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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디칼리즘] (syndicalism)

생디칼리즘은 단지 노동조합주의에 해당하는 프랑스말의 영국식 번역이다. 혁명적 생디칼리즘은 보통 노동조합 연맹 사무소의 비서였던 페르낭 펠루티에[Fernand Pelloutier](1867∼1901)의 이론과 1902년 이 연맹과 합병한 이후의 노동총연맹(CGT)의 원리를 의미했다. 생디칼리즘적 교리는 명확성이나 정확성에 있어 결코 완벽하지는 못했다. 이론보다 행동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주요 주제에는 일반 노동자의 주도권의 필요성, 사보타지를 포함하여 투쟁성의 가치, 순수한 산업조직과 투쟁에 의한 자본주의와 국가의 타도 등이 있었다. 비록 생디칼리즘적 노동조합 실천과 쏘렐의 연결은 밀접하지도 않았고 또한 계속되지도 않았지만, 혁명적 총파업의 '신화'와 함께(투쟁적 소수의 행동을 포함하는) 자발성과 폭력은 쏘렐에 의해 널리 퍼졌다. 그의 저서들은 특히 몇몇 사람―특히 무솔리니―이 파시즘으로 전환한 이탈리아 좌파에 영향을 끼쳤다. 1914년 이전의 혁명적 생디칼리즘은, 주로 무정부주의적 전통과 실질적인 기술직공 기반이 있으면서 산업화된, 집단협상 경험이 거의 없는 나라에서 노동조합운동의 공식적 입장의 주요한 부분이 되었다. 프랑스의 CGT와 마찬가지로 주목할 만한 예로 스페인의 전국 노동조합 연맹과 이탈리아의 노동조합 연합이 있다. 그밖에 다른 곳에서 생디칼리스트들은 공적인 연합정책을 반대한다. 영국에서 산업 생디칼리스트 교육연맹은 중앙집권화된 집단협상을 반대하고 단결과 직접행동을 주장한 만[Mann]과 같은 행동주의자에 의해 1910년에 형성되었다. 미국에서는 생디칼리즘이란 말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다만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이 유럽의 혁명적 생디칼리즘에 필적할 정도로 중요성을 과시하였다.

북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생디칼리즘의 지배적인 의미 부여는 사회주의 정당의 필요에 대한 반대로 나타났다. 당은 관료적이고 의회주의로 타락하였으며 부르주아국가와 타협하기 쉬웠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산업전선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가끔 중앙집권화된 국가 사회주의의 목표에 대한 거부는 그런 논의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한 생디칼리스트와 정통 사회민주주의 사이의 중간 입장에, 1908년 IWW로부터 추방된 레오니트적 경향[The De Leonite]과 산업투쟁의 최우선시를 주장하지만 혁명정당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한정하는 영국의 추종자들―특히 코놀리[Connolly]―이 있었다.


생디칼리즘에 대한 최초의 주요한 위기는 전쟁의 발발이었는데, 이 때 많은 지지자들은 이전의 열렬했던 반(反)애국주의를 포기했다. 반전(反戰)입장을 견지했던 사람들은 전쟁시기의 산업투쟁을 전개하는 많은 수의 지도자들로 증원되었는데, 이들은 노동자의 생산통제 요구를 발전시키면서 평의회 운동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은 더 큰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1907년 이래로 레닌은 자신이 일찍부터 비난해온 경제주의와 생디칼리즘을 똑같이 공격해 왔다. 확실히 볼세비즘과 생디칼리즘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쟁 전과 전쟁 중의 많은 생디칼리스트들은 자기들 당의 반대 교리를 포기함으로써 볼세비키 혁명에 대한 범행을 입증하게 되었다. 운동 초기의 약간의 특수한 목적―현장 조직, 산업조합주의, 직접행동―이 새로운 공산당으로 양도되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 러시아 노동 반대파에 의해 실체가 표현된 노동자 관리의 기초를 이루는 이론들은 체계적으로 근절되었다.


코민테른 입장과 무관하거나 결별한 생디칼리스트들은 레닌주의적 당 개념 뿐만 아니라, 노동자 국가의 모스크바 모델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이 남아있던 생디칼리스트 조직―1921년 국제 생디칼리스트(SI)로 연합된―내에서 점차 지배적으로 되어갔다. 그러나 1920년대의 체계적인 노동계급의 패배로 생디칼리즘(적어도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밖에서)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그리고 노동조합 정통주의자에 대한 심각한 경쟁자로 바뀌어 버렸다. 노동자 통제에 대한 최근의 선전과 일반 조합원 경향의 좌파 그룹 속에서 생디칼리즘이 이념의 연속성을 보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생디칼리즘'이란 말 자체는 이제 거의 유일하게 욕설투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람시 (Antonio Gramsei) : 아나르코 상디칼리즘은 그의 표면상의 강경하고도 혁명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전선에서 정치인 일파의 무책임한 활동을 자체폭로하고 있다. 이 정치인들은 공명정대한, 통제된 노동자의 계급 당 대신에 무통제적⦁비밀결사적 조직을 들고 나온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 1920, 그람시선집 제5권, p. 86).

코민테른 강령 : 이 주의를 신봉하는 다수의 이론가는 대전시기의 최대위기에 처했던 아나키즘처럼 파시스트적인 ‘반의회제’, 또는 사회민주당 형(型)의 평화적 개량주의자로 표변하여 정쟁(政爭)(그중에서도 혁명적 의회주의)을 부정하며,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를 부정하고, 노동운동, 그중에서도 노동조합운동에서 각 부문의 분권주의를 제창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정당을 부정하였고, 폭동의 필요성을 부정하였으며 총파업을 과신하는 등으로 그의 사상적 영향하에 있는 여러 곳의 노동자를 혁명화 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는 것과 관련하여 소련에 통격(痛擊)을 가하고 있는 것은 사회민주당의 그것과 궤(軌)를 같이하는 것이다. (코민테른 강령 제6장 제1절 노동계급내의 공산주의에 적대하는 이데올로기, 1928, Jane Degras, 코민테른 도큐먼츠 II, 1923~1928, 현대사조사, 동경, 1977, p.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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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계급협조주의의회주의의 경향에 빠진 것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좌익기회주의의 일종.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노동조합운동에 도입한 것이다. 프랑스어로 생디카(syndicat)조합을 의미하는데, 조합만을 유일한 노동자 조직으로 간주하고, 의회의 역할을 부정하며 경제 분야에서의 직접 행동을 주장하고, 파업, 사보타지, 보이콧 등의 투쟁 형태를 중시하면서 특히 총파업에 의해 정부를 쓰러뜨리고 노동조합이 생산의 관리권을 장악해야 착취 없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생디칼리즘은 무정부주의를 계승하여 노동자 계급의 정치 투쟁을 거부하고, 노동자 계급 정당의 필요성을 부정하면서, 조합에 대한 정당의 지도를 거부하고, 혁명후의 사회에서도 국가기관 없이 조합이 생산의 관리를 담당할 것을 주장하였다. 바쿠닌주의와의 차이는 노동자의 일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동조합 활동이나 각각의 파업투쟁을 긍정하는 점에 있다. 대표적 사상가로서는 조르쥬 소렐, 전형적 운동으로서는 20세기 초두의 프랑스 노동 총동맹(CGT), 1차 세계대전 직전의 미국위 노동조합(WW)이 꼽힌다.

생디칼리즘의 결함은 조합과 정당의 협력이나 조합내의 정치 활동을 거부하고 파업 투쟁에 있어서 정치 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을 방해하여, 노동조합 그 자체의 정치적계급적 강화를 불가능하게 하였던 점이다 그것은 조합내에서이 우익 기회주의의 조류를 조장하고, 독점 자본의 사상적 지배를 허용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 후에 이 조류는 급속히 영향력을 잃어 우파는 개량주의에 합류하고, 그 일부는 후에 이탈리아에서처럼 파시즘으로 전화하였으며 좌파는 마르크스주의로 이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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