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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베토 아르기고] ((Cervetto Arrigo; 1927-1995))

이탈리아 혁명가, 로타 공산당 건립자 중 한사람. A. 체베토는 한 이탈리아 이주자의 아들로서 1927년 4월 16일에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에서 태어났다. 1943년 8월 12월에 파시즘의 정치 군사적 위기이후에 사보나(Savona)의 일바 공장(IIva factory)에서 젊은 노동자로서 체베토는 나찌 파시즘에 대항한 시민전쟁에 참여하여 "Croce al Merito"를 디저브하였다. 5년 후에, 이러한 부분적인 경험 후 그의 스탈린주의의 거부와 톨기아티의 '스볼타 디 살로노(살로노 회전)'의 거부를 통해, 즉 "무정부주의적 허무성"에 대항한 투쟁을 통해 체베토는 맑스를 철저하게 연구하였다. 1950년대 3월에 체베토는 그의 첫 번째 의회에 참여하여 FAI를 다시 조직하는 목적을 가지고 무정부주의 그룹에 의한 제노아 폰테디시모(Genoa-Pontedecimo)에서 조직화된 첫 번째 의회에 참여하였다. FAI는 순전히 "무정부 조직"이 아니었다. 실제적으로 다른 반 스탈린주의 파와 또한 (체베토가 속하였던)레닌주의 파를 모이게 하였다.

정치적이고 이론적인 투쟁의 오래된 시기가 이 시점에서 체베토를 위해 시도되었다. 처음에 밀란 리베트태리오 2세(Libertario; 자유주의자)와 같은 신문에 대한 기의 기고에 의해 옮겨졌다. 거기에서 1950년 5월에서 1951년 5월까지 체베토의 21개의 기사들이 게제되었고 '냉전'과 '재식민지화'의 주제와 함께 다루어지면서 후에 "리임페리얼스모 우니리오(단일한 제국주의)"와 L'lmpulso(임펄스;1950-57)라는 책으로 편집되었다.

체베토의 정치와 경제의 연합 활동은 결코 '이탈리아 노동자당의 건설을 위한 필연적인 전제조건'을 소 이론적인 동질성 원리에 의해 연합된 혁명 노동자들의 핵심을 전개시키는 노력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1950년대와 1951년에 밀접한 재인식적인 활동이 발생하였다. 거기에서 체베토의 주요 기여는 이론적인 투쟁과 연관이 있었다. FAI의 허무주의적인 계획은 1951년 2월 28일과 29일에 개최되었었던 제노아 폰테데시모(Genoa Pontedecimo) 민족 회의에서 GAAP(프롤레타리아적 행위의 무정부주의적 그룹)기초를 마련하였다.

원리와 조직에 관한 최상의 동질성에 도달하려는 목적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그룹은 두개의 다른 이론적인 개념과 두개의 다른 전통을 공유하였다. 스플리트에 연결되어 맑스 레닌주의 전통과 아르기고 체베토에 의해 재현된 그리고 무정부주의적 전통은 피어 칼로 매시니에 의해 재현되었다. 여기에 만남에 의해 승인된 테제에 대한 그의 기여를 알 수 있는 단락이 있다. "선택해야할 노동 계급을 위해 정도와 본성상 다른 두 종류의 제국주의는 없다. 제국주의는 계급과 국가로 나누어진 사회의 단일한 선언으로 존재한다.:그러므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유일한 선택은 제국주의를 지지하는지 혹은 반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지이다.

분할할 수 없는 제국주의는 체베토의 분석의 중심 테마가 되었다. 즉 그의 논문 제목의 인용하기에 충분한다. : “제국주의는 분할할 수 없다. USSR(소련)은 USA(미국)에 의해 조건화된다.” “개인적인 제국주의, 한국의 사실상의 침략자” 등등이 있다.
이러한 분석에서 제국주의의 비분할성은 주변적 위기의 형태를 가정하면서 두 주요한 제국주의 힘의 내부적 모순 속에서 그 자체를 반영한다.

1953년 9월 세 번째 GAAP 회의에서 체베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인 행위를 위한 어떠한 공간도 남기지 않을 ‘거대한 기계 즉 아주 큰 압축기로서 제국주의를 고려하기’ 위해 어떤 혁명적 그룹의 경향성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무역연합 전법과 연결되어 있다. 체베토는 반혁명적인 문구를 어떠한 연합행위를 제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보디히즘(Bordighism)의 계승자들 즉 공산주의 좌파 그룹을 비판하였다. 그들이 무역연합을 “두 개의 블록” 에 의해 조절되고 완전하게 통합될 때 이후로부터 그들은 그들 안에 어떤 투쟁적인 회의체를 거부하는 것이 끝나 버렸다. 반대로 체베토는 비록 그가 자본주의적 순환에 의존한다는 것을 완전하게 깨달을지라도 그 당의 영원한 의무로서 무역 연합 안에 개입하는 것을 고려했다.

체베토는 프로메테오라는 저널의 새로운 연재물에 기고하였다. (1954, 1959, 1960). 그리고 아리조네 공산당에도 기고하였다.(1957-64) 그리고 그것은 PCI의 맑스주의 파에서부터 내어난 논문이었다. 아리조네 공산당의 이러한 기원 때문에 체베토는 맑시즘과 단순하고 비과학적인 반대 태도에 대해 어떠한 양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신문(아리조네 공산당)과 (우리의) 협력” 시기동안, 로타 공산당의 공동 건설자인 로렌조 파로디는 “두개의 다른 노선들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했다”라고 회상한다. 즉, PCI 반대자들에 의해 그리고 사회적 민주화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에 의한 노선과 레닌주의자들에 의한 노선들이 이었다. PCI 반대자들이나 사회적 민주화에 빠져있었던 노선의 원칙 없는 실용주의가 신문위기의 원인일 때, 우리의 그룹은 동일한 노선을 부여하기 위하여 신문 출판을 제노바로 이동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런 후에 ‘로타 공산당’에 당연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레인주의자 그룹의 집합적 조직자 기능을 예상하였다.

이러한 주제로 체베토는 전자의 노동계급당의 사회주의적인 민주적 전환에 대항하여 싸웠다. 1957년 11월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 당(PCI와 PSI)의 관료화는 노동자의 운동의 퇴화가 아니다. 이것은 명백히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인 의제를 통해 노동자의 운동 자체에 대하여 헤게모니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자본주의 헤게모니의 조직 형태와 경쟁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로타 공산당”의 건립을 이끌 하나의 과정으로서 혁명당을 세울 필연성이 생긴다.

혁명당은 다음과 같은 개관적인 조건들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것은 순수한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의지의 열매가 될 수 있다.” 뿌리박은 경제적 위기에 의해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억압당해서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운동을 표출하게 될 때 전개되는 이런 객관적인 조건들이 없다면, “개혁주의의 초 구조에 대항하는 혁명당의 투쟁은 매우 제한적이며 부분적인 결과만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반혁명상황에서 투쟁은 “어쩔 수 없이 핵심 간부들의 발견과 형성으로 환원될 수 밖에 없다.”

체베토는 “당은 그 자체로 조직의 일상적 일과 함께 발전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요구과 함께 발전한다. 그것은 자발성의 흐름에 의존할 수 없다”라고 썼다.
여기서 체베토를 위해 두 번째 시즌의 이론적인 학습을 시작하였다. 그가 다루는 주제는 아시아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접근자로서 10월 혁명의 역할에 대한 레인의 전략의 주제들이다. 이탈리아 마오이스트 이데올로기의 영향에 반대하여 싸우고 범 제국주의적인 투쟁에서 중국의 미래 역할, “민족인 것과 식민지적인 것”에 관한 코민테른의 정채 문제였다. 이러한 주체들에 관한 어떤 제목은 다음과 같다.
ㆍ“레닌과 중국 혁명”(기사 연재물이 1962년 아리조네 공산당에서 나타나서 후에 1966년에 로타 공산당에 의해 팜플렛으로 출간되었다.)
ㆍ“인도네시아 반혁명”(1966년에 “로타 공산당”에서 기사의 형태로 인쇄되었고 후에 1969년에 로마에 있는 에디지오니 로타 공산당에 의해 팜플렛으로 출판되었다.
ㆍ“통일 전선의 마오주의 이론” 은 1969년에 쓰여졌고 1972년에 팜플렛으로 출판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보르디가의 객관주의와 트로츠키의 주관주의에 의해 미해결된 채로 남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과학적인 기초로서 정치적 행위에 대한 레닌의 개념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1966년(맨 처음에는 1964년에 아리조네 공산당에서 일련의 기사로 출간되었다. ) 로마 에디지오니 로타 공산당에서 출간한 그의 책 “계급투쟁과 혁명정당“에서 조명되었다. 체베토는 보르디가를 알았고 연방 러시아와 관련된 “국가 자본주의”의 형식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종의 미국적 “초제국주의”에 관해 세계 2차 대전 이후에 보르디가에 의해 취해진 입장을 비판하였다. “보르디가의 사상에서는 명백하다” 그는 “La difficile questione dei tempi(어려운 시간문제)"를 썼고, “미국의 크기에 대한 비정상적인 과도 평가, 세계 6대 자본의 파괴(세계전쟁동안 이루어진)를 통하여 마치 “새로운 지배 영역 즉 내부 제국주의적 갈등들의 사실성을 동시적으로 소멸시킨 새로운 지배형식”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체베토의 비판은 ”참여의 대열에서 보르디가는 물러났다(휴식의 입장).”, “프로그램을 방어하는”것에 대한 정치적인 행위를 제한하고 따라서 이탈리아에서 실질적인 혁명당의 형성을 본의 아니게 방어 한다.

반혁명 시기의 지속과 때에 관해 체베토는 아시아의 문제를 돌이켜 생각했다. 인도와 중국의 산업화를 회상했고 즉 발전의 “내부 매개적” 단계에 도달하려는 이들 국가에 대한 필요한 시기였고 그들의 제국적인 성숙화와 자본적 전문가들을 이끈다.

이탈리아에서 레닌주의 당의 통합과 발전으로 인하여 체베토는 주요한 분석의 주제에 대한 유기적 편집을 쟁점화하기 위해서 50년 동안 이론적인 활동에 대한 길고도 체계적인 정리를 시작하였다.

『L'imperialismo unitario(단일화된 제국주의)』. 거기에서 제국주의적 발전의 30년 동안의 분석을 실어놓은 것 1950년부터 1980년에 까지 1981년에 출간되었다.

『II ciclo politico del capitalismo di Stato, 1950-1967(국가 자본주의의 정치적 순환, 1950-1967)』, 밀란, 1989. 스탈린이즘은 자본주의적 노출의 이러한 특수적인 형태의 지지자로서 고려되었다.

『La contesa mondiale(지구적 경쟁)』, 밀란, 1990. 1980년대의 제국주의적인 투쟁이 “처음의 자본 전쟁의 결론은 50년 동안 지속되었다”로서 이해되었다.: 동부접경지대에서 러시아는 독일이 획득할 때, 즉 서부접경지대에서 최종적인 결론이 여전히 공개될 때, 러시아는 잃어버렸다.

『La difficile questione dei tempi(어려운 시간 문제)』, 밀란, 1990. 는 스탈린, 트로츠키, 보르디가 사이에서 이루어진 혁명의 시기에 대한 논쟁에 있어 체베토가 개입한 것이다. :피할수 없는 결과를 예상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자본주의 경항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할 때 자본 성숙의 시기를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마찬가지로 혁명당과 같은 실질적 요인의 출현에 의해 결정된다.
『L'ineguale sviluppo politico, 1968-1979(평탄치 않은 정치적 발전, 1968-1979)』, 밀란, 1991: 1970년대 동안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한 분석과 정치 초 구조와 경제의 운동 간 깊은 불균형적 발전에 대한 분석.

마지막으로 70년대 중반에 시작한 정치학의 유물론적인 개념에 대한 그의 연구는 『L'involucro politico(정치적 껍질,1994)』에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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