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달(崔容達, 1903~?)] ()
(원산 공산주의그룹 관련자)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1925년 3월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사법연구실 조수(助手)가 되었다. 1931년 9월 이강국(李康國), 박문규(朴文圭)와 함께 조선사회실정연구소를 결성했다. 1932년 3월 조수직을 그만두고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33년 4월 서대문경찰서와 종로경찰서, 5월 평양경찰서에 끌려가 사회주의운동 관련 혐의로 취조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934년 5월 이재유(李載裕)그룹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7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36년 7월 원산 공산주의그룹의 지도자 이주하(李舟河)를 만나 자금과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1937년 6월 서울에서 이강국, 이주하와 함께 공산주의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1938년 10월 ‘적색노동조합원산좌익위원회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42년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1944년 봄 학생들 내에 공산주의단체를 결성하려다가 검거되어 6개월간의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북조선인민위 사법국장) 1945년 8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11인의 준비모임에 참석했고, 건국준비위원회 건립에 참여하여 선전부장이 되었다. 9월 건준 치안부장,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상임위원 겸 보안부장 대리로 선임되었으며 인공 정강과 시정방침을 기초하는 데 참가했다. 그후 월북하여 5도정치위원회 사법부 차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국장,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사법국장,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북조선인민위 외무국장을 지냈다. 1953년 1월 산업성 산하 일반제품 수입상사 사장으로 재직중, 박헌영(朴憲永)그룹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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