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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사상의 태동 ] ()

기원전 3 세기까지는 그리스인은 건축과 조각, 시와 연극 등의 표현형식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미의식의 가장 단적인 측면을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예술창조활동이 점차 쇠퇴해 가던 고전시대 말기에 이를 때까지도 그들의 미의식에 대한 반성적 고찰은 행해지지 않았다. 예술을 논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순수하게 미적인 견지에서 다루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B.C. 4 세기 이후에 전개될 미론(美論) ․ 예술론의 여러 가지 문제가 이미 맹아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1) 호메로스(B.C, 9 세기경 )가 쓰고 있는 ‘아름다운’( )이라고 하는 형용사는 주로 감각적 ․ 구체적 대상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감에 대한 자각이 아직 미약했기 때문에, 자연미보다는 오히려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상(事象)의 아름다움이 주된 관심의 대상이었다. 또한 호메로스의 용기와 명예심에 대한 존중은, 나중에 미적 개념으로 발전하는 숭고* ․ 크기* 등과 같은 내면적 의식의 맹아이다. B.C, 7 세기로 넘어가면서 미의식은 점차 분화하여 다양성을 띠어 간다. 서정 시인들은 우미(優美) ․ 가련 등의 미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이것을 무상(無常)한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미를 감정적 ․ 정서적으로 파악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B.C. 5 세기경 아테네에서 활약했던 3 대 비극시인 — 아이스퀼로스(525~456 B.C.), 소포클레스(496(?)~406 B.C.), 유리피데스(485(?)~406 B.C.) —에 이르면, 정신적 ․ 내면적 미에 대한 자각은 눈에 띠게 발견된다. 예를 들면 소포클레스가 안티고네와 엘렉트라로 하여금 “아름답게 죽으련다”라고 말하게 한 것은, 미의식에 윤리적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이리하여 미와 선은 점차 분리하기 어려운 관념으로 변해 간다.
또한 미와 사랑(愛)을 결부시키는 사상은 플라톤* 이후의 미학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데, 이 사상은 이미 헤시오도스(B.C. 8 세기경)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술가로서 최초로 미를 반성적으로 고찰한 사람은 포루클레이토스(B.C. 5 세기 후반)이다. 그는 실전된 저작인『규범』에서, 인체 각 부분의 조화를 논했으며, 또한 여러 신(神)들이 각기 갖고 있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고찰했다고 전해진다. 이로 보아 그가 미를 유형적으로 이상화하여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술에 있어서는 시모니데스(556~468(?)B.C.)가 시와 회화를, 핀다로스(522/518~440 (?) B.C)가 시와 무용을 가각 비유적으로 비교했다고 전해지며,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450(?)~385(?)B.C.)가『개구리』에서 아이스퀼로스와 유리피데스를 비교한 것은 구체적인 문예비평의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원형이다.
2) 자연철학자들은 미의 형식적 개념을 형성하는 데 기초적인 공헌을 했다. 6 세기 후반 피타고라스(582(?)~500 B.C.)학파는 우주의 형식적 질서와 그 완전성을 추구하여 거기에 합치하는 영혼의 독자적인 원리를 수립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주의 형식적 완전성을 조화* 라고 이름 짓고, 거기서 모든 대립의 수적인 균제 ․ 질서 ․ 통일을 찾아내려고 함으로써 미와 예술의 객관적 ․ 이론적 척도의 원리를 수립하였다. 또한 그들은 음악의 형식에서 신적인 조화를 인정함과 동시에, 심리적 효과로서, 영혼이 음악을 통하여 우주의 조화 ․ 질서를 모방*하고 그리하여 ‘정화’된다고 하는 점을 중시했다.
헤라클레이토스(B.C. 500 년경)나 엠페도클레스(B.C. 5 세기 중엽)도 미를 조화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대립과 통일의 작용 그 자체를 중시했다. 따라서 조화란 미의 형식이 아니라 미를 성립시키는 근거이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내면적 조화를 신(神)의 절대미라고 생각하여 이러한 미를 선 ․ 정의와 동렬에 놓았다. 엠페도클레스에 의하면 질서는 아름답고 완전한 것이지만, 혼란은 불완전하고 추한 것이다.
데모크리토스(460(?)~360 B.C.)는 아름다운 것은 신적인 지성에 근거하여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오늘날 우리가 알기로는— 예술을 논했던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시는 기술의 산물이 아니라, 광기와 영감의 산물이다.
3) B.C. 5 세기경에는 프로타고라스(481~411 B.C.)와 고르기아스(485(?)~375(?) B.C.) 로 대표되는 소피스트들이 주관적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전통적 종교와 자연철학에 대해 새로운 해석과 비판을 가했다. 그들의 인간학적 ․ 인식론적 관심을 나타내는 가장 특징적인 것은 변론 ․ 수사에 대한 기술*의 추구이다. 그것은 모든 지식이야말로 기술로서만 파악되고 전달될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본래는 실용적 공작술을 의미하는 기술의 개념을 소피스트가 모든 방법적 ․ 체계적인 지적 활동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고양시킴으로써, 비로소 예술을 철학 및 과학과 비교할 수 있고 또 예술형식 상호간의 관계를 논할 수 있는 이론적인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창작기술의 측면에서 예술의 개념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4) 소크라테스(469~399 B.C,)는 소피스트들의 문제를 보다 철저히 추구하여 그들의 회의주의적 한계를 덕(德)의 원리로써 극복하려 했다. 그리하여 이성적 ․ 자각적 방법에 근거하는 학(學)적 인식을 강조했다. 그가 예술에서도 단순한 감각적 모방 이상으로 구성적 이상화(理想化)와 정신활동의 표현을 요구했다고 하는 것은 크세노폰(426(?)~354 B.C.)이 『각서』에서 전하고 있는 바이다. 소크라테스가 유용한 것, 목적에 맞는 것은 선하고 아름답다고 한 것은 소피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미에 실용적 성격과 윤리적 목적을 부가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사물과 그 주변과의 적합 ․ 조화라는 관념에도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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