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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원(趙斗元, 1905~?) 趙一明 이스끄린] ()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 강원도 양양의 지주 집안 출신으로, 조원숙(趙元淑)의 오빠다.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다녔고 양양학생친목회 집행위원, 조선학생총연합회 집행위원, 신흥청년사 동인, 혁청당(革淸黨) 당원, 조선학생회 집행위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집행위원을 지냈다. 1925년 11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성부 제2구 제2야체이까에 소속되었고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5월 모스끄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블라지보스또끄로 파견되었다. 9월 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9년 6월 코민테른 동양부에서 조공 재건을 위해 활동하리는 지시를 받고 귀국했다. 11월 조공조직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3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는 도중 “민족해방투쟁 만세” “조공 만세”라는 구호를 외쳤다는 이유로 1933년 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추가받았다. 같은 해 10월 만기출옥했고 전향문을 발표했다. 12월 일본경찰에 한때 검거되었다. 이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1940년 중석 채굴을 하던 삼각상회의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1944년 1월부터 대화숙(大和塾) 야간학교 일본어 강사를 지냈다. 7월 「사상보국」에 글을 기고했다.
(남로당 중앙위원) 1945년 8월 조공(장안파) 결성에 참여했다. 9월 계동에서 열린 조공열성자대회에 참석했고 조선인민공화국 체신부원으로 선정되었다. 「해방일보」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참석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조공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 전북 대표로 참석했다. 미군정에 의해 한때 검거되었다. 5월 조공 중앙위원회 서기국원이 되었고 11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6월부터 「노력인민」 주필을 지내다가 12월 월북하여 대남선전을 담당했다. 해주 제1인쇄소 출판을 담당했고 1949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본부 서기가 되었다. 1950년 8월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계획위원장, 10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제7부 부부장, 1951년 5월 「민주조선」 부주필, 11월 문화선전성 부상(副相)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의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 인접어

조동근(趙東根, 1896~?)
조동률(曺東律, 1907~36)
조동직(趙東直, 1895~?) 趙東稷
조동혁(趙東爀, 1885~?)
조동호(趙勳祜, 1892~1954) (號)榴亭
조두원(趙斗元, 1905~?) 趙一明 이스끄린
조두원(趙斗元, 1905~?) 趙一明 이스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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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규(曺孟奎, 생몰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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