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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적 대상 ] ((獨 Ästhetischer Gegenstand, 英 Aesthetic object, 佛 Object esthéti)


사물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보통 미적 태도를 취하는 주관에 대해서만 미적 대상으로 성립한다는 것은 ‘대상인 것’(Gegenstandsein)의 일반적 법칙을 근거로 하여 생각해봐도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순한 주어짐이 아니라 미적 주관 - 미의식의 상관자(Korrelat)로서 비로소 미적 대상이 성립하는 것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미적 대상은 미의식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미적 대상의 법칙성은 결국 미의식의 법칙으로 귀착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 각각 ‘작용계기’(Aktmoment)에 대해서는 반드시 존재하는 ‘대상계기’(Gege nstandsmoment)가 조응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임의의 대상이 아닌 특정의 성질을 가진 대상만이 미의식과의 상관관계에서 미적 대상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도 명백하다. 따라서 우리들은 미의식의 대상이 미적 대상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소극적인 정의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대상 자체의 특수한 성격, 그 중에서도 특히 그 ‘존재 형태’(Seinsweise)와 ‘구조’ (Struktur)를 분석해야만 한다.
그런데 미적 대상은 크게 ‘예술 작품’(Kunstwerk)과 ‘미적 자연 대상’(der ästhetische Naturgegenstand)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설령 체험내용이 ‘예술미’와 ‘자연미’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듯이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모두 미인 것은 사실이며, 결국 동일한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해도, 대상의 측면에서 생각하면 한편은 인간에게 주어진 정신에 대한 소여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며, 각각이 독자적인 성질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예술 작품은 인간 정신의 산물이며, 더구나 ‘미를 목적으로’(zum Zweck dws Schönseins) 형성된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술 작품이 다른 모든 대상과는 다른 독자적인 성질을 갖는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에 비해 미적 자연 대상을 인간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다. 물론 미의식과의 상관관계에서 성립하는 것인 이상, 그것이 정신적 창조 작용의 결과라는 것은 부정되지 않으며, 이 점에서 미적 자연대상은 예술 작품과 동일한 평면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예술의 경우 창조활동은 단지 내면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 재료에 의한 대상 형성에까지 발전하는 것이지만, 자연미의 경우는 창조 활동의 그러한 외화ㆍ객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미의 특질은 그 외적ㆍ객관적 측면에서 파악하려고 할 경우에는 예술미의 경우에 비해 상당한 어려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또한 그렇게 때문에 자연미를 주관적 측면에서만 생각하려 하는 것이 오류라는 것은 미적 대상의 특질에 비추어 보아도 너무나 명백하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미적 자연대상 분석은 - 자연미와 예술미의 본질적 합일성과, 대상구조와 작용구조의 긴밀한 상관관계라는 두 가지 점을 아울러 생각하여 - 비교적 분석이 용이하게 보이는 예술작품의 구조를 참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적 자연대상에 대한 주체의 체험 구조를 단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예술 작품의 분석을 먼저 행해야 한다.

1) 예술작품의 존재 형태
예술 작품이 단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주관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물이 아니라는 것은 상술한 것에서도 이미 분명해졌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주관에서 독립한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바꿔 말하자면, 예술 작품은 그 본질부터가 콘라트(Waldmar Konrad)가 말하듯이, 관념적인 ‘지향적 대상성이라는 의미에서의 대상’(ein Gegenstand im Sinne inte ntionaler Gegenständlichkeit)이지만, 그것이 우선 우리 지각에 부여된다는 의미에서 역시 물(物,Ding)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이데거 말을 빌리자면, “예술작품은 그것이 존재하는 것인 한 역시 하나의 물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예술 작품의 ‘존재 방식’이 주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는데,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가상설이다.
예를 들면 E, v. 하르트만은 미라는 것은 주관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대상에 있지 않고, 객체로부터 독립된 순수한 주관적인 산물에 있는 것도 아니며, 주관과 객관의 일치된 융합에 있다고 한다. 이러한 독자적인 미 본연의 상태를 가상(假象, Schein)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적인 것이 존재할 만한 곳인 ‘미적 가상’(ästhetischer Schein)은 객관적 현실에서도, 그리고 주관적 현실에서도 추상될 때 순수한 것으로 된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대상이 실재성의 인상(Realitäteindruck)을 주는 것처럼 표현되는 경우라도, 그것을 실재물 그 자체로 착각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예술 작품을 어떤 실제의 단편으로 받아들일 때 미적ㆍ예술적 태도가 지양되는 것은 명백하다. 카인츠는 우리들 마음이 예술을 관조할 때 ‘표현의 현실 유사성(Wirklichkeitsnabe)에 의해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작품을 완전한 현실물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인 듯한 것’(Als-ob-Wirk-lichkeit)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대상이 현실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현실에 있는 듯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의미에서 미적 대상의 가상성을 설명하고 있다.
대상이 실재적ㆍ현실적인 것이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대상과 관조자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없게 되며, 대상은 어느 정도는 직접적 반작용을 일으켜서 미적 정관을 저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적 대상은 가상으로서의 본연의 상태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미의 가상성은 바로 미적 작용의 표징으로 알려진 정관성(靜觀性) 혹은 무관심성의 대상적 측면에서 상관자이다. 폴켈트의 미적 규범론에서도, 미는 주관적 측면에서 ‘현실 감정의 비실재화’(Irrealisierung des Wirklichkeitsgefühls)라고 규정됨에 따라, 객관적 측면에서는 ‘가상의 세계’이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가상은 물질적인 소재성을 떠난(stof flos) 순수형식이며, 실재적인 관심과, 의지로부터 자유로운(Willenlos) 대상이고, 대상 그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그 표면적 형상만이 문제시 된다는 의미에서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상이다. 이러한 점들에서 가상은 일상생활 현실의 무게(Schwere)나 조야함(Grobheit)에서 고양된 존재로 된다. 이러한 가상의 세계는 말하자면 감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중간 영역에 있고, 거기에서 비로소 정신적 내포가 아무런 억압 없이 감각적 형식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형식과 내용은 이 가상의 세계에서 비로소 완전한 결합을 보게 된다.
이리하여 가상은 이 말이 일반적으로 오해를 사고 있듯이, 어떤 비현실적ㆍ비실재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Fürwirklich-halten)이나 실재와의 혼동(Verwechselung mitder Realitat) 속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적 현상의 본질에 다가가는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경우, 그것은 미의식 분석에서 얻어진 모든 법칙성이 대상의 측면에 적용된다는 식으로 설명되는데, 대상 자체의 ‘존재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역시 다소 적극적이지 않은 측면을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의 반성에 근거하면서 ‘정신적 존재’ 일반과의 관련 속에서 예술 작품의 ‘존재 방식’을 상세히 분석했던 사람은 N.하르트만이다.
예술 작품은 일종의 정신적 존재 ‘객관화된 정신’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른 두 종류의 정신적 존재, 즉 ‘개인적ㆍ주관적 정신’과 ‘역사적ㆍ객관적 정신’이 ‘생동하는 정신’인데 반해 객관화된 정신은 단순한 정신적 내포이며 정신적 산물이다. 이 점에서 ‘정신적 삶에서의 해방’(Abgelöstheit vom geistigen leben)이라는 그 독자성이 성립한다. 즉, 정신적 존재의 근본적 법칙은 그것이 자유롭게 부동적(schwebend)으로 있지 않고 다른 종류의 ‘존재기초’(Seinsgrundlage)를 토대로 삼기 때문에, 생동하는 정신은 그것을 지탱하는 개인의 삶, 혹은 어떤 민족ㆍ시대의 전체적 삶의 소멸과 함께 근절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객관화된 정신은, 자칫하면 그 정신적 내포가 변하기 쉬운 인간적 생명과 다른 저항력을 갖는 ‘재료’(Materie)로 형성화된 것이므로 그 생산자의 삶을 초월한 지속성을 갖기에 이른다. 따라서 정신의 ‘객관화’(Objektivation)는 거기에서 정신적 내포가 현상할 수 있는, 지속성을 갖는 ‘실재적 형상’(Realgebild)의 창조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그러한 재료 혹은 실재적 형상은 그것 자체가 정신적 존재는 아니다. 형성된 재료에 의해 부여된 정신적 내포는 항상 생동하는 정신의 개입을 요청하며, 어떤 정당한 - 이 경우 미적인- 태도를 취하는 주관에 대해서만 실재적 형상을 통하여 형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화된 정신’ 일반적 법칙으로 보아 예술 작품도 또한 형성된 실재적 재료〔전경(Vordergrund)〕와 그것에서 현상하는 비실재적인 정신적 내포〔후경(Hintergrund)〕라는 두 구성요소로부터 성립하고 있으며, 존재방식으로 본다면 실재적 - 비실재적이라는 이중적(zweischichtig)인 성격을 갖고 있다.
여기에 새삼스럽게 주목해야 할 것은 관조자가 수행하는 적극적인 역할이다. 후경은 명확히 전경에서 현상하는데 그것은 보통 정당한 미적 태도를 취하는 관조자에 대해서만 현상한다. 따라서 미적 이외의 태도로는 그 독자적인 정신적 내포가 현상하지 않으며, 따라서 미적 대상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주관의 개입에 관계없이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an sich sein)인식 대상과는 다를 미적 대상의, 예술 작품의 특수한 존재 방식이 성립한다. 카인츠가 말하듯이, 진정한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객관적ㆍ주관적 요소의 협력(ZusamenwI rken)과, 관조자의 반응(Beschauersreaktion)과 작품의 협력이 불가결한 것으로 된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대자적 존재’(Für-uns-sein)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서술했듯이, 전경과 후경은 그 존재 방식에 지양되지 않은 이질성을 가지고 있지만, 구조적으로 볼 때 예술 작품은 그러한 이질적인 두 요소가 단순한 복합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특질인 현상관계(現象關係) 속에서 관조적 주관에 대해 확실히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예술 작품에서 물질적인 것 - 재료는 작품의 존재를 유지하며 영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만, E. 수리오는 작품에서 ‘물질적 형태성’(corporéité physique)을 작품의 ‘물질적 존재’(existence Physique)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의하여 비로소 작품은 적극적으로 참답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더구나 재료는 각각 고유한 감각영역에 속하며, 직접 예술가의 형성이 가해지는 것이므로, 한편으로는 작품에서 ‘형식’의 성질을 규정하며, 나아가서는 ‘내용’ 전체로 규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리오가 작품의 물질적 형태는 관조자에 대하여 ‘감성적 질의 장난’(unjeu de qualités sensibles)을 치고, ‘순수현상’(purs Phénomènes)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하고, N. 하르트만이 각각의 재료는 보통 일정한 종류의 형성만을 허용하고, 일정한 내포만을 현상시킨다고 말한 것도 역시 재료의 적극적인 역할을 설명하고, 작품에서 전경과 후경의 강고한 통일성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예술 작품의 구조

예술 작품에 관하여 가장 오래 전부터 논의 되어온 것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커다란 문제의 하나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일 것이다. 예술 작품의 본질이 형식과 내용 중 어디에 있는가, 혹은 보다 넓게 미는 대상의 형식과 내용 중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논쟁점을 이루며, 각각 어느 한편을 중시하는 데에 따라 ‘형식 미학’과 ‘내용 미학’이 성립하게 된다. 그렇지만 형식이라고도 말하고 내용이라고 말을 해도 그 받아들이는 방법이 개개의 입장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주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미학의 입장과 또한 우리들의 구체적인 체험에 비추어 보아도 예술 작품은 본래 유기적인 통일체로서 인식해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도 당연히 분리할 수 없는 형식과 내용을 양자택일적인 원리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오류이다. 따라서 문제는 둘 중 어느 것을 보다 원리적인 것으로 선택하느냐에 있지 않고 양자의 통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설명이나 이론의 입장에서도 여러 가지가 제기되고 있지만, 최근 미학에서 네 가지의 주요한 입장이 지적되고 있다. 우선 ‘미적 자율성’의 문제를 기초로 양자의 통일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1) 헤겔의 주지주의적 미학에서 출발한 짐멜ㆍ멕카우어 등의 직관주의적 미학 입장, (2) 칸트의 선험주의적 미학에서 출발한 코헨 등의 신칸트학파적ㆍ논리주의적 미학 입장이 있다. 또 ‘표출’ 문제와의 관련 속에서 통일성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3) 립스나 폴켈트 등의 감정이입 미학, (4) 쿤(Helmut Kuhn, 1899~)의 존재론적ㆍ현상학적 미학 입장이 있다. 그러나 형식ㆍ내용의 통일 문제를 미적 대상 혹은 예술 작품의 구조 그 자체에서 설명한 N. 하르트만의 시도도 거론될 수 있다.
미학에서 형식 개념만큼 자주 다루어지는 것은 없지만, 자명한 것으로 쓰이는 경우조차도 대개는 아주 무규정적인 채로 머무르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무규정성은 결국 그것과 대비적으로 생각되어야 할 내용 개념의 무규정성에 따른 것으로 바꿔 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범주적 분석’(Kategorialanalyse)이 그것을 푸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형식에는 재료(Material)가 따르게 된다. 그런데 재료의 보편적ㆍ범주적 법칙은 “모든 종류의 형식이 모든 종류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형식이 일정한 재료에서 가능하다 - 그런 점에서 재료는 형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모든 예술영역의 ‘한계를 규정하는 현상’(Begren zungserscheinungen)과 그 법칙성이 발견되지만, 어쨌든 ‘영역지시적 원리’(Das gebietsanweisende Prinzip)로서의 재료에 대한 범주적 대비 속에서 미적 형식의 개념은 비로소 하나의 규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 개념의 일면만을 보는 데 불과하다. 왜냐하면 예술작품에서 내용적인 것은 이러한 재료 개념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식에 대한 또 하나의 대비적 개념, 즉 ‘소재’(Stoff)가 고려되지 않을 수 없다. 소재는 그 자체로서는 예술적인 것이 아니다. 창작자의 형성에 의하여 ‘감성적ㆍ직관적 현존’(die sinnlich-anschauliche Präsenz)을 초래함으로써 비로소 예술적인 것이 된다.
이리하여 형식 범주는 두 종류의 대비관계 - 한편으로는 거기에서 예술적 형성이 행해지는 소재와의 대비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에 의해 형성된 소재와의 대비관계 - 에 두어진다. 재료와 소재는 구별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이므로, 두 종류의 형성이 동일한 것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형성이 두 종류의 ‘형성되지 않는 것’, ‘형성 가능한 것’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관계야말로 미와 예술의 비밀을 구성하고 있으며, 거기에 예술 작품의 유기적 통일성의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형식ㆍ내용 개념은 더 이상 그것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며, 상이한 관계 사이의 상호작용 - 직관적인 다양성의 통일 속에서 그것들의 협력이 파악될 수 있는 대상구조의 범주가 구해져야 한다.
N. 하르트만이 예술 작품의 구조 분석에 중점을 둔 이유 중 하나는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것인데, 입장은 각각 달라도 예술적 현상의 모든 문제를 작품 구조의 분석이라는 측면에서 밝혀보려는 사고는 현대 미학의 한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 수리오는 예술 작품이 ‘물질적’(Physique), '현상적’(Phénoménal), '사물적‘(réique ou chosal), '초월적’ (transcendant)라는 4가지의 존재양식(mode de L'exsistence)을 갖고 있으며, 예술작품이야말로 그것들의 유일한 전체적 존재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현실성의 4가지충돌’(Quatreordres de réalités) 사이에는 많은 조화ㆍ조응이 있고,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구축된 전체의 무수한 상호작용을 통해 ‘내적인 반향’을 울려 퍼지게 한다고 한다. 또 잉가르덴(Roman Ingarden, 1893~1970)은 문예 작품에 관하여 몇 가지 존재 층을 분석하여 그들 하나하나의 층이 각각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말하자면 다성적(polyphonisch)으로 작품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뒤프렌느는 ‘재료’(matière)ㆍ
'재현〔묘사〕󰡑(représentation)ㆍ'표출’(expression)이라는 작품의 세 가지 국면을 분석하고 각각에 ‘감성적인 것’(lesensible)ㆍ'의미’(signification)ㆍ'감정’(sentiment)을 관련시키면서 논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에서 고유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은 표출이며, 재현도 표출과의 관련 속에서 비로소 적극적인 의의를 획득한다고 하여 작품의 통일 원리로서 감정표출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또 페퍼는 작품은 단일하게 구성되는 것이 아닌 일종의 집합체(nest)라는 입장에서, 첫째로 물적인 것, 미적 가치를 담고 있는 대상을 들어 ‘물적 매개물’(physical vehicle)이라 부르고, 둘째로 그러한 매개물의 자극을 통한 직접적 지각의 ‘감각적 직접성의 대상’(object of sensuous immediacy)을 들고, 세 번째로는 그러한 직접적 지각의 ‘집적’(funding) - 듀이 용어로 과거 체험에서 현재 체험까지의 의미 융합을 의미한다. - 에 의해 형성된 이념적인 작품 전체를 들고, 예술 비평대상은 이 세 번째 의미의 대상이라고 한다.
또한 가이거는 예술의 가치 내포를 ‘형식적 가치’ㆍ‘모방적 가치’ㆍ‘내용적ㆍ적극적 가치’로 크게 나누고, 그들 상호관련을 논함과 동시에 각 요소가 다시 각각 ‘형식적’인 것과 ‘내용적’인 것이라는 양면의 기능ㆍ의의를 갖는다고 말한다. 그 이론은 본래 예술의 심적 의의를 논하려 했던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에서 형식과 내용의 통일관계를 해명하려 했던 시도라고도 생각되며, 이 점에서 작품 구조 분석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예술 작품의 내포를 구성하는 모든 계기를 두 가지 측면, 즉 ‘예술감각적 계기’와 ‘자연감각적 계기’의 선으로 분석하여, 형식→양식→표현(Ausdruck), 소재→내용→존재상징(Seinssymbolik)이라는 병렬적인 계기를 골라내고, 그들 사이의 융합ㆍ통일관계 속에서 예술의 본질적 구조를 파악해내려는 시도도 있다. 이것은 자연히 소위 대상구조론과는 궤를 달리 한다고 할 수 있으며, 예술작품의 통일적 성격을 스스로의 구상에 근거하여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런데 예술 작품의 근본 구조는 그 존재 방식상 ‘실재적 전경’과 ‘비실재적인 후경’이라는 두 가지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미리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객관화된 정신’에 공통된 보편적 구조인데, 예술 작품이 다른 정신적 산물과 다른 점은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예술 작품이 갖는 특질의 하나는 정신적 내포가 현상하게 되는 ‘전체적 세부’(das ganze Detail)를 실재적 형상의 형성에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신적 내포는 이 전경의 세부에서 항상 재획득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정신적 산물, 예를 들면 ‘개념’은 이러한 전경〔이 경우에는 용어(Wortlaut)가 그것에 해당된다.〕즉 재료의 형성이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부터는 어느 것도 형성시킬 수 없고, 다만 그것을 포괄할 수 있는 어떤 관련〔예를 들면 개념 체계〕을 바탕으로 해서만 어떤 내포를 현상시킬 수 있다. 예술 작품은 그러한 외적인 어떠한 것에도 기초하고 있지 않다. 실재적 형상의 충만으로 관조자에게 정신적 내포를 현상시킬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술 작품은 본질을 그 자체에서 가지며, 그 점에서 전경과 후경 사이에 강고한 불변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예술 작품의 강고한 통일성은 우선 이것에서도 증명될 것이다.
또한 개념이나 기타의 것에서는 이념적 내포가 직접적으로 전경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는데 비해, 예술 작품에서는 어떤 단일한 후경이 현상하는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이며 동시에 현상관계에서만 현존하는 몇 개의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층이 있는 전체적인 서열이 현상하는 것이다. 실재적인 전경은 단일하지만 현상하는 후경은 보다 전경에 가까운 층에서부터 이념적인 것의 최종 층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으로 분화하고, 그들 개개의 후경층은 보다 전경적인 층에 의해 현상되며, 또한 보다 후경적인 층을 현상시키는 데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후경의 다층적ㆍ개념적이 아니라 구체적ㆍ직관적인 것으로, 반성에서는 간접적(sekundär)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현상하게 된다.
요컨대 예술 작품은 그 존재 방식에서 보면 중층적이고, 내용적 전체 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다층적’(Vielschichtig)이다. 이 양자는 모두 작품 본질에 따라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즉, 전자는 그 역사적 존재에 대한 존재적 조건이며, 후자는 그 깊이와 풍부함에 대한 감성적ㆍ의미적 충실이 지닌 미적 가치의 높이에 대한 조건이다. 여러 층의 서열과 함께 전체의 구체적인 풍부함이 더해져 층으로 깊어짐에 따라 구체적ㆍ직관적 현상의 ‘경이’(Wunder)가 중대한 것이다.
이리하여 실재적 전경에서 최종적 후경층에 이르는 여러 층은 현상관계에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고, 전체로서의 유기적 총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계층화된 현상화의 전체적인 무게는 실재적 전경층에 관계하게 된다. 예술가는 이 층만을 직접 형성할 수 있고, 다른 모든 중간층은 이 층을 통하여 이 층의 형성에 이끌리면서 간접적으로 형성되고 현상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작품의 각 층이 각각 고유의 형성으로 존재하고, 각 층이 각각 고유의 형성으로 존재하고, 각 층의 형성은 보다 후경적인 층의 현상을 위해 이루어지므로, 최전경 층의 형성은 현상에서 초래할 최종 층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 층의 형성이 미적 형식인 것은 아니다. 미적 형식은 여러 층의 형성 사이의 상호관계에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각 층 형성의 상호 관계가 문제로 된다. 각 층은 고유한 형성을 가지며, 관조자는 각 층에 고유한 내용을 보고 알아차린다. 그러나 각층이 현상 관계에서 긴밀한 전체를 형성하는 것이라면, 형식과 내용의 대립은 전체적 통일의 범위 내에서 해소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상에서 약술했던 작품 구조는 아주 원리적인 것에 불과하다. 층의 배열(Schichten
folge)도, 층의 수도 각 예술의 종류에 따라 달리 될 것이다. 특히 ‘묘사예술’과 ‘비묘사예술’ 사이의 구조는 현격히 다르게 될 것이 틀림없다. 결국 작품 구조는 소재에 따라, 나아가서는 그것에 대한 ‘시각’과 그에 따르는 ‘형식부여’(Formgebung) -소위 양식- 에 따라 달리 될 것이다.
주로 N. 하르트만의 분석에 따른 예술 작품의 구조는 대략 이상과 같다. 어찌했든 성공한 작품에서는 어떤 보편적ㆍ본질적인 것이 다양한 중개 층에 의해 매개됨으로써 생생한 직관적 성격을 가지게 되며, 또 그 점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생에 깊게 뿌리박은 것으로서 현상될 것이다. 작품에서 최종적으로 현상하는 것은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존재자의 진리’라 하며, 또 야스퍼스식으로는 ‘포월자(包越者)의 현실’이라고 받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N.하르트만이나 뒤프렌느 등이 말하는 것처럼 더 이상의 분석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미적 자연대상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미적 대상의 성격은 미적 자연대상에 관하여 생각할 경우 특히 중시해야 할 점이다. 예술 작품에서 정신적 내포는 실재적 전경의 형성에 의하여 그 구체적 세부에서 현상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측면에서 다시 받아들이면 예술가에 의한 형성은 관조자에 대하여 실재적 형상에서 현상하는 정신적 내포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안내’(Lenkung)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적 대상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인간에 의한 형성이 가해지지 않기 때문에 주관의 존재 방식은 예술 작품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강도 높은 것이 될 것이다.[여기에서 창조적 주체와 대비적으로 신에 의한 형성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점은 여기서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데 미적 작용이 N.하르트만이 말하듯이 ‘지각’과 ‘고도의 직관’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에 따라 예술 작품의 중층적 구조가 도출되었듯이 - 미적 자연대상에서도 지각에 직접 주어진 것과 그것을 통하여 간취(hindurchschauen)된 것이라는 이중 구조를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자연대상은 정신적 산물이 아니므로 보고 알아차리게 된 것인 후경은 예술 작품에서와 같은 정신적 내포가 있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어떤 동물의 윤기 나는 아름다운 모피에 싸여 어떤 ‘생기’ (das Vitale)를 느끼고 쾌감을 맛본다고 해도, 거기에는 대상과의 거리가 없는 이상 ‘생기 넘치는 감정’(Vitalgefühl)의 대상은 있을 수도 없고, 미적 대상도 성립할 수 없다. 대체로 인체 미는 인체에서 생기 있는 것 -특히 성(性)적인 것에 대한 직접적 관심과 쾌감정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생기 넘치는 감정에 매개되고 그러한 것을 통하여 힘과 삶의 충만함(Kraft und Lebensfülle)을 알아차릴 때 성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에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것을 대상으로 하여 형상적인(bildhaft)것으로 관조하고, 그 외적인 형태ㆍ운동 등의 인상을 통하여 어떤 다른 것, 즉 동물의 본능적인 것, 적합성이라는 것 등을 알아차릴 때, 그 동물은 미적 대상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또 어떤 광물의 결정이 아름다운 것으로 되는 것도, 우리들이 가령 그 결정 구조를 지탱하는 광물학적 법칙에 관하여 아주 무지하다고 해도 그 정합적인 형태의 인상을 통하여 그러한 법칙이 현존하는 것과 그러한 법칙에 의거하여 각 부분이 결정되어 간다는 경향이 잠재하고 있다는 것에 관하여 명확한 감정을 마음에 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 자연적 대상이라도 그 ‘현상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총 구조가 존재하는 것이 명확하다. 다만 자연 대상에서는, 현상하는 후경은 예술에서처럼 관조자에 대해서만 성립하는 비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관조자에 대하여 스스로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자연 대상에서는 예술 작품에서와 같이 존재 방식에서 보았던 중층성은 존재할 수 없다. 그렇지만 후경은 가령 그것이 실재적인 것이라도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고, 다만 간취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현상의 구체적인 형태를 통해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기 때문에 현상하는 것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현상 방식이 예술 작품과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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