939
남로당의 운동노선과 정치활동
남로당의 운동노선과 정치활동
남북한 단정(單政) 수립
남북협상
노동운동
농민운동

뒤로
■ 의견

 



HOME - 후원방법 안내 - CMS후원신청 - 취지문 - 사용 도움말 - 회원탈퇴하기

2002 노동자 전자도서관 "노동자의 책" 만들기 모임
120-702 서울시 중구 정동 22-2 경향신문 별관 202호 44
laborsbook@gmail.com
모바일버젼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