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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 (Immanue Kant)

칸트(Immanue Kant, 1724~1804)
계몽주의 철학의 조류들이 칸트철학에서 종합 ․ 체계화되는 한편, 또한 계몽주의 미학에서 논의된 많은 문제가 칸트에 의해 비판주의적 입장에서 재검토되었다. 1764년 영국 ․ 프랑스 미학사상이 영향 하에서 『미와 숭고의 감정에 대한 고찰』(Die Beohachtungen über das Gefühl des Schönen und Erhabenen)을 쓴 후, 칸트는 논리학과 인간학 강의에서 재차 취미, 미와 숭고, 천재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렇게 마련된 미학 연구는 1790년에 이르러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의 제1부 『미적 판단력의 비판』으로 발표되었다.
비판철학 체계의 일환을 이루는『판단력 비판』에서는,『순수이성 비판』에서의 자연개념의 기초와 『실천이성비판』에서의 자유개념의 기초를 연결시키려 하고 있다. 인식능력과 욕구능력의 중간에 있는 ‘쾌 ․ 불쾌의 감정’(Gefühl der Lust und Unlust)에 대한 반성적 판단력의 구성적 원리로서 ‘자연의 주관적 합목적성’(Subjek
-tive zweckamäßigkeit der Natur)이라는 원리를 찾아낸 칸트는, 대상이 우리의 인식능력에 적합함으로써 쾌감이 생겨날 경우에 이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 주관적 · 형식주의적 합목적성을 쾌 · 불쾌의 감정에 의해서 판정하는 능력이 미적 판단력 또는 취미이다. 이 판단이 ‘취미판단’(Geschmacksurteil)이다. 칸트는 그 특질을 우선 질 · 량 · 관계 · 양상의 4가지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진 · 선 · 쾌적 등으로부터 구별된 미의 자율적 성격을 주로 미의식의 측면에서 규명하고 있다.
취미판단은 미감각(ästetisch)인 판단이고, 대상의 표상을 객체가 아니라 주체의 쾌 · 불쾌의 감정에 연관시킨다. 즉, 미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만족 감정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진(眞)과 다르다. 또한 쾌적과 선에 대한 만족이 대상의 존재표상과 결부되어 대상에 대한 ‘관심’(Interesse)을 포함하는 데 비하여, 취미판단에서는 대상의 존재가 그리 중요하지 않고 단지 관조를 통해 그 대상을 어떻게 파악하는가가 문제로 된다. 따라서 미는 관조적인 (Kontemplativ)판단이나 아무런 관심도 포함하지 않은 만족(Wohlgefallen ohne alles Interesse)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쾌적이나 선으로부터 구별된다. 쾌적은 쾌락을 주는 것으로서 기호(嗜好, Neigung)에 관계되고, 선은 올바른 것으로서 존경에 관계되며, 만족을 주는 미는 은총(gunst)과 관계된다. 또한 쾌적은 동물에도 있고 선은 순수한 이성적 존재에서도 가능하지만, 미는 단지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칸트에 따르면, 어떤 목적이 만족의 근저에 있는 경우에 그 만족에는 관심이 수반되기 때문에 취미판단의 근저에는 어떠한 목적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취미판단의 근거는 대상에 있어서 목적의 표상을 갖지 않는 주관적 합목적성, 다시 말하면 우리의 파악 작용에 적합한 대상의 형식에 존재하는 합목적성이다. 취미판단은 자극과 감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객관적 합목적성에 근거하는 대상의 유용성과 완전성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자유미’(die freie Schönheit)를 그 전형으로 하는 순수한 미는 목적개념의 표상없이 지각된 대상의 합목적적 형식이기 때문에, 대상의 개념과 완전성을 전제로 하는 ‘부용미’(附庸美, die anhängende Schönheit)나 도덕적 이념의 가시적 표현인 ‘미의 이상’(das ideal der Schönheit)에 관한 취미판단은 순수한 취미판단이 아니다.
이상과 같이 칸트는 미적 만족의 무관심성과 미적 형식의 주관적 합목적성을 지적하는 동시에, 더 나아가 취미판단 형식의 특질에 대해서도 검토하고 있다. 쾌적한 것에 대한 판단의 타당성 여부가 개인에게 국한되어 있음에 비해, 무관심적인 취미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타인이 자기의 판단에 찬동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취미판단의 보편성은, 논리적 판단이나 도적적 판단이 지니고 있는 바와 같은 개념에 근거한 보편성이 아니다. ‘아름답다’고 하는 술어를 대상의 개념 전체에 결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 모두에 대해 타당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의 ‘주관적 보편성’(subjektive Allgemeinheit)이야 말로, 취미판단에 고유한 보편성이다. 또한 취미판단은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얻을 수 있는데, 이 필연성은 인식과 도덕적 실천에서의 개념에 따른 필연성과는 다른 ‘예증적 필연성’(die exemplarische Not-Wendigkeit)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미는 개념을 갖지 않고 보편적 · 필연적 만족을 주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취미판단이 대상의 객관적 성질을 지시함이 없이 단지 관조자의 주관적인 감정 상태를 표시하는 데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미적 감정이 보편적으로 전달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칸트는 이 문제를 중요시하여, 여기에 답하기 위해 선험론의 입장에서 미의식의 구조를 해명했다.
칸트에 의하면, 보편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인식과 인식에 속하는 표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취미판단은 주관적 판단이므로, 보편적으로 전달되는 미적 쾌감의 근거는 반성적 판단력의 주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조건들, 즉 주어진 표상을 ‘인식일반’ (Erkenntnis überhaupt)에 관계지우는 한, 각 표상력들간의 상호관계에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식을 위해서는 다양한 직관을 결합하는 구상력과 개념의 통일을 관장하는 오성이 필요하지만, 대상의 개념을 갖지 않는 취미판단에서는 이러한 인식능력이 개념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활동 상태에 있다. 때문에 미적 감정의 근거가 되는 것은, 인식일반에서 필요한 바와 같은 조화로운 구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운동’(freies spiel)이다. 미적 쾌감은 이 인식능력의 생기넘치는 활동을 지속시키려 한다. 우리가 미적 관조에서 배회하는 것은, 이 관조가 그 자신을 끊임없이 강력하게 재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식이 보편적으로 전달된다면, 인식일반에 대한 인식능력의 정조상태(情調狀態, stimmung), 특히 표상으로부터 인식을 성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구상력과 오성의의 균형(Proportion)도 보편적으로 전달된다. 이러한 인식능력의 정조는 객체가 다름에 따라 각각 다른 비율을 요구하는데, 취미 판단은 구상력과 오성이 서로 생기를 부여받는 데에 가장 적절한 균형관계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정조상태는 감정으로서 파악할 수밖에 없고, 인식능력의 정조상태가 보편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라면 이 감정도 또한 보편적으로 전달되어야만 한다. 칸트에 의하면, 이 감정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으로서 전제된 ‘공통감각’(Gemeinsinn)인데, 이것은 말하자면 판단능력의 이념이자 단순한 이상적 규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감각을 전제함으로써만 우리는 취미판단을 내릴 수가 있다.
인식 일반과 공통감각 등의 개념을 도입하여 미의식의 선험적 구조를 설명한 칸트는 궁극적으로 ‘인간성의 초감성적 기체’(über sinnliches Substrat der Menschh
eit)로서 상정된 것에 대한 부정(不定)의 이념 속에서 취미판단의 규정근거를 찾았다. 우리의 인식능력은 모두 이 초감성적인 것에 대항하여 화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적 능력과 실천적 능력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모종의 방식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그리고 초감성적인 것에 뿌리를 둔 취미판단이 도덕적 판단과 유사한 성질을 갖는 한, 칸트는 미를 ‘도덕적 질서(인륜성, Sittlichkeit)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계몽주의 미학의 전통에 따라서, 칸트는 미의 분석 외에도 숭고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 거기에 따르면 숭고에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수학적 숭고’와 대단히 강력한 힘으로서의 ‘역학적 숭고’가 있는데, 그 어떤 경우든 자연에서의 숭고의 본질은, 유한한 감성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 결국 우리의 정신 속에 무제약적인 이념을 환기시키고 이성의 위대함을 깨닫게 한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그것은 원래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정 속에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관에 있어서 인간성의 이념에 대한 경외(Achtung)의 감정인 숭고의 감정을 일종의 ‘전환’(Subreption)을 통해서 자연대상에 부여한다. 칸트가 숭고에서의 합목적성을 주체의 객체에 대한 합목적성으로 간주하고, 또한 미를 판정할 때 구상력과 오성의 조화가 주관적 합목적성을 환기시키지만, 숭고를 판정할 경우에는 구상력과 이성의 배반이 주관적 합목적성을 환기시킨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무리 위압적인 자연현상에 마주친다할지라도 우리는 이성의 우월성을 가지고 거기에 맞설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주는 것이다.
미적 대상의 형식이 우리의 판단력에 적합한 합목적성을 지니고 있었던 데 비하여,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몰형식적 대상이고 구상력을 압도하며 판단력에 있어서 합목적적이지 않은 것이다. 숭고한 것은 한편으로 구상력을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으로 이성을 매혹시키고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한다. 미의 감정은 삶을 활성화시키는 관조적인 감정이지만, 숭고의 감정은 역동적인 생명력이 순간적으로 정지되었다가 한층 강하게 용솟음치는 데서 생겨나는 간접적 감정인데, 이것은 적극적 쾌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탄과 경외의 감정을 포함하는 소극적인 쾌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칸트는 미나 숭고에 관한 미적 향수의 문제를 검토한 후, 천재의 예술창작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한 예술론을 전개했다. 그는 우선 예술을 기술(kunst)의 일종으로 파악했다. 기술은 한편으로 자유로운 목적의식적 산출행위로서 필연적인 자연작용으로부터 구별되고, 다른 한편 인간의 실제적 능력으로서, 단순한 이론적 능력이나 학문적 지식으로부터도 구별된다. 그것은 목표하는 대상의 개념을 실현하고자 할 경우 ‘기계적 기술’(Mecanische Kunst)이 되고. 쾌락의 감정을 직접 목표로 할 경우 ‘미감적 기술’(ästhetische Kunst)이 된다. 또한 후자는 쾌감의 질에 따라 ‘쾌적한 기술’(angenehme Kunst)과 ‘미적인 기술’(예술)(Schöne Kunst)로 분류된다. 예술도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려는 일종의 의도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미가 개념에 의한 것이 아닌 단순한 판정에서 만족을 주는 것인 이상, 그것이 실제로는 의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의도적인 것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예술작품은 기술의 산물로서 의식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자연의 산물로 간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가가 심정적으로라도 개념에 근거하는 일정한 규칙에 구속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규칙에 전혀 의거하지 않는다면 예술은 이미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주관적으로는 자연이 예술에 규칙을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야만 한다. 이리하여 칸트에 의하면, 예술가의 선천적인 생산능력이며 그 자체가 자연에 속하는 재능, 즉 ‘천재(Genie)가 예술에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며, 예술은 천재의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의 판정에는 취미가 필요하지만 예술의 생산에는 천재가 요구된다. 천재는 ①특정한 규칙이 부여되지 않는 것을 산출하는 재능으로서 독창성(Originalität)을 그 특질로 하고, ②그러나 그 산물은 독창성의 무의미한 소산이 아니라, 뒤를 잇는 천재들의 독창적인 창작활동을 촉발하는 모범(Muster)이지만, ③이러한 모범이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산출 법칙을 타인에게 교시(敎示)해 줄 수 없다. 칸트는 예술적 창작에서의 천재의 의식구조를 미적 향수에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구상력과 오성의 관계를 가지고 설명한다. 예술 창작에는 목적으로서의 산물(産物)의 개념을 제공하는 오성과, 미발전된 요소로서의 풍부한 직관적 표상을 제공하는 구상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주어진 개념 속에는서 약간의 이념을 발견해내고, 다른 한편 이 이념에 상당하는 표현을 찾아내 거기서 생겨나는 주관적인 기분을 타인에게 전달하기에 적절한 일종의 만족스러운 정신적 관계에 있을 때, 즉 단지 주관의 자연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구상력과 오성의 특수한 비율에 의해서 천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념을 표현해낼 수 있는 천재의 능력을 캍트는 특히 ‘정신’(Geist)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심정에 생기(Belebung)를 불어넣는 원리이고 ‘미감적 이념의 표현능력’(Vermögen der Darstellung ästhetischer Ideen)인데, 그 자체로서는 구상력의 한 재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술에서 표현되는 미감적 이념은 이미 주어진 개념과 연합한 구상력의 표상이다. 또한 미감적 이념은 유사한 표상의 끝없는 광야를 바라보게 해줌으로써 특정 개념으로는 총괄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로 되고, 그 개념을 무한히 미적으로 확장함으로써 심정에 담긴 힘 전체에 생기를 부여한다. 어떠한 개념도 거기에 적합하지 않는 구상력의 표상으로서의 미감적 이념은, 어떠한 직관도 거기에 적합하지 않는 개념으로서의 ‘이성이념’(Vernunftidee)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자를 이성의 증명할 수 없는 (Indemonsttrabel)개념이라고 부른다면, 전자는 구상력의 해명할 수 없는 (inexponibel)표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천재는 미감적 이념의 능력이며 예술은 미감적 이념의 표현에서 성립한다고 주장한 칸트는,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데 사용하는 표현방식과 예술적 표현 유비관계에 기초하여 예술의 분류를 시도했다. 대화에서 사용되는 단어(Wort) · 태도(Gebärdung) · 어조(Ton)에 대응하여, 예술은 ① 언어예술(redende kunst), ②조형예술(bildende kunst), ③감각의 유희예술(kunst des Spiel -s der Empfindungen)로 대별된다. 이것을 좀 더 하위의 유형으로 구분한다면, ①은 웅변술(Beredsamkeit)과 문예(Dichtkunst)로, ②는 조각이나 건축과 같은 넓은 의미의 조형미술(plastik)과 회화나 원예(園藝)와 같은 넓은 의미의 회화(Malerei)로, ③은 음악(Musik)과 색채예술(Farbenkunst)로 구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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