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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미학사상] ()



기독교사상 시대였던 중세에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미학도 역시 신학의 지배 아래 있었고, 또한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순수하게 미학적인 저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미학사에서 중세가 암흑시대로 간주된 것도 어떤 면에서 보면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문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미학적 사상은 최근에 이르러 점차 재인식되고 있으며, 고대에 비하여 보다 심오한 세계관적 깊이를 지닌 것으로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중세미학의 개괄적 특징은 고대철학자의 미론을 비판적으로 섭취하여 기독교사상과 융합시켰던 데에 있다. 즉, 거기서는 그리이스인이 미의 표지로 삼았던 균제* ․ 조화* 등의 이념과 피타고라스적인 수의 개념, 플라톤적인 미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모방*의 원리 등이 계승되었고, 동시에 새로이 미와 예술이 신 ․ 영혼 ․ 우주 등과의 관계 속에서 형이상학적으로 성찰되고, 따라서 빛이나 상징*같은 개념이 주요 개념으로서 도입되었다. 더구나 미가 진(眞) ․ 선(善)과의 유기적 연관에 놓여지고, 특히 자연미*가 ‘신의 현현’(Theophanie)으로서 존중되었던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기독교의 신앙과 사랑 속에서 성장했던 중세미학은 교부시대 혹은 기독교적 고대하고 불리는 초기에 그 맹아를 틔웠고, 이 시기의 탁월한 사상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육성되었는데, 수세기동안의 발전을 거쳐, 스콜라 철학의 최전성기인 13 세기에 성 보나벤투라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 교부시대(기독교적 고대)의 미학 사상(4세기 ~ 7세기)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354~430)는 초기 기독교의 교리에 신학적 통일성을 부여하고, 중세 사상체계의 형성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위대한 독창적 사상가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고대 그리스 ․ 로마사상과 마니교의 사상에 몰두했지만, 개종과 함께 이들 사상을 섭취 ․ 극복하였으며, 그의 긴 생애를 통하여 숱한 신학적 저작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실존적 체험을 토로한 것으로 보이는『고백』(Confessiones)은 그의 신앙과 사랑의 생애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미와 예술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을 보여주는 단편들이 이 책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가 평생 미학적 문제들에 대하여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26,7세 경의 처녀작이라고 말하는『미와 조화(適合)에 대하여』(De Pulchro et apto)―『고백』에 분명히 씌어있듯이, 이것은 당시에 이미 유실되었던 것 같다 ― 와 잘 알려져 있는『음악론』(De musica) 6 권과 같은 순수한 미학적 저작으로부터 쉽게 알 수 있다. 그의 여러 저작 속에 흐르는 중심적 미학사상은 풍부한 직접체험에 근거하는 것이며, 체계화를 가능하게 할 만큼 충분한 재료를 제공하고 있다. 거기서는 대체로 미의 본질론이 중심과제인데, 그는 미의 본질로서 형상(forma) ․ 단일(unitas) ․ 동등(aequalitas) ․ 일치(convenientia) ․ 비례(proportio) ․ 질서(ordo) ․ 조화(harmonia) 등의 개념들을 열거하고, 또한 키케로*의 정의에 따라서 미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가진 부분의 조화”(partium congr uentia cum guadam colcris suavitate)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많든 적든 고대 그리이스 미학의 형식론적 전통을 계승한 것인데, 그의 미학의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는 것은 존재와 미의 본질을 ‘수’(numerus)에 귀착시키는 일종의 기독교적 피타고라스주의이다. 그에게 있어서 미는 이상적인 것이고, 그 본질은 이성에 적합한 수(혹은 리듬)에 근거하는 것이다. 수의 개념은 단지 피타고라스적인 신비적 ․ 우주론적 의미로 해석될 뿐만 아니라, 상징적 ․ 신학적 ․ 형이상학적 의미로도 파악되고, 또한 미의 감성적 ․ 직관적 원리로서도 충분히 고찰되고 있다. 거기서 수는 신적인 것과 영원한 것으로 되고, 미는 피타고라스적 우주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조화 위에서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자연과 예술의 구체적인 미는 그 자체로서는 불완전하고 변하기 쉬운 것이다. 그것은 그 근원을 이루는 이성적 ․ 정신적인 미, 즉 영원불변의 수이자 참된 동등 ․ 단일(單一)한 신의 미를 반영 ․ 상징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다. 영혼의 가장 훌륭한 부분인 이성은 전체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성에 가장 상응하는 감각 ― 시각 ․ 청각 ― 을 통하여 자신과 동질적인 것으로서의 비감성적인 미를 탐구한다. 이때 아름다운 대상과 주체의 이성은 서로 적합한 것으로서 보이지 않는 일치감을 갖고 있다. 이미 플라톤은 미와 사랑의 상관관계에 대해 언급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위에서 말한 주객일치에서 기독교적 사랑을 보았으며 미를 여기에 연관시켰다. 이리하여 미는 윤리적인 것과 긴밀하게 결합되고 상호 보완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영혼이 사랑하는 것은 결국 상징으로서의 감각적인 미가 아니라, 그 깊은 곳에 있는 신의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미학사상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비록 신학적 동기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악(惡)과 추*(醜)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추는 그 자체로서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지 않지만, 전체 속에서 대비됨으로써 미를 한층 복잡 ․ 풍부한 것으로 만드는 한 요소로서 중시되고 있다. 이로써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대립시켰던 마니교의 이원론이 극복되고, 동시에 고대의 단순명쾌한 미의 관념이 한층 심화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예술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찰은 단편적으로 여기저기서 발견될 뿐이지만, 그 속에서 시 ․ 음악 ․ 연극 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찾아 볼 수 있다. 그에게서도 역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인데, 그것은 정신성으로 가득찬 이성적인 모방이다. 예술미*는 “예술가의 영혼을 거쳐 기능적인 손으로 이전된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영혼 위에 존재하는,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밤낮없이 탄식하며 추구하는 미 그 자체“로 귀착된다.
어쨌든 아우구스티누스의 미학사상은 고대의 미학사상을 한층 심화시킨 것으로, 특히 후기에는 금욕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9세기에 에리우게나를 통하여 중세에 전해졌던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Dionysius Areopagita, 5 세기말)의 사상과 함께 모든 중세 사상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보에티우스(A.M. T.S. Boethius, 480~524)는 고전 고대사상의 최후의 순수한 계승자이다. 그는 철학을 지고의 것으로 삼으면서도, 한편으로는『음악교정』(De institutione musica) 등의 책도 남기고 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피타고라스 ― 플라톤적 원리에 따라 미를 논하였지만, 대체로 아우구스티누스보다도 수학적 ․ 과학적 ․ 실증적 경향이 강하며, 미의 원리인 수의 개념을 순전히 형식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그는 미의 특성 중 하나로 빛남(光輝)을 들고, 빛을 발하는 조화적 심포니의 미를 옹호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미는 직관적 의식에 의해 쾌적함을 제공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미는 일시적이고 그 깊은 곳에서 보이는 본질적인 선(善 )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다. 참된 것은 자기의 영혼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변하기 쉬운 미로부터 영원한 미로 향한다. 그런데 뮤즈는 참으로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켜 참된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으로는 간주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예술론은 피타로하스적인 수와 비례 ․ 조화 등의 원리에 근거한 우주론적 음악론에 특징이 있다. 대체로 보에티우스의 미학은 철학 중심이며, 기독교적 색채는 거의 없다.
카씨오도루스(F.M.A.Cassiodorus,487(?)~583(?))는 보에티우스와 함께 6 세기의 탁월한 저술가로서, 주로 교육적 관점에서 그때까지의 사상을 집대성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미학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에티우스의 미학을 계승한 데 지나지 않아 독창성은 없지만, 현저하게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보에티우스가 피타고라스적 수의 원리에 대한 객관적 구조연구에 중점을 두었던 것과는 반대로, 그는 미의 심리적 ․ 감정적 효과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고찰하였고, 특히 음악심리학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그는 광범위한 예술 영역 전반에 관하여 그 존재의의를 설명하였다. 이시도르(Isidor da seville, 560(?)~636)는 보에티우스나 카씨오도루스와 마찬가지로 고대사상을 계승하여 이것을 게르만 세계에 전파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선인들의 미학 사상 영역에 머물렀고 독창성을 가지지 못했지만, 일종의 백과사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어원론』(語源論, Etymologiae) 20 권이 보여주듯이, 다분히 주관적인 어원학적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미의 본질을 해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완전한 미(decentia, decus, decor)와 실증적인 미(pulchritudo)를 구별하면서 분석적 고찰을 시도하였다. 예술에 대해서도 그 기원을 분석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예술을 실천적 인식으로 규정하고 순수인식으로서의 학문과 구별한다. 또한 진리와 형식미의 통일을 이상적인 것으로 삼지만, 이 통일이 깨어질 때는 형식보다 정신적 내용을 중요시한다. 따라서 그의 미학은 종교적 ․ 상징주의적 경향이 강하다.

2) 스콜라철학의 미학사상 (8 세기 ~ 14 세기)

(1) 카롤링어왕조 르네상스 (8 세기~10 세기)
스콜라철학의 기원은 로마제국 몰락 이후 혼란한 상태에 있던 유럽 여러나라의 기독교화와 카롤링어왕조의 카알대제에 의한 통일에서 출발하였고, 카알대제가 취한 문예부흥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선 이 시대에는 각지에 여러 학원이 창설되고, 철학과 음악 그리고 문법학 ․ 수사학을 중심으로 문예론 등에 대한 연구가 왕성히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 예술사의 측면에서 볼 때 유태인과 아라비아와의 교류 결과로 동방에서 발생한 이코노클라즘(우상파괴)의 격렬한 운동은 비잔틴 예술가의 서구유출을 초래하였고, 그리하여 고전고대문화로의 복귀를 시도하는 화려한 카롤링어 르네상스 예술이 개화하였다. 이 예술의 이론적 ․ 실천적 활동에는 그 주류를 이루는 두 가지의 미적 이념이 뒤엉켜 있다. 하나는 지방적 특색을 가지며 장식성(裝飾性)과 공상성(空想性)이 풍부한 게르만적 이념이고, 또 하나는 단순 명쾌하고 인간적인 고전적 ․ 비잔틴적 이념이다. 점차 게르만 문화와 융합해 간 고대찬미의 인문주의는 각 예술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문예상으로 고전작품의 사본 ․ 주해 ․ 모방이 많이 나타났고, 또한 건축에서는 고전고대 양식의 도입과 함께 비트루비우스*풍의 건축이론이 융성했다. 회화 ․ 음악에도 똑같은 미적 휴머니즘이 확실하게 흡수되었다. 이러한 사정 하에서, 미학사상에 대한 논쟁은 미의 본질론 보다는 오히려 예술이론 또는 기술론의 측면에서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미학사에서 주목되는 사람은 문법학 ․ 수사학의 전통이 깊은 영국 요오크 학원 출신의 알퀸(Alcuins Flacus Alcuin, 735~804)이다. 그는 문예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에 주력하였고, 특히 고대의 문예론을 중세에 전했다. 그러나 미학사적으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를 계승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가시적 사물은 신의 무한한 미의 현현으로서 아름다운 것이고, 또한 각각의 고유한 원리에 근거하는 예술도 신과의 관계에 의해서 아름다운 대상으로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신의 무한한 완전성인 미를 정관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최고 목적으로 간주했다. 대체로 알퀸은 철학 ․ 수사학 ․ 음악 등의 교육에 관심을 두었으며. 이 측면에서의 업적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그의 제자인 라바누스 마우루스(hrabanus Maurus, 780(?)~856)는 박식하기로 유명한데, 그는 미와 예술을 성서적 ․ 초자연적으로 비유 설명했다. 그러나 특히 중세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남긴 것으로는, 아일랜드 출신의 신비주의사상가 에리우게나(Johannes Scotus Eriugena, 810~77)의 독창적 사상이다. 그는 최후의 신플라톤주의자인 동시에 스콜라철학의 최초의 탁월한 철학자이다, 특히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를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며, 그 속에 침투되어 있는 신플라톤학파의 신비주의와 유출설에 근거한 우주관은 그 이후의 스콜라철학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특히『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Dionysius Areopagita) 중에서도 『신명론』(神名論, De divini nominibus)이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에리우게나는 주저인 『자연의 구분』(De divisione naturae, 876)과『예정론』(De divina pradestinatione, 851)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미학에 입각하고 있으며,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에서 신플라톤학파의 사상을 섭취하여, 만물은 일자(一者)로부터 유출된 것으로서 모두 영적인 것, 이성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상징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가시적인 미를,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감각적으로 파악된 거짓된 미와 이성에 의해 파악된 참된 미로 구분한다. 참된 미는 신의 영원한 ‘말씀’(Verbum)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리우게나의 미학사상은 독자적인 신비적 ․ 상징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는 해도, 미적 원리에 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벗어나지 못할 뿐 아니라, 추(醜)의 해석에 관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생기가 없다. 추(醜)는 단지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 정도로만 생각되어 최고의 선이자 미인 신의 소산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다만 에리우게나가 가시적인 미의 상징성을 주장하면서, 당시 이코노클라즘에 의해 배척된 성상(聖像)의 상징적 의의를 인정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예술에서는 다소간 음악부문에 대해 논급하고 당시의 다성악(多聲樂)의 발전에 대응하여 화성론에 대한 뛰어난 고찰을 남기고 있다. 그에 의해서 전해졌던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의 신플라톤주의에 근거하는 신비적 상징주의와, 그리고 이에 수반된 금욕주의적 사상은 중세미학의 결정적인 한 요소가 되었다.

(2) 11․12 세기
일반적으로 이 시대는 로마네스크 인문주의 시대로 특징 지워진다. 10 세기 무렵에는 여러 학원의 활동도 점차 침체상태에 빠지고, 다만 프랑스의 끌뤼니수도원의 개혁운동만이 놀랄만한 활약을 전개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술사적으로 볼 때 11․12세기는 지방색이 풍부하고 독특한 로마네스크* 미술이 탄생하여 각지로 다채롭게 확산되었던 시기이다. 이에 따라 문체론과 시학 등이 관심을 끌게 되었고,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음악론이 절정에 달했다. 건축 ․ 회화 ․ 조각의 영역에서 수도원들이 보여준 이론적 공헌과 지도적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이리하여 각 분야에서 논쟁이 한층 더 왕성해지면서 샤르토르학파와 빅토르학파가 그 중심이 되었다. 대체로 12 세기에는 신비주의적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지배적이었고, 13 세기의 보나벤투라의 출현을 준비하는 정신적인 고양이 보인다.
샤르토르학파는 12 세기 전반부에 종교적 인문주의를 표방하면서 서구의 지적 ․ 문화적 중심을 형성했다. 이 학파의 사상은 플라톤의『티마에오스』에서 많은 시사를 받았고, 포레(Gilbert de la poree, 1070~1154(?)), 티에리(thierry de chartres, ? ~1150), 기욤 드 꽁쉬(Guilaume de conche, 1080(?)~1154(?)) 등의 학자와 시인이 속출했다. 그들은 플라톤적인 미의 이념을 계승하고, 또한 수(數)를 미의 원리로 하였으며. 동시에 ‘부’(父)의 단일성(unitas), '자‘(子)의 동등성(aequalitas) 및 ’성령‘의 조화(aequalitatis unitatique concordia)를 논하는 3위1체론 속에서, 예술론적 특성을 지닌 미학을 전개했다. 빅토르학파에서는 에리우게나 이래 최대의 사상가라고 일컬어지는 위고(Hugo, Hugues de Sain-Victor, 1096 ~1141)가 포괄적 정신으로 아우구스티누스 및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의 뒤를 잇는 뛰어난 신비사상을 보여 주었다. 그는 감각적 ․ 가시적인 미를 모든 불가시적(不可視的 )존재의 상징으로서만 평가하고 있다. 그의『학습론』(Didascalicon)은 암시적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데, 특히 인간의 내적 체험에 우위를 부여하며, 따라서 미의 상징론에서는 주체의 측면에 중점을 둔다, 거기서는 미에 대하여 감각과 정신 그 어느 쪽에도 편중되지 않은 제 3의 능력으로서 상상력*(affectis imaginaria)이 정립된다. 이 능력은 인간의 인식능력 중에 관조(contemplatio) 에 속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하는 미적 체험은 관조적인 것으로 특정지어진다, 또한 위고가 그의 상징주의 입장으로부터 추(醜)의 상징성을 인정하고 그리하여 역동적인 추의 미학을 제창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기독교적 신플라톤주의에 속하는 것으로 사실상 근대 낭만주의의 형이상학적 아이러니*(irony)의 전조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또한 위고는 미의 범주론에서도 독창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3) 13 세기(스콜라철학의 전성기)
13 세기에 스콜라철학이 현저하게 발전한 것은, 12 세기에 이루어졌던 대학의 창립과, 아라비아를 경유하여 유럽에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덕분이었다 그것은 이 시기가 아라비아와 유태 철학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시기이며, 이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 ․ 주해되어 유럽의 사상계를 석권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유행하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위험한 풍조로 취급되다가, 이후 정통신앙과 화합과정을 겪으면서 마침내 성 토마스에 의해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 형이상학 ․ 윤리학은 종래의 기독교적 상징주의의 자연관에,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이성적이며 광대한 자연관을 부가하면서 다방면에 걸쳐 기독교사상을 한층 심화시켰다. 13 세기에 고딕* 건축이 성당 내에 신비적인 빛을 즐겨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미학은 빛의 미학이라는 측면에서 중요성을 띠어 갔다. 그것은 기독교적 일원론에 의해서 정신과 물질, 빛과 암흑, 선과 악, 미와 추의 반영이며, 빛 그 자체에 대한 신비적인 사상의 출현이기도 하다. 미는 신의 빛이 빚어낸 영상(image)으로 되고, 빛의 신앙은 고딕예술 전반에서 볼 수 있는 신비적인 빛의 찬미로 구체화되었다. 종래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에서 보인 미학전통은 거기에 새로운 요소가 가미됨으로써 한층 고도로 발전 ․ 집대성되었다. 이리하여 이 시기의 미학도 완전히 신학의 기초 위에서 종교적 색채를 한층 강하게 띠었다. 이 시기에 새로운 두 개의 수도회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크회 ―가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기욤 드베르뉴(guillaume d'Auvergne, 1180(?)~1249)는 보나벤투라의 스승이라고 알려졌. 그는 『선악론』(De bono et malo)에서 미를 도덕과 관계지우고, 대체로 주정주의(主情主義)적 미학을 주장했다. 거기에서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니코마코스 윤리학』등을 통하여 흡수되어 있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에 비해서는 훨씬 못 미치지만 적지 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알렉산더(Alexander Halesius, 1170(?)~1245)는 프란치스코회 창립자의 한 사람이며, 보나벤투라의 직계 스승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그에게 전해주는 데 이바지했다. 동시에 알렉산더는 주저인『신학대전』(Summa universae theolo giae)에서 ―후에 토마스아퀴나스에 의해 집대성된 ―사상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미학은 이전의 기욤의 경향과는 반대로, 전체적으로 주지주의(主知主義)적 성격을 띠며, 아우구스티누스의 미의 객관적 정의를 수용한 반면에, 미적 체험에 관해서는 형이상학적 ․ 주관주의적 고찰을 행하고 있다. 그는 선과 미를 주체와의 관계에서 구별한다. 또한 『우주의 미에 대하여』(De pulchritudine universi)라는 제목의 논문은 미의 위계(hierach y), 추(醜)의 문제, 정신미와 물질미, 빛으로서의 미의 특성 등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의 예술론은 전통적인 모방론이지만, 예술과 과학의 구별, 예술성과 유용성의 문제 등을 취급하고 있다. 그는 보나벤투라에 의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완성을 준비했다는 데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그로스테스트(Robert Grosseteste, 1175(?)~1253)는 당시 옥스퍼드대학에서 간신히 명맥을 보존하고 있던 샤르토르학파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독자적 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그 시대의 풍조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아라비아의 과학 등과 접촉함으로써, 우주론에서 차지하고 있는 빛의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고 빛의 형이상학을 체계화했는데, 더욱 본질적인 점은 기하학을 원리로 하는 질료관념에 근거하여 경험적 ․ 실증적 ․ 수학적 태도를 취했다는 데 있다. 그의 미학사상은『신명론』(神明論)의 주석과『헥세메론』(Hexaem eron)의 주석 등에서 발견된다. 전자에서 미는 빛으로서의 성격을 인정받기는 하지만, 대체로 수적 관계의 동일성에 의해 규정된다. 후자에서는 거꾸로 미는 빛의 동질성 및 단순성을 가지고 논의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이율배반은 수적 정의(數的定義)에 의해 지양된다. 그로스테스트의 과학적 정신은 미의 심리학과 예술론에도 반영되어, 전체적으로 볼 때 르네상스 정신과의 현저한 근사성을 보여준다.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193(?)~1280)는 도미니크회 소속이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그는 철학 ․ 신학 ․ 자연과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고, 아우구스티누스와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에 근거한 신플라톤주의의 기독교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다수의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서를 통해, 토마스 아퀴나스로 하여금 양자의 결정적 종합을 가능케 할 만큼의 충분한 재료를 제공했다. 그는 일찍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정통적 기독교신학에서도 가치있는 것임을 간파했다. 그의 미학사상을 살펴보면, 초기의『선론』(善論. Summa de bono)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아래 독창적인 변증법을 가지고 진 ․ 선 ․ 미 개념을 다루었고, 도덕미에 중점을 두면서 일종의 존재론적 미학을 피력하고 있다. 후에『신명론』주석에서는 디오니시우스 이레오파기타의 영향하에서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며, 그 일부라고도 말해지는 『선과 미의 소론』(Opusculum de bono et pulchro)은 13 세기 미에 관한 형이상학적 이론 전개에서 결정적인 의의를 갖고 있다. 여기서 미는 수적 균제(조화) 원리와 빛의 원리에 관계되지만, 그로스테스트와는 반대로 빛의 원리를 중심으로 한다. 또한 미적 체험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도 행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알베르투스의 미학은 초월적 ․ 형이상학적이다.
보나벤투라(Bonaventura, 본명 Giovanni di fidenza, 1221~74)는 파리대학의 신학교수이며 프란치스코회 총장이기도 했다. 한편에서 토마스가 시대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토대로 스콜라철학을 완성했을 즈음, 보나멘투라는 아우구스티누스 및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의 전통적인 신비주의 사상을 한층 정교하게 다듬어서 완성했다. 토마스가 근본적으로 이성의 입장에서 신앙과 이성이 조화를 시도한 반면에 그는 이성보다도 신앙과 계시에, 또한 철학보다도 신학에 중심을 두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의 모든 측면에는 기독교의 신앙과 사랑이 주도적 원리로 깔려 있다. 주저인『영혼의 신으로의 여정』(Itin erarium mentis ad deum)은 삼위일체의 상징으로서 만물을 통하여 신을 추구하면서, 마침내 자기의 영혼 속에서 신을 직관하는 데 이르는 과정을 논한 책이다. 이에 따르면 우주 그 자체는 신에 이르는 사닥다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신은 최상위에 있고 또한 최고의 통일, 최고의 신, 최고의 진(眞)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단순하고 동일하며 가장 아름답다. 우주는 우리를 삼위일체라는 최고의 미로 인도하는 미의 사닥다리이다.―이렇게 그의 주장에는 미학적 색체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밖에 앙키네(P. Henquinet, Les eˊtudes frainciscaines)에 의해 1832년에 발견된 후, 보나벤투라의 저작으로 인정된 짧은 논문은 특히 자연미에 관한 고찰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미학에 관한 논문으로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대체로 그의 미학사상은 스승인 알렉산더를 통해 받아들인 아우구스티누스의미론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특히 그의 미학의 중추부분은 『음악론』제 6권에서 유래하는 바가 크다. 거기서는 모든 미가 신의 현현으로 간주되며, ‘일’(一) ․ ‘진’ 및 ‘선’과 함께 존재의 4조건의 하나로 인정된다.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신은 지고의 미이며, 모든 존재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형상 또는 형식(forma)으로 인해 영혼에 쾌감을 주는 아름다운(formosa)것이 된다. 게다가 동력인에 근거하는 ‘일’(一 ), 형상인에 근거하는 진(眞), 목적인에 근거하는 선(善 )에 대하여 제 4의 초월로서의 ‘미’는 이들 원인을 포함하는 것(circuit omnem causam)이 된다. 즉, 그 모든 원인이 작용하여 형성된 존재로부터 발휘되는 빛 ―신의 광채와 유사 ―은 아름다운 것이다. 제1원리로서의 신은 자기 자신을 표출하기 위하여 모든 존재를 창조했다. 때문에 전 우주는 창조주로서의 3위 1체가 해독될 수 있는 책과 같은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미의 근본 원리로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수적(數的) 동등’(aequalitas num erosa)을 중심에 놓는다. 그는 이것을 중심축으로 하여 미의 대상적 측면 뿐 아니라, 주체와의 관계도 해명한다. 상징적인 수적 동등에 의해 규정된 아름다운 대상과 주체 간에는 유사한 관계가 존재하며, 거기서 생겨나는 미적 쾌감이 규명된다. 이 쾌감 또는 기쁨은 주체의 대상에 대한 사랑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대상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다시 말해 그것이 신의 모습과 비슷하면 할수록 주체의 사랑은 늘어나고, 최고의 미는 최상의 기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최상의 사랑을 추구하여 최고의 미로 향하여 나아간다. 세계는 한편의 시이다. 보나벤투라는 신의 현현인 자연미 중에서 인간의 미를 보다 높은 것으로 간주하며, 나아가 신과 인간의 일치인 그리스도의 미를 최상의 것으로 삼는다. 정신적인 미는 감각적인 미를 초월하고, 천상의 미는 지상의 미를 초월하여 존재한다고 한다. 또한 빛으로서의 신의 미를 논하는 디오니소스적 신비주의의 요소가 그의 체계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그가 예술에 관한 구체적인 고찰을 많이 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는 작품에서의 주관의 표현 등에 관하여 일종의 감정이입*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넓은 의미의 모방설을 전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예술적 창조는 신과 자연의 창조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우주가 지극히 아름다운 신을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형상과 거기에 표현된 것과의 일치 위에서 (불완전하나마)어떤 영속적인 질서를 갖는 미를 만들어 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보나벤투라의 미학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의 상징주의적 ․ 신비주의적 미학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훌륭한 체계는 종종 파리의 노트르담사원의 아름다움 속에 드러나 있다고 까지도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는 도미니크회에 속하며, 보나벤투라와 나란히 파리대학의 교수이고, 스콜라철학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가장 탁월한 사상가이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박식함을 가지고, 아우구스티누스 이래의 전통적 기독교사상과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의 신비사상, 그리고 당시 부흥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융합통일이라는 13 세기 최대의 과제를, 그의 주저『신학대전』(Summa theologica, 1266~67)에서 완결지었다. 그는 이성과 신앙을 명확히 구분하여 이성을 중시하면서도, 진리에 있어서 양자는 반드시 조화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미학사상은, 초기의 저작에서는 스승인 알베르투스의 아우구스티누스적 ․ 디오니소스적 객관주의를 그대로 답습하여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긴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보다는 한층 간결하고 정확하게 논의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알렉산더의『신학대전』을 발전시킨 그의『신학대전』에서는 결정적인 진보의 흔적이 보인다. 여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주의적 인식론 및 심리학 등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보다 높은 관점에서 투철한 논리를 통한 체계화가 두드러지게 진행되었다. 이것은 그의 미학사상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 탁월한 사상체계는 많든 적든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속에 포함되어 있던 개념과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는 미를 그 본질상 진과 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초월적 속성이라고 말하면서,『신학대전』에서는 “미란 보아서 즐거운 것이다.”(Quod visum placet)라는 유명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 정의는, 미가 대상의 단순한 속성으로서만 파악되는 것은 불충분하며, 항상 주체의 유쾌한 감정과 연관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이것에 따라 미의 본질이 한층 특징적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를 이와는 반대로 미의 주관적 조건에 대한 일면적 강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 ․ 객 양면의 불가분한 통일 위에서 미에 대한 본질적 인식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확실히 ‘본다’고 하는 것은 단지 단순한 시각작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해석되어야 하고, 이성에 가장 가까운 감각이라 할 시각 ․ 청각에 의해 대표되는 직관적 인식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관작용에 의해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주체에 유쾌한 감정이 생겨나는 것은 주체와 대상 간의 유사 또는 일치에 기인한다. 또한 그 미적 쾌감은 사랑과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는 미가 사랑에 근거한 일종의 쾌감을 동반하는 직관적 인식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미와 진 및 선의 상호연관을 주 ․ 객 양면에 걸쳐서 상세히 검토하고 있다. 그 결과 심리적 측면에서는 미적 체험의 무관심성*이라는 특징에 도달하고, 다른 한편 미 자체의 대상으로서의 존재성격이라는 측면에서는 지성과 유사성을 갖는 미의 존재론적 조건으로서의 ① 완벽성, 혹은 완전성(integritas sive perfectio), ② 그에 상응하는 비례, 혹은 조화(debita proportio sive consonantia), ③ 명료성(claritas)에 도달한다. 여기서①과②는 이미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다양한 개념을 통해 다루어졌던 미의 근본 규정이다. 그런데 ③은 당시의 일반적 풍조에 따르는 것이면서도, 한편으로 ①과 ②의 조건에 기초하는 미를 한층 이성적인 빛으로 만들고 대상과 인간정신 사이의 친화력을 높이는 것으로서 중요시된다. 위에서 말한 주관적 및 객관적 규정에 따라 토마스는 종래보다 명확한 미의 본질론을 정립했다. 나아가 이 본질론은 신학과 관계됨으로써 세계관적 토대를 지니는 것으로 고양되었다. 토마스의 신학적 이론에 의하면, 모든 존재가 신에 관계하고 있듯이 형식을 통해 빛을 발하는 모든 미는 최고의 미, 즉 신의 미의 반영이며, 3위1체의 제 2위격인 ‘자’(filius)에 해당되고, 신의 '말씀'(verbum)으로서 지적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미는 물질적인 미로부터 신의 미에 이르는 미의 위계질서를 형성한다. 이 미의 위계질서에서 감각적 ․ 물질적인 미의 상위에 있는 정신적인 미에 관하여, 토마스는 인간영혼의 미를 논하고, 덕(德)의 미는 이성에 한층 어울리는 미이자 영혼이 지닌 최고의 미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미적 쾌감을 동반하는 사랑은 이 미의 위계질서에서 최고의 궁극적인 미인 신의 은총의 빛을 갈망한다.
토마스의 예술론은, 중세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예술을 광기의 기법으로 이해하고.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모방설을 핵심으로 한다. 거기에 따르면, 예술은 신의 예지에 의해 창조된 질서정연한 자연을 인식함으로써 성립되는 일종의 모방이다, 때문에 예술 속에는 자연의 질서가 반영되어 있다. 분명히 예술은 자연에서 그의 목적과 표현수단 ․ 방법을 빌어온다. 그러나 예술은 자연과 유사한 관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즉, 자연은 내적 원리인 데 비하여 예술은 외적 원리이다. 그리고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정신활동인 예술적 활동은, 자연에 비해 우연적이고 불완전한 것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신의 창조보다 저급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학적인 인식활동 및 도덕적 ․ 실천적 활동과 함께 인간 정신활동의 하나로서, 독자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며, 외적인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이성적 행위라고 특정지어진다. 이러한 규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하에서 직접적 경험에 근거한 인식에 관한 연구에서 도출된 것이며, 예술을 인간의 정신활동에 의해 제작 가능한 상태 (habitus)로서, 즉 어떤 목적을 구체화하는 기술적 ․ 이성적 능력으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예술의 창조적 활동을 그 고유의 영역 내에서 뿐만 아니라 학문과 도덕, 인식능력과 의지능력의 관계에서 분석 ․ 해명하려 하고 있다는 것은 토마스 예술론의 주목할 만한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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