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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노비에프 (1883-1936)] (Zinoviev, Gregory)

볼세비키 출신으로 1919년부터 1926년까지 코민테른 의장을 지냈다.
카메네프와 함께, 지노비에프는 10월 혁명의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의 반대는 당의 다수파에 의해 표결로 거부되었다. 이에 그들은 10월 18일, 멘세비키 신문(Novaya Zhizn)에 볼세비키의 반정부 투쟁 계획에 대해 응수해, 실패가 예정된 그들의 의견을 표현했다.
1923년 스탈린, 카메네프와 함께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으나, 이 후 1926-7년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에 반대하여 트로츠키와 함께 반대 블록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1927년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가 스탈린에 항복한 뒤 복당되었다. 1932년 다시 당에서 추방되었다가, 또 다시 복당되었으나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지노비에프는 1935년 모스크바 최고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1936년 처형되었다.
라돔이시스키가 실제 이름인 지노비에프는 1883년 (후에 지노비에프스크로 개명된) 엘리자벳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유대인 소부르주아 집안의 아들로서 그는 정규교육 대신 가정교육을 받았고, 15세 되던 해부터 교사로서 일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1900-1901년의 파업 투쟁에 활발히 참가했으며, 1901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1902년 그는 베를린과 파리로 건너갔으며, 그 후 Heme대학에서 잠시 공부했다. 1903년 초 스위스에 머무는 동안에는 레닌과 플레하노프를 만났으며, 그 해 8월에는 런던에서 열린 2차 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 참가했다. 그 무렵 볼세비키와 멘세비키의 분열이 발생했고, 지노비에프는 즉시 볼세비키를 지지했으며, 거기에 가입했다. 대회가 끝난 후, 그는 러시아로 돌아가서 당간부가 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해외로 나가야 했다.
1905년 그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 당의 상페테르스부르크 지부를 이끌었고, 신문 ‘프롤레타리’를 발행했다. 1906년 그는 상페테르스부르크 철강 노동자들 사이에서 선동을 수행했으며, 1907년 철강 노동자들은 그를 런던에서 열린 5차 당대회에 대표자로서 파견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처음으로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다음해 그는 혁명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건강악화로 인해 석방되었다. 그 후 그는 스위스로 가서 레닌의 최측근 협력자가 되었으며, 둘의 관계는 1917년까지 지속되었다. 1910년 레닌은 멘세비키와의 타협 및 연합 중앙위원회-이 시기 볼세비키와 멘세비키는 형식적으로는 같은 조직이었다-의 유지를 주장한 사람들을 비판했으며, 그는 그런 레닌을 지지한 유일한 볼세비키였다. 1911년 그는 파리 근교의 롱쥐모에서 볼세비키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비합법적인 당의 학습 조직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쳤다. 1912년 1월 프라하에서 열린 6차 당 대회에서 그는 새로운 모든 볼세비키 중앙위원회에 당선되었다.
1차대전 중에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당의 1915년 짐머발트 대회와 1916년 킨달 대회의 결의를 상기시키며 분명히 국제주의자 편에 섰고, 제국주의 전쟁을 시민 전쟁으로 전화시킬 것을 주장한 ‘짐머발트 좌파’를 조직하는데 노력했다. 레닌과 함께 그는 팜플렛 ‘사회주의와 전쟁(1915)’와 2인터내셔널의 개량적 세력의 사회-애국주의적 배반을 공격하는 논문 모음집 ‘현실에 대항하여(1916)’를 썼다.
1917년 2월 혁명 후, 그는 레닌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왔다. 레닌은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전복하자는 ‘4월 테제’를 발표했으나, 그는 다른 볼세비키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그에 반대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볼세비키들을 목 죈 ‘7월 위기’ 동안에 레닌과 함께 잠행해 핀란드로 도망했어야만 했으나, 10월에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이 시점에서 권력을 잡을 필요성에 직면했던 지노비에프는 카메네프와 함께 10월 봉기에 대한 반대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와 카메네프는 봉기에 대한 볼세비키의 계획을 노출시킨 문건을 출간했다. 레닌은 그들을 ‘투쟁 파괴자들’이라 비난하며 그들의 출당을 제안했으나, 후에 철회되었다.
10월 혁명 후, 지노비에프는 멘세비키와 SR을 포함한 연립정부 구성을 주장했고, 이들을 배제하려는 레닌의 해법에 반대하는 의미로 중앙위원직을 사임했으나 며칠 뒤 복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비에트 레짐의 주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는데, 그는 노총 중앙위원회(Trade Union Central Council) 당 대변인으로 초기 모든 노총 회의를 주관했다. 이후에 그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페트로그라드는 볼세비키 노조들의 핵심이 모여있던 철강 산업의 중심지였고, 지노비에프는 당 내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내전동안 정부가 모스크바로 이전했을 때, 그는 북부 코뮨의 의장으로 지명되었다. 이 때 그는 공화국 수비대 위원회의 대표이자, 제 7군사 혁명 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했다. 1919년 3월의 8차 당대회에서 그는 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그리고 1921년 10차 당대회에서는 정위원으로 뽑혔다.
1919년 코민테른 창설 시기 레닌의 제안으로 그는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1920년에 독일에서 4시간의 연설을 끝낸 후,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의 다수파와 신독일공산당(KPD)의 연합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트로츠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벨라 쿤과 함께 1921년 독일에서의 봉기를 선동했다. 그는 이 봉기가 대중을 ‘감동시키고’ 행동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봉기는 실패했고, 이는 독일 공산당을 엄청난 위기로 몰아갔으며, 소련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코민테른 3차 대회에 앞서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총회에서 그는 노동 대중을 개량적 지도부로부터 분리하려는 목표를 가진 ‘공동전선 전술(United Front tactics)’에 극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 전술이 집행부의 공식 정책으로서 의회에 제출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국제 정세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으로서 1923년 독일 혁명의 패배가 발생했다. 코민테른 의장으로서 지노비에프는 좌익적 언사로 신독일공산당을 재촉했다. 신독일공산당 지도부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계획이 실패하자,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봉기의 연기를 승인했고, 신독일공산당의 비서인 브랜들러를 그 실패의 속죄양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관료적 책임 회피에 대해 트로츠키가 비판하자, 그는 5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비난하기 위해서 외국의 공산당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이용하였다.
지노비에프는 정부의 볼세비키적 정책으로의 결정적 전환에서 거의 매번 트로츠키에 반대했다. 1922년 레닌의 발병 이후, 그는 카메네프, 스탈린과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형성했고, 결국 모든 국가 권력을 휘둘렀다. 레닌의 심각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1922년 11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을 총서기로 임명하도록 페트로그라드 대표단을 이끌었다.
레닌의 와병으로 당지도권에 공백이 생긴 12차 당대회에서 트로이카는 트로츠키를 중상모략하고, 레닌을 칭송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지노비에프는 ‘당에 대한 모든 비판을, 심지어 좌익적 비판까지도 멘세비키적 비판이다.’라며 정책에 대한 모든 토론을 억압했는데, 그는 사실 이런 방식으로 그의 리더쉽에 대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트로츠키에 대한 투쟁의 선두에 섰던 것이다.
그러나 1923년 여름에 공업 중심지에서 대중의 기습 파업(wildcat strikes)이 발생했고, 3인 위원회(트로이키 체제)는 많은 당 간부들이 파업의 요구들에 동의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당 내에서 46명의 주요 볼세비키들이 당의 민주성 회복과 분파 형성권을 요구하는 10월 선언에 서명했고, 지배 분파의 경제 정책에 가혹한 비판을 가했다.
이런 비판을 수용하면서 지노비에프는 11월, 당의 민주성 회복을 약속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당 내의 ‘3인의 지배’에 대한 광범위한 적대는 계속되었고, 이는 급속히 진압되었다. 그러자 트로츠키는 ‘새로운 경로(New Course)’에 대한 그들의 조종을 공격하는 공개 서신을 쓰면서 ‘옛 수비대(Old Guard)’와 공개적으로 절연했다.
다음 해의 13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에프는 트로츠키는 그의 견해를 반드시 공개적으로 철회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지노비에프의 지지자들 중 다수는 이 요구를 지지하지 않았고, 그는 그 요구를 중단해야 했다. 그는 ‘지금은 무엇보다 당이 하나의 통일체가 되어야 할 시기이다.’라고 선언했다.
1924년 가을, 트로츠키는 1917년에 행한 그의 연설들을 편집한 책의 서문으로 ‘10월의 교훈’을 썼다. 지노비에프는 이것을 구실로 삼아 ‘문예 논쟁(Literary debate)’-트로츠키의 ‘농민에 대한 경시’ 슬로건이 발명되고(invented), 알려진(proclaimed), 그리고 트로츠키의 저술들과 그의 좌익 동료들이 억압을 받게 된 당 기관지에서의 거대한 캠페인-을 시작했는데, 그 캠페인은 트로츠키는 과거에 비(非)-볼세비키적이었으며, 그것은 곧 트로츠키가 기본적으로 볼세비키의 적인 멘세비키였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1924년 말에 지노비에프는 중앙위원회가 트로츠키를 그의 지위를 박탈할 것을 정치국에 요구했다. 그러나 당에 큰 위기가 발생할 것을 직감한 스탈린은 그것을 거부했다. 대신 트로츠키는 군사인민위원에서 해임되었다. 트로츠키는 어떠한 권력의 지위도 갖지 못하게 된 동안 3인 위원회도 붕괴되었다. 지노비에프는 카메네프와 함께 총비서인 스탈린을 내쫓기 위한 술책을 부려 트로츠키를 다시 군사인민위원으로 복귀하도록 계획했으나, 그들이 스탈린을 제거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1923년 독일 혁명의 패배와 서유럽의 안정에 따른 러시아의 계속된 고립은 관료들의 지위를 강화시켰으며, 1924년 후반기에 스탈린은 트로이카 체제에서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부하린이 유럽 혁명의 전망을 포기한 채, 1924년 가을에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점차적으로 농민들에게 대대적인 양보를 할 것을 주창했다. 스탈린은 이 이론에 근거하여 국가 기구의 권력 증진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했으며, 1925년 4월 그것을 공식적인 당 정책으로 만들려고 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이 움직임에 강력히 반대했으나 그들의 반발은 당의 소란을 피하기 위해 이내 잠잠해졌다. 지노비에프는 1925년 9월까지 ‘일국에서의 사회주의’에 공개적으로 반대를 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책 ꡔ레닌주의ꡕ에서 [스탈린이 주도한] 퇴보한 소비에트 경제는 자신의 생산 기술을 사회주의를 달성할 만큼 충분히 높은 수준으로 결코 증대시킬 수 없었다며, 외국의 혁명에 대한 전망의 포기는 레닌식 국제주의를 깨버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 중앙위원회의 10월 회의에서 그는 다가오는 14차 당대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자유토론을 요구했으나, 당의 공식적 정책에 대한 공식적 비판을 금지한 스탈린과 부하린의 지지자들에 의해 부결되었다.
적대적 분파들 사이에서 거대한 충돌이 14차 당대회에서 발생했고, 그 결과 스탈린과 부하린이 공산당 당대회에서 다수파로 성장했다. 새로운 당 지도부는 즉시 ‘레닌그라드 반대파’의 역량을 파괴하는 데 착수했고, 그 결과 레닌그라드 당비서는 지노비에프에서 키르프로 교체되었고, 지노비에프의 지지자들은 당 지도부에서 제거되었다.
1926년 4월, 레닌그라드와 좌익 반대파들은 마침내 연합을 시작했다. 지노비에프는 트로츠키에게 3인 위원회가 어떻게 그를 추방했는지를 폭로했다. 당 중앙위원회(CC)의 7월 회기에서 지노비에프는 ‘관료적 억압의 문제에 대하여, 트로츠키는 옳았다.’고 선언했으며,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정책들을 공격하면서 공동 성명을 낭독했다.
스탈린은 그들은 분파를 조직하면서 당의 원칙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면서 반격에 나섰고, 당 중앙위원회(CC)는 선거를 통해 지노비에프를 코민테른 의장에서 해임했다. 그 대립은 당의 서열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회의에서 그들이 발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직된 방해 공작이 추진되어 지노비에프는 15차 당대회의 연단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문제들을 당으로부터의 추방으로 확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당기구들과의 모든 투쟁으로부터 물러났다 - 이는 그가 스탈린에 의해 마련된 제한들을 미리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지노비에프는 영구혁명론에 대한 적의가 남아 있었고,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민주적 독재’에 대해 집착했다. 그는 심지어 동맹세력 내에서도 그러했는데, 『플랫폼』(1927)은 그것의 타당성을 명확하게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랫폼』은 혁명에 의해 달성될 지위의 대차대조표로서 5월에 나왔으며, 그것에 대한 승인 운동은 그 해 말로 예정된 15차 당대회를 대비하여 시작되었다. 지노비에프는 2만-3만 정도의 승인을 낙관했으나, 6천의 승인만 얻어냈다. 비록 그들의 전망이 옳았음이 증명되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패배의 효과는 더욱 큰 힘이었다. 사기저하가 당 전반을 관통했고, 관료주의는 당 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반대 세력을 추방할 준비를 했다.
11월 14일, 당 중앙위원회는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를 잠재적인 적 전체와 함께 당으로부터 추방했다. 12월에 지노비에프는 트로츠키와 분리하여 스탈린에게 항복했고, 12월 18일 그는 당 대회에서 자신의 견해를 ‘잘못되었고, 반레닌적이었다’며 자아비판했다. 지노비에프는 1928년에 다시 입당했고, 소비자 협동조합과 식량 위원회의 한직에 임명되었다. 그 후 그와 카메네프는 관료주의적 질서에 대한 좌익적 반대의 폐기처분을 선언했고, 그들은 정치적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1928년에 시작된 강제적 집산화의 결과로 초래된 국가의 혼란기였던 1930~2년의 시기에 그들은 새로운 정책의 위험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위기의 발전으로 인해 국가 기구들 내에서 스탈린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다시 나타났고, 관료들은 자신들의 지위 약화를 우려하며 반대파 지도자 후보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스탈린과 집산화를 강하게 공격한 우익 반대파로부터 유출된 문건으로 인해 그들은 당으로부터 추방되었고,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 1933년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철회하고, 스탈린 앞에 업드렸다. 그들은 결국 5월에 모스크바로의 복귀를 허락받았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주의’를 공격하여 관료들의 지위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지노비에프를 이용하고자 했다. 1934년 12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체포되어 키로프(Kirov)의 암살(이 사건은 그들이 트로츠키를 고발하게끔 만든 작전의 일부분이었다.)을 감행한 GPU와 연결된 군사 재판정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가공의 반혁명 그룹의 지도부로서 각각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1936년 8월 그들은 교도소에서 나와 사건의 뼈대를 짜맞추기 위한 모스크바 재판정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대중 앞에서 ‘고백’을 한 후 지노비에프는 ‘소비에트 정부와 CPSU 지도부를 암살하기 위한 트로츠키-지노비에프 테러리스트 센터를 조직’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 8월 21일 그의 사형은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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