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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예술론과 시학 ] ()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전문화부흥의 기운에 힘입어 예술 자체가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이와 함께 새로운 예술사상도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것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1) 조형예술에 관한 각종 이론과, (2) 시학*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1)은 당시 예술의 실제 성과에 자극받은 한편, 나아가 그에 관한 직접적 반성 위에서 생겨난 것인데, 대체로 회화와 조각 ․ 건축에 관한 기법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예술의 본질적 문제와 닿아 있는 것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2)는 단테 (Dante Alighieri, 1265~1321)이래 이탈리아문화의 융성과 인문주의자 (Humanist)에 의한 고전문예의 연구를 계기로 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시학』을 재발견함으로써 16세기에는 수많은 시학연구자들이 배출되었다. 또한 이러한 예술론과 시학 외에 16 세기 후반에는 철학 분야에서 미와 예술에 대한 추상적 사색이 등장했다. 이것은 내용적으로도 가 당시까지의 예술론과 시학에 대립되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 예술론

예술론에서의 중심문제는 다음과 같다. (1) 예술의 권위 회복. 중세에서는 종교생활에 예속되어 있었던 예술 활동을 종교로부터 해방시키고 인간정신의 자유로운 활동으로서 그 독자적인 발전을 지향하는 것이 당시 예술론의 근본 동기를 이루었다. 이것은 우선 예술을 일종의 자연에 대한 인식으로서 학문과 동등한 지위에 놓음으로써 달성되었다. (2) 모방. 예술의 과제는 자연의 모방*에 있게 된다. 그것도 소위 자연주의적 모방이 아니라 자연의 근저에 깔려 있는 법칙에 따른 모방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연의 창조적 활동 자체에 대한 모방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모방설은 르네상스 예술론의 중추를 이루는 사상이며, 고대 미학사상의 부활이라고 볼 수 있다. (3) 이상화(理想化). 모방과 함께 자연의 미화 또는 이상화*(Idealisierung)에 대한 요구가 존재한다. 미는 조화와 비례에 근거하는 다양한 법칙에 의한 통일이고, 한편 미술도 그러한 통일로서의 미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자연을 이상화하고 거기에 조화와 비례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언뜻 위의 모방설과 상반될 것 같지만, 조화와 비례를 자연의 법칙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모방과 이상화는 당시에 이론적 모순없이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4) 창작의 규칙. 모방이 근거해야 할 자연법칙은 본래 수학적 ․ 과학적 법칙이며, 예술의 창작에는 원근법*과 해부학에 관한 지식이 불가결하게 된다. 이러한 지식을 제공하고, 또한 거기에 근거하여 창작의 객관적 ․ 보편적 규칙을 보여주는 것이 당시 예술론의 중심과제였다.
다음에는 개개의 이론가에 대하여 살펴보자. 14 세기 말에 출현했던 첸니니(Cennino di Drea Cennini, 1370(?)~ 1435(?))의『회화론』(Trattato della pittura, 1390(?))은 많은 점에서 여전히 중세적 색채를 지니고 있으나, 자연관찰의 중시, 그리고 인체비례에 대한 언급 등을 통해서 이미 새로운 시대의 숨결을 전하고 있다. 알베르티(Leon Battistta Alberti, 1404~72)는 참으로 르네상스에 상응하는 태도로 예술을 논했던 최초의 인물이며, 그의 『회화론』(De pictura libri ∐,1436)은 근세미학의 단초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과학적 ․ 합리적인 관점으로부터 시각예술로서의 회화의 본질을 해명한 것이며 원근법에 정초하고 있고, 해부학을 응용한 인체 비례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회화는 자연모방을 기초로 하지만, 그것은 자연과의 단순한 외형적 유사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성에 따라 조화로서의 미를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사후에 출판된『건축론』(De re aedificatoria libri X,1485)은 비트루비우스*(Vitruvius Pollio, M)의 절대적 영향 하에서 건축의 소재 ․ 구조 ․ 목적 ․ 종류 등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논한 것인데, 여기서 그는 미를 “일정한 수와 비례와 질서에 따른 부분과 전체와의 화음이며, 조화(concinnitas), 즉 절대적인 최고의 자연 법칙이 요구하는 바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회화론』(Trattao della Pittura, 1651. 후세에 편찬된 것만을 참조했다-역자)은 르네상스 예술론의 모든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원근법 ․ 비례설 ․ 색채론 ․ 해부학 등에 대하여 매우 진보된 과학적 고찰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근본적으로 예술을 일종의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양자의 차이에도 주목하여, 가령 수학이 양(量 )만을 다루는 데 반하여 예술은 질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 등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회화를 시각예술의 기초로 삼는 - 다른 감각과 표상에 비해 시각은 고도로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 한편, 이것이 조각 ․ 음악 ․ 시보다 상위에 있으며 자연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회화는 자연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말하자면 ‘제2의 자연’이며. 화가는 그의 창조활동 속에서 자연과 경쟁하는 것이다. 또한 미를 형식적 요소들의 조화적 ․ 비례적 관계에서 찾는 외면적 해석도 엿보인다. 15~16 세기에는 이밖에도 원근법과 비례설에 대한 저서가 속출하였다. 그 중에서도 프란체스카(Piero della Feancesca, 1316(?)~92)의 『회화의 원근법』(Deprospectiva pingendi), 황금분활* 이론의 선구라고 말해지는 파치올리(Fra luca pacioli, 1450(?)~1520(?))의 『신적 비례론』(De divina proportione. 1509), 독일인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인체비례에 대한 사서(四書)』(Vier Bücher von menschlicher propotion, 1528)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16 세기 후반에 이르러,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소위 마니에리즘*(Manierismus)이 대두함에 따라 예술론에도 이에 상응하는 전기가 마련되어 예술의 정신적 ․ 창조적 계기에 눈을 뜨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바사리(Giorgio vasari, 11~74)의『이탈리아 예술가 열전』(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 archittetori italiani, 1550)은 이러한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도안’(disegno)과 예술가의 내면적 · 창조적 활동으로서의 ‘구상’(invenzione)을 중시하여, 양자를 회화 · 조각 · 건축의 모태라고 한다. 이러한 경향을 조장했던 것은,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99)에서 시작되어 파트리치(Francesco Patrizzi, 1529~97), 부루노(Giordano Bruno, 1548~ 1600) 등에 의해 15 세기 무렵에 이르러 충분히 전개되어 있던 플라톤주의의 신비적인 미론이다. 거기서는 미에 대한 외면적 · 형식적 정의 대신에, 미를 궁극적으로 신의 광휘에 대한 반영이라고 보는 내면적 · 정신적 해석이 행해졌으며, 또한 예술창작에서도 규칙 대신에 자유가 중요시 되었다. 이러한 철학적 · 추상적 사색의 영향을 받아 이것과 종래의 과학적 · 경험적 고찰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 바로 로마쪼(Givanni Paola Lomazzo, 1538~ 1600)의 『회화론』과 『회화의 전당의 이념』(L󰡑idea del tem
-pio della pittura, 1590)이다. 그는 회화를 자연의 모방이자 예술가의 내면적 이데아의 표현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비례설에 대해서오 언급하였는데, 회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빛과 운동을 들고 있다.

2) 시학 55

이탈리아에서 모국어 문예가 성장하고 인문주의자에 의해 고전 문예가 발견 ․ 수집 ․ 연구됨에 따라, 시학은 14 세기 이래 그 기반을 서서히 확장시켜 나갔다. 이미 단테는 『속어론』(De Vulgari eloquentia, 1305(?)을 발표하여, 당시의 공용어이자 시어(詩語)였던 라틴어에 반대하여 속어(이탈리아어)를 예술적으로 순화시키는 데 힘쓰고, 이탈리아어를 사용한 시 창작의 조건들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이어서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 1304~74)와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 75)는 시인이면서, 동시에 인문주의자로서도 탁월했는데, 그들은 중세의 시에 대한 멸시와 배척에 대항하여 시를 옹호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시학이 독립된 형태를 갖추고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던 것은 예술론보다도 늦은 16 세기에 이르러서 이다. 이 무렵부터 점차 시와 시작(詩作)에 대한 관심이 보편화 되고 시학 성립의 조건도 성숙하게 되었다. 단테의 『속어론』도 실은 16 세기에 발견되고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성립의 단초에 도달한 시학이 최초로 그 모범으로서 받아들였던 것은 호라티우스*(Horatius)의 『시론』(Ars poetica)이다. 이것은 뒤이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함께 2대 권위로서, 르네상스 시학의 성격을 규정하고, 모든 문제의 제기 및 해결에 지침을 제공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불가사의하게도 중세에는 거의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인데, 15 세기 말에 그 원전이 점차 이탈리아 학자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16 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많은 시학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1549 년에는 최초로 이탈리아어 번역본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서부터 르네상스의 시학은 최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개된 시학의 중심문제는 다음과 같다. (1) 시의 옹호. 고대에서의 플라톤이 가한 비난과 중세교회의 배척으로부터 시를 옹호하는 일은 당시 시학의 근본 동기를 이루는 과제였다. 이미 페타라르카, 보카치오를 필두로 하는 인문주의자들은 신학적 입장에서의 시에 대한 우의(寓意)적 해석을 통해 시를 옹호하고 있었다. 즉, 시는 이야기라는 가면을 쓴 진리이며, 더 나아가 신학 자체를 시의 한 형식, 신의 시라고 간주하였다. 이러한 우의적 해석은 일부 시학자들에게 계승되기도 했지만, 시학은 주로 호라티우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하여, 다음에 설명될 시의 목적 및 모방의 관점에서 이러한 과제(시의 옹호)의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2) 시의 목적. 시는 인생에 관한 지식과 교훈의 제공을 목적으로 한다고 간주되며, 특히 호라티우스의 “오락에 효용을 섞어 독자를 즐겁게 하면서 교훈을 준다.”라는 말에 근거하여, 시의 교훈적 ․ 도덕적 의의가 전면적으로 상조되었다. 교훈적 목적의 달성에 유효하면, 쾌락도 또한 시의 효과로서 받아들였다. (3) 모방. “시는 회화처럼”(ut pictura poesis)이라는 호라티우스의 문구가 신봉되고 시도 또한 모방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었는데, 모방의 대상으로서는 외적 자연 보다도 내적 자연과 인생이 중심에 놓여졌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인해 모방의 주요한 대상을 인간의 행동에 한정시키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모방에 관하여 당시의 시학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받아들인 가장 중요한 것은 시는 보편적인 것과 개연적인 것을 묘사한다는 사상이다. 여기에 근거하여 시와 역사의 차이, 즉 시는 인생을 사실적으로가 아니라 개연적으로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이에 따라 시에 대한 과거의 비난도 최종적으로 극복되고, 시의 존립에 확고한 보증서가 주어졌던 것이다. 또한 자연의 모방, 인새의 모방과 나란히 줄기차게 대두되었던 것으로 ‘고대인에 대한 모방’(이하 ‘고대인의 모방’)이 있는데, 이것도 당시 시학의 중요한 문제였다. (4) 창작의 규칙. 상상력과 감정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표현의 명석함, 구성의 통일, 장르 상호간의 엄격한 구분이 요구되고, 시의 창작에 있어 객관적 ․ 보편적 규칙을 만들어내는 일에 노력이 경주되었다. 이런 점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시한 규칙은 마치 회화에서의 원근법과 해부학 같이 신봉되었다. 그러나 그 규칙이 반드시 올바르게 이해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해되거나 곡해된 부분이 적지 않은 바, 아리스토텔레스의 단편적 어귀들만을 섭렵하여 예컨대 비극의 3통일* (줄거리 ․ 시간 ․ 장소의 통일)과 같은 편협한 규칙을 만들어 내려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이제 개개의 대표적인 시학자에 대하여 살펴보자. 비다(Marco Girolamo Vida, 1480~1566)는 최초의 위대한 시학자이며, 후세의 영국과 프랑스 고전주의 시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시법』(Dearte Poetica, 1527)은 대체로 호라티우스에 근거한 것으로, 고대인의 모방, 자연의 모방, 이성의 존중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고대인의 모방에 대해서는 호메로스와 베르질리우스(Vergilius, 70~19 B.C,)가 그 모범적 대상으로서 찬양된다. 그러나 전자에는 결함이 있지만 후자는 완전하다고 하여, 비다는 당시 베르질리우스 숭배의 선구자가 된다. 그는 또한 시인은 자연을 관찰하고 거기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때 그 자연은 극히 제한된 의미에서의 자연을 가리키며, 인간은 ― 그것도 도시와 궁정의 문명생활에 젖은 인간이라는 정도의 의미로만 쓰였다. 또한 자연에 따르는 것도 결국 고대인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비다의 자연 모방은 고대인의 모방에 종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의 존중은 시적 표현에 대해 명석함과, 과장을 배척한 중용의 절도를 요구한다. 예를 들면 적절한 말이 발견될 수 없을 때, 또는 발견된다고 해도 체재(體裁)에 맞지 않을 때는 완곡법(euphemism)을 사용해야 한다. 고유명사 중에서 듣기 어려운 발음은 부드럽게 고쳐야 한다. 그리고 창작에 임해서는 영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연습에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비다는 극시에 비하여 서사시를 시의 최고 형식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이후의 시학에서도 계속되는 견해이다. 여기서 당시의 시학과 고대시학 사이의 한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다니엘로(Bernardo Daniello, 1530 년경 활약 ―『시학』La poetica, 1536)는 시의 도덕적 의의를 강조했다. 그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설에 가장 빨리 접촉했던 사람이며 시와 역사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 1483~1553)는 철학자로서도 유명한데, 그의 『니게리우스―시에 대한 대화』는 당시로서는 가장 철학적 색채가 진한 시론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방의 대상은 인생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자연일반을 포괄하는 것이다. 게다가 시를 시답게 만드는 것은 표현의 대상이 아니라 표현 방식이다. 철학자나 역사가와는 달리 시인은 수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미적 표현을 해야 한다. 또한 시는 대상의 특수성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속하는 유(類)의 본질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본질의 표현은 미의 이데아를 표현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프라카스토로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시론과 플라톤의 미의 사상을 결합하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시의 목적이 쾌락과 교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쾌락은 자연물에서조차도 얻을 수 있으며, 교훈은 학자의 본해적 사명이다. 하지만 시의 목적은 미에 의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민트루노(Sebastiano Minturno, 1560 경에 활약― 『시학』1559;『시법』1564)는 시의 도덕적 의의를 상조하고, 더 나아가 시인 자신이 후덕한 인격을 지니지 않으며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위 비극의 카타르시스에 관해 논하면서, 비극의 목적 자체는 윤리적인 것이지만 카타르시스는 정서적 효과라고 해석함으로써, 이 개념에 대한 윤리적 해석이 우세했던 당시로서는 이채를 띠고 있다. 그는 또한 당시의 시학자 중에서 비교적 상세히 시를 분류함으로써, 서사적 ․ 극적 ․ 서정적 문예의 구분에 상당하는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르네상스 전체를 통하여 서정적 문예는 아직 독립된 한 장르로서 취급되지 않았고, 체계적으로 논의된 일도 없었다.
스칼리거(Julius Caesar Scaliger, 1484~1558)는 비다와 함께 후세에 유럽 여러 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광범위한 『시학』(poetices libri septem,1561)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확고부동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반드시 아리스토텔레스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스칼리거에 의하면 시는 운문에 의한 모방이다. 운율은 단순한 사실의 표현에 허구적 성격을 부여하며, 시를 개연적인 것의 모방으로 만든다. 만일 역사가 운문으로 씌여졌다면, 그것은 이미 역사가 아니라 역사시이다. 자연성의 모방자로서 시인은 마치 신과도 같이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고, 그 운명을 자유로이 조종한다. 시인은 동시에 고대인을, 특히 베르질리우스를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베르질리우스가 자연을 그 개연성에 있어서 가장 잘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제2의 자연으로서의 그를 모방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스칼리거는 자연모방의 기초 위에서 󰡐고대인의 모방󰡑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후자를 전자에 선행시켰던 비다와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스칼리거에 의하면 모방은 시의 목적 자체가 아니다. 시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즐겁게 하면서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윤리적 목적에 대한 강조는 비극론에서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선인은 행복으로 보답받고, 악인은 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시인의 종류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 신학적 시인과 철학적 시인(자연시인과 도덕시인이 여기에 포함되는데, 후자는 또한 법률적 시인과 경제적 시인으로 갈라진다0과 일반적인 시인(극시인과 서사시인 및 그 외의 시인이 포함된다)을 구분한다.
카스텔베트로(Ludovico Castelvetro, 1505~71)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번역과 주석』(Poetica d󰡑Aristotele Vulgarizzata et sposta,1570)이라는 책을 저술함으로써 스칼리거와 나란히 당시 최대의 시학자로서 추앙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주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카스텔베트로 자신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당시로서는 매우 참신한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운율은 시에 가장 어울리는 의상과도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의 본질적 요소인 것은 아니가. 시를 시답게 만드는 것은 표현의 제재(題材)이다. 시는 인간 행동의 모방이며, 또한 역사가 과거의 진실을 서술하는 데 비하여 시는 가능성을, 즉 그럴듯한 것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쾌락을 준다. 교화(敎化)는 학문과 역사의 과제이지 결코 시의 과제는 아니다. 이러한 견해를 토대로 카스텔베트로는 시인의 구상력과 기교를 중시하며, 특히 작품에 새롭고 신기한 것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고대인을 모방하는 일에 대해서도 그는 이미 그 의의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연극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비극의 상연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아 극히 무대적 ․ 실제적이라는 특색을 드러냈다. 예를 들면 연극은 관객 전체에게 쾌감을 주도록 상연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 대사에는 운문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관객은 오락을 추구하므로 시인은 고상한 논의를 피하고 인간의 기본적 정열과 관심을 묘사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하였다. 저 유명한 비극의 3 통일은 카스텔베트로에 의해 최초로 규칙으로서 정식화되었는데, 이것도 상연면을 고려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이 규칙에서 시간과 장소의 통일을 중요시한 반면, 줄거리의 통일에 대해서는 그것들만큼의 의의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16세기 중엽에는 또한 트릿시노(Gian- Giorgio Trissino, 1478~1550), 칸티오(Giraldi Giambattista Cinthio, 1504~73), 로보르텔로(Francesco Robortello, 1516~67), 탓소 부자(父子)(Bernardo Tasso,1493~1569, Torquato Tasso, 1544 ~95) 등등의 시학자들이 속출하였는데, 트릿시노와 베르나르도 탓소는 대체로 호라티우스에 근거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주석하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판을 치던 당시에도, 여기에 대한 반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철학자 부루노는 대화편 『영웅적 정열 』(De gl′Eroici furoi, 1585)에서, 사람들의 감수성과 사상에는 갖가지 차이가 있으며, 시인은 각자에 고유한 개성을 지닌다는 것, 규칙이 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가 규칙을 만들어 낸다는 것, 참된 시인은 스스로가 입법자라는 것 등을 지적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칙은 속류 시인에게만 필요하다고 단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철학자 파트리치는 반(反)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에서 이색적인 『시학』(Della poetica, 1586)을 제시하였다. 이 책의 제1부는 일종의 문학사로서 문예장르의 생성 ․ 발전을 논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방면의 연구에서 선구적인 것이다. 제2부의 이론적 부분에서 파트리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개념을 상세히 분석하고, 시가 설령 모방에 속한다 해도 모방이 시에만 고유한 것은 아니라는 것과 모방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아니기 때문에 시의 기원을 모방에서 찾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이리하여 그는 모방 이외의 것을 통해 시를 자리 매기려고 하지만, 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후의 시학의 과제로서 떠넘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항은 크게 확산되지 못했다. 파트리치 이후에 등장한 16세기 말의 일련의 시학은 재차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옹호에 몰두하기 시작함으로써 결국 그 권위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시학의 거장은 이윽고 저 유럽 고전주의 시학 이에 군림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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