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대안 반대운동(國大安 反對運動)] ()
Ⅰ. 발생원인. 1946년 7월 3일 유억겸 문교부장관이 공식발표한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이하 국대안)은 경성대학과 서울 및 그 근교에 있는 9개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하나의 종합대학교를 설립하고자 한 안이었다. 문교부는 일제 식민지정책의 유물인 기존 고등교육기관을 전면 폐지하고, 신생 국가에 적합한 고등교육을 건설함은 물론 기존 고등교육기관의 폐쇄성과 불필요한 경쟁 그리고 군웅할거적인 소규모 형태 및 국가재정상의 낭비를 해결하기 위해 종합대학교를 설치한다는 취지문을 발표하였는데 이에 대해 각 대학, 전문학교는 물론 사회 일반에서도 즉각적인 비판과 더불어 안의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이 국대안을 반대하는 근거들은 8.15 직후 제기된 기본적인 민족적 과제 그리고 이에 따른 민족교육의 정립이라는 과제와 긴밀히 연관되는 것이었다. 즉 철저한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자주국가의 수립 그리고 민주적인 사회질서의 정립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국대안에는 크게 다음 세 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첫째, 국대안은 자주적인 독립국가가 수립되기 이전에 국립대학을 설치한다는 것인데, 이는 ‘국립’ 자체가 원칙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시기에 제안되었다는 점 그리고 종합대학으로서의 실효를 물적, 인적 수준에서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여건 속에서 제안되었다는 점이 비판을 받았다. 둘째, 국대안은 소수 문교관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됨으로써 정책결정 과정상에서 그 비민주성을 드러냈고 또한 과도하게 권한을 이양 받은 최고 결정기구로서의 관선이사회는 중앙집권적 통제의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셋째, 국대안에는 경성대학 및 각 전문학교의 진보적 흑은 좌익 성향을 띤 교수, 학생들을 견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음이 지적되었다. 이는 교수, 학생들의 대외 문화 활동 통제, 교수재임용 방식상의 문제, 교수회의의 원칙적 부정 등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이다. Ⅱ. 반대운동의 전개와 그 의의. 1946년 7월 13일 국대안이 발표되자 관련학교 및 일반 사회단체에서는 국대안의 현실 부적합성, 시기상조, 비민주성 및 반민족성을 주장하면서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반대운동의 초기단계인 1946년 7월과 8월까지는 국대안에 내포된 여러 가지 모순점과 한계들이 지적되면서 국대안에 관련된 학교뿐만 아니라 일반 교육단체 및 사회정치단체 등에서도 비판의 여론이 비등하였다. 이어 신학기가 되면서 국대안이 그대로 관철되자 교수, 학생들은 비판적인 문제제기 수준에서 이제 구체적인 집단행동을 취하여 교수 일괄사퇴, 학생 맹휴가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대안 문제는 물론 일제 잔재 문제 등을 둘러싼 교육계 모순들이 구체적으로 쟁점화되기에 이른다. 국대안 반대운동의 최고조기라 할 수 있는 1947년 2월 한 달은 국대안 반대운동이 각급 학교별 그리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띠면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히 관련되어 좌우익 정치세력에게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즉 1947년 1월부터 찬탁과 반탁을 둘러싼 좌우익의 대립이 재연되는 정치적 상황에서, 국대안 문제를 중심으로 좌우익 학생들은 탁치안 이후 다시 한 번 대결하게 됨으로써 국대안 반대운동은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볼 때 정치적 성향을 강하게 띠었다. 이후 신학기틀 앞두고 학생들은 맹휴 고수파와 맹휴 중지파로 나뉘었으나, 3월 개학을 기점으로 국대안 문제는 부분적인 조정과 타협을 거치면서 일단락되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인 총장 선출, 조선인으로 구성된 이사회 구성, 제적학생들의 복적 허가 등이 이루어져 1947년 9월 학기부터는 국대안 반대운동이 현상적으로나마 마무리되었다. 국대안 반대운동이 1년여 간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대안은 그대로 실현되었고 그 반대운동 과정에서 많은 물적, 인적 손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국대안 반대운동은 미국식 종합대학 형태의 국대안을 민족자주적인 입장에서 비판하고, 학원의 자율성 확보와 민주화를 지향하면서 전개되었던 미 군정기 민족교육운동의 대표 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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