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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元世勳, 1887~1959)] ()

(대한국민의회 부의장) 함남 정평의 빈농 집안 출신으로, 1905년 융희중학(隆熙中學)을 다니다가 1906년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11년 3월 비밀결사 ‘독립단’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5개월간 복역했다. 8월 간도로 망명하여 모록의숙(母塵義塾)을 세우고 교원생활을 했다. 1914년 1월 간도 일본경찰의 체포령을 피해 북경(北京)으로 망명했으며, 1915년 5월 연해주 니꼴리스끄로 갔다. 10월에 대동학교를 설립했고 3년간 고등소학교 교장을 지냈다. 1917년 전로한족중앙총회 재정부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대한국민의회 대표자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문제를 논의했다. 1920년 대한국민의회 부의장 겸 재무부장을 역임했다. 1921년 2월 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 소집을요구하는 14인 명의의 ‘우리 동포들에게 고함’이란 성명서에 서명했다. 5월 상해에서 20명으로 구성된 국민대표대회 기성회 성원이 되었다. 1922년 1월 모스끄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했으며 7월 상해에서 시사책진회 결성에 참여했다. 1923년 1~6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후 국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0월 국민위원회에서 파견된 5인의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블라지보스또끄 신한촌(新韓村)에서 꼬르뷰로(조선공산당 중앙총국)의 3인의 대표와 만나 한국독립당 결성방법을 논의했다. 1924년 3월경 블라지보스또끄를 떠나 북경으로 갔다. 1925년 3월경부터 민족유일독립당 조직을 위해 기관지 『도보(導報)』를 발행했다.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 집행위원, 민족자주연맹 정치위원) 1926년 10월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해 장작림(張作霖) 군벌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일본경찰에 인도되었다. 1927년 7월 신의주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9년 1월 만기출옥했다. 1931년 시사주간지 『중앙시보(中央時報)』를 발행했다. 이때 조선문필가협회를 발기하고 초대회장에 선출되었다. 조선교육협회에 참여하고 국내에 거주하면서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1945년 8월 고려민주당 발기를 선언했고, 서울 계동에서 조선민족당을 발기했다. 9월 한국민주당 총무로 선임되었다. 1946년 1월 한국민주당 대표로 ‘4당회합’에 참가했다. 7월 5인의 우익진영 대표의 한 사람으로 좌우합작 회담에 참가했다. 10월 한국민주당을 탈당했고 12월 과도입법의원 관선(官選)의원이 되었다.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여 정치위원이 되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 5 ․ 10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여 선거에 불참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서울의 중구 갑구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혹은 월북)되어 1959년 12월 25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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