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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하(李舟河, 1905~50) 朱世民] ()

(조공 재건운동 참가자) 함남 북청에서 화전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9년 가족과 함께 원산으로 이주했고 1914년 원산 광성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광성학교를 마치고 상급학교인 보광학교에 진학했다. 보광학교 재학중에 3 ․ 1운동에 참여한 뒤, 갑산광산으로 피신했다. 그후 원산에서 객주집 사환, 일본인 상점 점원, 우편국 전보배달부 일을 했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3학년 재학중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퇴학당했다. 1924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에서 수학했다. 유학중에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고 찌바(千葉)에서 공산청년동맹에 가담했다가 1928년 한때 검거되었다. 그해 5월 학비 부족으로 귀국했다. 이후 원산부두에서 화물을 운반하는 일고(日塵)노동에 종사하면서 원산노동연합회 재건에 노력했다. 이 시기 원산무산청년연합회에 가입했다. 1929년 11월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에 가입하여 당재건운동에 참여했다. 이즈음 신간회 원산지회 조직부 위원이 되었다. 1930년 5월 반일격문 살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증거가 불충분하여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원산 적색노조운동 지도자) 1931년 1월 태평양노동조합 국내조직위원 김호반(金鎬盤)의 지도하에 원산지방 노동조합운동에 참여했다. 4월 태로(太勞) 서북위원회 책임자가 되어 황해도와 평안도에 파견되었다. 평양에서 정달헌鄭達憲)과 함께 평양노동연맹좌익위원회를 결성했다. 여름 ‘제1차 태로 사건’에 연루되어 용산경찰서에 검거되어 1933년 3월 함흥 지법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936년 2월 출옥하여 원산으로 돌아가, 4월 원산 철도노동자들 속에서 적색노동조합운동에착수했다. 1937년 6월 ‘성대파(城大派)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원산공산주의자그룹을 결성했고 1938년 4월 적색노조원산좌익위원회를 결성했다. 10월 일본경찰에 조직이 노출되어 원산노조 관계자에 대한 검거가 있었으나 피신에 성공했다. 이후 흥남, 원산, 평양 진남포를 무대로 지하운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남로당 중앙위원) 1945년 8월 원산에서 조공 함남지구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 9월 조공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및 서기국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달 결성된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2월 당 중앙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원산에서 서울로 왔다. 1946년 2월 ‘조공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 중앙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11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1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다. 1948년 4월 이후 김삼룡(金三龍)과 함께 남로당을 지도했다.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1월 평양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들과 더불어 남한 혁명운동에 관해 협의했다. 3월 안영달(安永達)의 밀고로 인해 김삼룡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어 한국전쟁 직후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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